<산책>다니구치 지로 지음박정임 옮김이숲 펴냄
일본의 유명한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는 〈산책〉을 통해 하나의 실험을 한다. 등장인물의 감정 표현을 담당하는 형용사나 수사를 절제하고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꾸리기로 한 것. 대사가 거의 없다. 기분이 좋다거나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정 모두 그림으로 전달하려고 했다.

시도는 성공적이다. 집과 거리, 강과 들, 학교와 역전 등 일상의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지면서 작품 속 등장인물의 마음을 대신 보여준다. 〈산책〉은 한 남자의 산책에 관한 이야기다. 산책을 시작한 건 회사로 가던 어느 날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지하철역 한 정거장 전에 내렸다. 날씨가 너무 좋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델은 작가 자신이다. 그 역시 전철을 타고 가던 도중에 내려 어디론가 멀리 걸어갈 때가 있다고 한다.

걷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어떤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작가는 후기에서 말한다. 목적이 없고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게 산책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목적 없이 산책하러 나서면 그 순간부터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이윽고 새로운 게 보인다. 동네 뒷산에 올랐다가 “후지산에 올라갔다 왔어. 이 마을에도 후지산이 있더군”이라고 말하는 남자처럼.

책을 덮고 나서 갑자기 걷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깥 볕이 뜨거워 보였다. 이어폰마저 집에 두고 왔다. 모처럼 먹은 마음이 금세 접힐까 봐 조바심이 났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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