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세월호 1주기를 맞아 4월14일부터 17일 새벽 4시까지 페이스북 계정(www.face book.com/sisain)으로 속보를 내보냈다. 동영상 등이 첨부된 속보 1~67신의 전문은 〈시사IN〉 페이스북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다.
4월14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분향소. 4·16 가족대책협의회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틀 뒤 안산에서 열리는 합동 추모식에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다. 유경근 가족대책협의회 집행위원장은 “대통령이 참석해 세월호법 시행령안 폐기와 선체 인양을 공식 선언해달라는 서한을 청와대에 냈다”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대통령이 두 가지 사항에 대한 답을 하지 않으면 추모제를 열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청와대는 확답을 피했다. 대신 4월16일 남미 순방길에 앞서 박 대통령이 단원고나 팽목항, 안산 합동분향소 가운데 한 곳을 방문할 것이라고 출입기자들에게 설명했다.
4월15일 오전 11시58분 경기도 용인. 세월호 참사로 아들 동혁군을 잃은 김영래·김성실씨 부부가 한살림 성남·용인 지부가 초청한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날 참석자는 30여 명, 30~50대 엄마들이었다. 자식을 키우는 엄마들은 이심전심이었다. 삭발한 김성실씨가 “꿈에 애가 나오면 살려달라고 벽을 긁는다. 우리 마음 알아주고 불러주는 여러분이 나에겐 의사다”라고 말했다. 꿈 이야기에 엄마들은 무너졌다. 눈물을 줄줄 흘렸다.
부부는 시민들을 만나러 다닐 때마다 동혁군 학생증을 챙긴다. 학생증은 동생 예원이가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오빠의 분신이다. 예원양은 부모 반대에도 “오빠 대신 내가 단원고를 졸업하면 좋지 않을까(〈시사IN〉 제395호 ‘오빠가 내 앞에 1분만 나타난다면’ 기사 참조)”라며 올해 단원고에 입학했다. 예원양은 노란색 오빠 학생증과 빨간색 본인 학생증을 항상 목에 걸고 다닌다. 아들 학생증을 품에 안은 아버지 김영래씨는 “어른 말씀을 잘 듣고 타인을 배려하라고 가르칠 수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 가족들은 아직도 2014년 4월을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4월15일 오후 5시19분 세월호 참사 현장. ‘세월’이라 쓰인 노란색 부표가 없다면 이곳이 참사 현장인지 알 수 없었다. 9명이 돌아오지 못한 그곳, 304명이 목숨을 잃은 그곳에 엄마 아빠가 왔다. 형제·남매도 동행했다. 순간 지난 1년간 켜켜이 쌓였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우리 아들’ ‘미안해’ ‘억울해’ ‘못 살아’ ‘금쪽같은 내 새끼’ ‘얼마나 힘들었냐’…. 피를 토하는 흐느낌만 고요한 바다에 가득했다. 한 엄마는 같은 반 친구 이름을 손바닥에 빼곡히 적어 한 명씩 불러주었고, 아빠는 국화꽃을 바다에 던지며 울음을 삼켰다. 이날 바다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이 둥둥 떠다녔다.
4월16일 오전 9시10분 안산 합동분향소. 이완구 국무총리가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이 총리는 가족들 반발로 분향을 하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팽목항으로 간다던데, 세월호 인양과 세월호법 시행령 폐기에 대해 답을 하려면 여기로 와서 답을 해야 한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던 아빠들은 아침부터 눈시울이 붉어진 채 울분을 토했다. 오전 10시 단원고 재학생 800여 명이 걸어서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학생들은 분향소에 들어설 때부터 고개를 푹 숙였다. 자꾸 손이 눈 쪽으로 향했다. 왼쪽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단 학생들은 친구들과 손을 꼭 잡고 이동했다. 동혁군 동생 예원양도 조문했다. 전명선 4·16 가족대책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오늘 2시까지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인양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답변을 기다린다. 답변이 없으면 2시 추모행사는 취소하고 서울로 가겠다”라고 말했다.
4월16일 낮 12시 진도 팽목항. 박근혜 대통령이 팽목항을 찾았다. 팽목항에 남아 있던 실종자 가족들은 자리를 피했다. 항의 차원이었다. 실종 학생 다윤양의 아빠 허흥환씨는 “정치적인 쇼다. 들러리 서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필요한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해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선체 인양에 나서겠다”라는 ‘나 홀로’ 담화문을 발표했다. 유가족들이 요구한 시행령 폐기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박 대통령은 25분 만에 팽목항을 떠났다.
4월16일 오후 1시50분 안산 합동분향소. 대통령 담화 전문이 전해지면서 가족들은 더 화가 났다. 특히 “이제는 가신 분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그분들이 원하는 가족들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고통에서 벗어나셔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란다”라는 대목에서 유가족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 분노는 마침 분향을 마치고 돌아가던 김무성 대표에게 향했다. 김 대표 차량을 유가족들이 몸으로 막았다. 경찰이 출동해 퇴로를 만든 뒤에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날 오후 5시, 유가족들은 합동 추모식을 취소하고 서울광장으로 향했다.
4월17일 새벽 1시20분 서울 광화문 현판 밑. 경찰 저지선을 뚫은 유가족, 대학생, 시민 등 60여 명이 광화문 현판 밑에서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인양에 대한 정부의 확답을 듣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며 주저앉았다. 경찰이 해산에 나서 대학생 4명이 현장에서 연행되었다. 유가족과 시민들이 스크럼을 짜고 학생들을 보호했다. 경찰은 새벽까지 차벽으로 광화문 일대를 차단했다. 광화문 현판 밑은 경찰로 둘러싸인 고립된 섬이었다. 2014년 4월16일 그날처럼 유가족들은 또다시 거리에서 한뎃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