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기대 교수는 국내 고조선 연구 권위자인 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직계 제자다. 윤 교수로부터 문헌학적 연구 기초를 배운 그는 우리 상고사의 무대였던 중국 요녕성(랴오닝성) 랴오닝 대학에서 석사를 하고 길림성(지린성) 지린 대학에서 박사를 하면서 홍산문명(황하문명보다 2000년 이상 앞선 문명)과 고조선·고구려 유물 유적에 대한 광범위한 답사와 비교연구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고조선 연구를 백안시해온 주류 사학계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견제를 받아온 것으로 보인다. 2010년 발표한 〈고구려 도읍지 천도에 대한 재검토〉 논문은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류 사학계 내에서도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있다. 중국 사서에 대한 치밀한 교차 분석과 중국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 등을 바탕으로 한 그의 논문이 서서히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박사 과정의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고구려사를 새롭게 보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역사 연구 주관부서인 교육부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난해 상반기 교육부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이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어딘가에 대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이 연구과제 공모에 복기대 교수팀이 참여해 앞으로 3년간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현재 복 교수를 중심으로 문헌 연구, 지리 연구, 고고학 전공자 등이 참여하는 연구단을 구성했다.

ⓒ시사IN남문희신채호가 투옥되었던 뤼순 감옥을 찾은 상고사 전문가 복기대 교수.
연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복 교수가 주장하는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 상고사 체계를 완전히 다시 써야 하는 대사건이 될 수도 있다.

당장 고려 초기의 강역부터 바꿔야 한다. 장수왕이 요양(랴오양)으로 천도한 후 계속 그곳에 머물다가 거기서 당나라에 패했다면 그 뒤로도 한민족이 만주 일대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즉 통일신라의 북쪽 경계선이 지금 알려진 것과 달라질 수 있다. 고려 초기 북쪽 경계가 원산만과 청천강으로 알려졌는데, 조선 초 편찬한 고려사에는 고려의 북쪽 경계가 지금의 지린성 일대인 선춘령이었고 서쪽으로는 고구려에는 못 미쳤다는 표현이 나온다. 즉 고구려처럼 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요동(랴오둥) 땅의 상당 부분을 고려가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거란의 동쪽 경계나 여말 선초 철령위 문제를 가지고 비정해보면 대략 현재 랴오닝성 본계(번시)시까지 고려의 국경선이 뻗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국가의 강역은 이웃 국가의 국경선, 그리고 선대의 국경선 등과 수직 수평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하나가 바뀌면 그에 따라 나머지도 전부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향후 연구 결과에 따라 한국사를 다시 써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복 교수의 연구가 있기 전 고구려의 수도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1940년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나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의 학설을 집대성해 발표한 내용이 그대로 견지돼 왔다. 즉 동명왕이 현 랴오닝성 환인에서 첫 도읍을 열었고 유리왕 때 지린성 집안(지안)에 있는 국내성으로 천도, 그다음 산상왕 때 같은 지린성 지안의 환도성으로 두 번째 천도한 후 장수왕 때 현 북한의 평양으로 마지막 천도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국사 교과서에서 대대로 수록돼 왔다.

그가 ‘평양’에 대해 의심하게 된 계기

복 교수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중국에서 공부할 때였다. 1992년 랴오닝 대학에서 수학할 때 만주 지역의 지리와 역사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요해총서〉라는 책을 처음 보고 혼란을 느꼈다. 국내에서 배운 한국사와 다른 얘기가 많아서다. 처음에는 그 역시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요사〉와 〈금사〉 등 다른 중국 사서를 비교해보니 내용이 딱딱 맞아들어 갔다. 그러던 중 〈자치통감〉 강의를 듣던 중국인 교수로부터 “사실 수나라와 고구려 간 전쟁 때 수나라가 지금의 평양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라는 얘기를 들었고,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다시 보다 당시 랴오양을 여행하던 박지원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복 교수의 논문을 읽어보면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초기 연구가 엉터리로 진행됐다는 점이 드러난다. 거슬러 올라가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패수를 대동강으로 규정해놓고 지금의 평양이 그 위에 있으니 옛 고구려 평양이라는 식으로 단정한 것부터 잘못이었다.

실증사학을 표방했던 식민사학의 파탄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바로 자신들의 의도와 맞지 않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초기 기록이나 〈요사〉 〈원사〉 등의 사서는 무시해버리는 태도다. 특히 고구려 천도 과정에 대한 그들의 설정이 잘못됐다는 것은 1990년대 이후 중국 고고학계가 해당 지역을 전부 발굴해봤는데 그 시기의 유물이 나온 게 없었다는 점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동명왕 1년(BC 37년)에 도읍했다는 환인현 오녀산성에서는 고구려 중기에 해당하는 동천왕(247년)~고국원왕(342년)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나왔다. 또 AD 3년에 해당하는 유리왕 때 왕궁 터라던 지안의 국내성 터와 200여 년 후인 AD 209년 산상왕의 환도성 터로 알려진 지안의 왕궁 터 유물·유구에 큰 차이가 없었다. 여기에다 장수왕이 옮긴 평양이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 랴오양이라면 식민사학에 이어 해방 후 주류 사학이 견지해온 고구려 도읍지 역사는 모두 수정이 불가피한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가 수도를 옮긴 것이 세 번이 아니라 모두 일곱 번이었다(위 표 참조). 환도성이 두 번, 평양성이 네 번이다. 그동안의 학설은 이름이 같으면 같은 지역으로 봤는데, 이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따라서 전체 8군데의 도읍지를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 했다. 이 중 처음 세 곳인 졸본·국내성·환도는 복 교수가 2010년 논문을 쓸 때까지는 찾지 못했으나 지금은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 동천왕 21년 옮긴 평양은 고구려 창건지로 잘못 알려진 환인으로 확인됐다. 문헌 기록을 교차 확인하고 오녀산성에 대한 발굴 결과에서 고구려 중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확인됐다. 이곳에서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고국원왕 초기까지 재임했다.

고국원왕 대에 전연의 모용황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환인 안에서 환도성으로 1년간 거처를 옮겼으나 모용황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미천왕의 묘가 파헤쳐지고 고국원왕의 모친이 포로로 잡혀간다. 이 상황에서 고국원왕이 천도한 곳이 지금 광개토대왕비가 위치하고 있는 지린성 지안의 동황성(東黃城)이다. 지안은 랴오둥의 중심에서 멀찍이 벗어난 곳으로, 패전의 실의를 딛고 재충전해야 할 고구려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 기간 고구려의 위대한 왕들이 등장한다.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이다. 특히 광개토대왕은 동쪽으로 신라·백제, 랴오둥의 북쪽까지 광범위하게 영토를 확장했다. 더 이상 랴오둥의 구석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됐다. 따라서 장수왕 대에서 랴오둥 지역의 중심인 랴오양에 진출해 적극적인 서진정책을 추진했고, 베이징 근처 난하(롼허) 유역까지 완전히 수복함으로써 국시인 ‘다물’정신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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