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초, 합쳐서 1100쪽이 넘는 두툼한 양장본 두 권을 받았다. 〈자본〉 1-1과 1-2. 전체 세 권 중 제1권을 두 책으로 나누어 번역했는데, 2, 3권은 내년쯤 펴낼 예정이라는 게 도서출판 길 이승우 기획실장의 설명이다. 〈자본〉(〈자본론〉)을 받아쥔 느낌은 독특했다. 21세기에 칼 마르크스의 ‘신간’이라니.

1867년 초판이 나온 이 책만큼 논란을 겪은 책도 드물다.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영국 BBC는 지난 1000년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을 발표했는데, 그 첫 번째가 〈자본〉이었다. 올해 초 교수신문이 국내 계간지와 학술지 편집위원에게 설문한 결과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또한 〈자본〉이었다. 물론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이 책의 수요는 급감했고, 19세기 자본주의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기에 21세기 현실에 적용하기에 맞지 않는 대목도 많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힘을 완벽하게 묘사한 상품의 시인 마르크스, 혹은 우리 일상 생활의 소외와 물화를 보여준 ‘문화 연구’의 마르크스가 여전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한 〈자본〉의 상징성은 크다. 더구나 ‘혁명의 시대’가 끝나서 ‘위험성’마저 줄어든 마당이니! 슬라보예 지젝의 시니컬한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날에는, 심지어 월 스트리트에도, 여전히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 나온 〈자본〉이 실은 온전한 신간은 아니다. 1987년 출판사 이론과실천에서 국내 최초로 〈자본〉을 완역했던 강신준 교수(54·동아대 경제학)가 21년 만에 이 책을 새롭게 다시 번역했다. 새 번역본은, 쉽게 읽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는 강 교수의 말처럼 문장이 깔끔하고 유려한 편이다. ‘상품’을 설명하는 앞부분은 여전히 난삽하고, 독일 관념철학의 개념어를 그대로 옮긴 듯한 단어가 가끔 툭툭 튀어나오지만, 중반 이후 등장하는 역사적 사례 등은 역사소설을 읽듯 생생하고 재미있다.

“당시는 시대적인 요청 때문에 서둘러 내느라 번역 오류가 많았고, 그나마 모두 절판됐다. 지금 서점에 있는 김수행 선생 번역본(비봉출판사판)은 영어판 중역본이라서 독일 관념철학을 토대로 한 변증법적 유물론 부분을 옮기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봤다. 묵은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다시 번역을 마쳤다.”
강 교수가 한국 최초로 〈자본〉 번역자가 된 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다. 1987년 그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농협 조사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근처에서 출판사 이론과실천을 운영하던 친구 김태경 사장이 퇴근길에 들르라고 해서 갔더니 원고 한 꾸러미를 주는 것이었다. “‘빵잽이’(민주화운동으로 복역하고 출소한 학생들) 여섯 명한테 〈자본〉을 나눠서 번역하게 했는데, 원고 상태나 봐달라”는 부탁과 함께. 당시 〈자본〉은 금서 중의 금서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원고를 집에 가져가서 읽었다. 거칠고 오역이 많다는 말과 함께 원고를 돌려준 며칠 뒤, 김 사장에게서 “문제가 많지만 나온다는 게 중요하다, 심각한 부분만 교열을 봐달라”는 연락이 다시 왔다. 그는 두 달 정도 원고를 교열해서 넘겨줬다. 그렇게 해서 ‘역자 김영민’이라는 가명으로 한국어판 〈자본〉 1권이 출간됐다.

김수행 번역본은 영어판을 옮긴 것

당시 〈자본〉 출간의 여파는 컸다. 책은 당연히 금서가 됐고, 수배령이 떨어진 김태경 사장은 한동안 도망다니다가 자수했다. 김 사장의 약혼자였던 강금실 판사(전 법무부 장관)가 법복을 벗고 변호를 맡을 채비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검사가 이적성을 입증하지 못해 공소를 포기하는 바람에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자본〉은 그렇게 한국에서 해금됐다. 강 교수는 이듬해 박사논문을 끝낼 목적으로 휴직서를 낸 뒤 2, 3권까지 번역해서 이번에는 본명으로 출간했다.  

17년째 동아대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을 강의하고 있는 그에게 마르크스 이론이 아직까지 현실에서 효용 가치가 있는지를 물었다.

ⓒ시사IN 백승기21년 만에 〈자본〉을 새롭게 재번역한 강신준 교수.
“수강생이 계속 줄다가 최근 조금씩 느는 추세다. 신자유주의가 심화하면서 학생들의 위기감이 그렇게 반영되는 것 같다. 자본주의 체제가 계속되는 한 마르크스가 제시한 분석틀은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고 본다.”

강 교수는 옛 동독의 디츠 출판사에서 1956년에 발간한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일명 ‘메프(MEW)’)에 들어 있는 〈자본〉을 번역했다. 메프는 옛 사회주의권에서 이론 수뇌부 구실을 했던 동독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가 편집을 맡아서 이른바 사회주의권의 ‘정본’ 취급을 받았던 저작집인데, 〈자본〉 1권은 1890년 엥겔스가 편집한 4판이 실렸다.

〈자본〉 1권은 다양한 판형이 존재한다. 1867년 나온 초판과 현재의 책은 많이 다르다. 마르크스는 너무 난삽하고 어렵다는 조언을 듣고 1873년에 〈자본〉 1권의 2판을 거의 새롭게 고쳐 썼다. 3, 4판은 1883년 마르크스가 죽은 후, 마르크스의 친구이자 평생 동지였던 엥겔스가 주석을 덧붙여서 펴낸 책이다. 〈자본〉 2, 3권은 마르크스가 초고만 써놓은 뒤 죽었기 때문에 엥겔스의 손을 거쳐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됐다.

〈자본〉의 번역본은 1872년 러시아에서 처음 나왔다. 러시아판은 독어본 원본보다 훨씬 많이 팔렸는데, 사회주의를 겨냥해 복지 정책을 폈던 독일 비스마르크 치하에 비해 차르 체제의 러시아에서 사회 모순이 더 심했던 탓이 컸다. 프랑스어판도 1872년에 나왔다. 마르크스가 살면서 〈자본〉을 집필했던 영국에서는 마르크스 사후인 1886년에야 영어판이 출간됐다.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자본론〉(비봉출판사)은 1976년 펭귄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는 제4인터내셔널 서기를 지낸 트로츠키주의 이론가 에르네스트 만델이 쓴 75쪽 분량의 서문이 붙어 있어서 흔히 ‘만델판’이라고도 불린다.

기자명 안철흥 기자 다른기사 보기 ah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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