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에 영화 〈변호인〉을 볼 때 생각이 난다. 아마도 송영창씨가 역을 맡았던 판사가 ‘송변’에게 엉뚱한 소리를 할 때였을 거야. 네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지. “말도 안 돼!” 영화가 끝난 뒤에 나오면서도 “정말로 판사가 그렇게 말했어요?” 하며 씩씩거리던 네 모습이 선연하구나. 네가 말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자로 쓰면 ‘망언(妄言)’이라는 단어가 될 거야. 이치에 맞지 않고 망령 난 말이라는 뜻이지.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네가 그 이상으로 발끈할 ‘망언’을 늘어놓은 후안무치한 사람들은 참으로 많았단다.

1955년 9월로 올라가 보자. 당시 현안 중 하나는 휴전을 감시할 중립국 감시단 선정 문제였어. 북한 측은 공산국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중립국으로 내세웠고 남한은 당연히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지. 그러던 어느 날 대구에 서울의 한 고위 인사가 방문했어. 늦더위가 대단했던 날, 학생 수천명은 오로지 그 고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체코·폴란드 반대!”를 목이 쉬도록 외치며 ‘데모’를 했단다. 이걸 보고 속이 터져버린 사람이 있었어. 〈대구매일신문〉의 주필 최석채라는 분이었지. 그분은 9월13일 ‘학도(학생)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제목의 사설을 써.

“(그 관리가) 대단한 국가적 공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수천 수만 남녀 학도들이 면학(勉學)을 집어치워 버리고 한 사람 앞에 10환씩 돈을 내어 수기를 사 가지고 길바닥에 늘어서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치 못한다….”

영화 <변호인>에서 판사 역을 맡았던 배우 송영창씨(위).
그런데 이 사설이 높은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린 모양이야. 사설이 나오자마자 사설 쓴 사람을 처단하라 소리가 드높더니 급기야 다음 날 깡패들이 몰려와서 신문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기자들을 흠씬 두들겨 패버렸으니까. 국회에서 화급히 내려보낸 진상조사단 앞에서 경상북도 경찰국 사찰과장 신상수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망언을 남긴다. “백주(대낮)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모름지기 테러라는 것은 으슥한 밤이나 미명의 새벽에 이뤄지는 것이 정석인데,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벌어진 범행이 어찌 테러일 수 있는가 하는 뜻이었지. 이 사람에 따르면 대낮의 절도도 절도가 아닌 셈이야. ‘말이 안 되는 망언’이 분명하지? 하지만 그 뒤에 벌어진 일을 들으면 아마 너도 말문이 막힐 것 같다. 경찰은 깡패를 잡아 가두기 전에 사설을 쓴 최석채 주필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시켜 버렸으니까 말이야. 이유는 “그 사설이 북한 방송에 인용돼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했기 때문”이었어.

아빠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1987년의 1월은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웠어. 날씨도 추웠지만 무엇보다 한 대학생이 경찰에 끌려가 영화 〈변호인〉에서 본 그 물고문을 당하다가 숨을 거두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지.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었어. 처음에 경찰은 사력을 다해 이 사실을 숨기려 했지. 대학생의 죽음이 알려지고 ‘가혹 행위’, 즉 고문 가능성이 제기됐을 때 당시 경찰의 최고 책임자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마이크를 잡았어.

나는 그때 발표를 생생히 기억한다. 워낙 그전부터 툭하면 TV에 나와서 ‘원천봉쇄(源泉封鎖)’ ‘발본색원(拔本塞源)’ 등 요상한 한자어를 남발하던 사람이어서 그랬겠지.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계급장을 어깨에 번쩍이면서 그는 이런 발표를 한단다. “박군이 밤사이 술을 많이 마셔 갈증이 난다며 물을 여러 컵 마신 뒤 심문 시작 30분 만에 수사관이 책상을 ‘탁’ 치며 추궁하자 갑자기 ‘억’ 하고 쓰러졌다.” 탁자를 탁! 치니 억! 하고 사람이 죽었다는 게 대한민국 경찰 수장의 발표였어.

ⓒ연합뉴스1987년 1월26일 박종철군 추모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경북도경 사찰과장 신상수나 대한민국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자신들의 말을 스스로 믿었을까? 그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입 밖에 냈던 것일까? 그렇게 출세한 사람들이 머리가 나쁘지도 않았을 텐데 그 말이 자신에게 카운터펀치로 되돌아올 ‘망언’임을 몰랐던 것일까?

미안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게 만들어서

나는 실제로 그랬다고 생각해. 어리석음 때문이라기보다는 교만한 마음 때문에. 우둔해서라기보다는 사람들을 그만큼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즉 자신들이 상대한 국민이란 이 정도로 하면 대충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고, 설득이 되는 존재라고 여겼던

ⓒ연합뉴스강민창 치안본부장(위)은 고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라는 수사 발표로 빈축을 샀다.
게 아닐까 해. 자신이 상대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으며 또 그렇게 여길 만한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그런 망언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의심해보는 거야.

당장 엊그제 한 백화점에서 주차 아르바이트생을 무릎 꿇린 모녀를 떠올려보자. 그들은 “돈을 기백만원 썼는데” “주차 요원한테까지 이런 일을 당한” 데 대해 분노하고, 사람이 사람을 무릎 꿇리는 일에 대해서도 “화가 나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하고 있거든. 그 모녀도 평소에는 그렇게 ‘진상’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자신들은 주차 요원하고는 ‘레벨’이 다른 존재라는 확신이 그들로 하여금 기자들까지 불러설랑 “우리가 피해자!”라고 망언을 늘어놓는 정신 상태를 만들지 않았을까.

이렇게 두고 보면 망언(妄言)이란 대개 망령이 나서, 즉 사람의 머리가 흐려져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트릿하게 보인 까닭으로 나오는 소리일 듯하다. 우리 딸에게 부끄럽지만 요즘 아빠도 그런 사람의 일부가 된 것 같아 슬프네. 며칠 전 국정원이 증거와 증인을 조작하고 심지어 외국 국가기관의 출입국 증명서까지 위조해서 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버린 사건에 대한 수사 발표가 있었어. 그런데 그 어려운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대한민국 최고의 두뇌라 할 검찰 간부는 국정원에 ‘날조’ 혐의를 제기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국가보안법상 날조죄가 적용되려면 범죄 성립 여부에 관련된 증거가 허위인 줄 알고 날조한다는 범의가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국정원 요원들이 어떤 사람이 간첩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증거를 위조하면 ‘날조’가 되지만, 간첩이라고 믿으면서 증거를 조작하고 허위 증인을 세운다면 그건 ‘날조’가 아니라는 얘기가 되는 거야. “백주의 테러가 테러가 아니듯” “탁 치니까 억 하고 대학생이 죽어버리듯” 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며 아빠는 마치 〈변호인〉을 보던 너처럼 묻게 돼. “말도 안 돼! 정말 검사 맞아?”

영화를 보면서 나는 네게 이렇게 대답했지. “그때는 다 저랬어.” 그런데 오늘 나는 이렇게 덧붙여야 할 것 같아 무척 속이 쓰리구나. “그런데… 지금도 그래.” 미안하다. 아빠를 비롯해서 아빠 친구들은 조금 더 똑똑해져야겠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희들이 듣지 않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저런 ‘망언’을 늘어놓아도 괜찮은 헝겊 막대 같은 사람들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