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와 십상시’의 국정 농단인가,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지만씨를 따르는 ‘양천모임’(조응천과 박관천 이름을 딴 명칭. 이른바 7인회)이 벌인 국기 문란 행위인가.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의 ‘동향’ 문건을 둘러싸고 양측의 공방이 치열한 가운데, 검찰 수사는 내용의 진위를 캐는 대신 문건 유출자를 색출하는 쪽에 맞춰진 듯하다. 문건 내용을 ‘근거 없는 낭설’로, 문건 유출을 ‘국기 문란 행위’로 설정한 박근혜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모양새다. 문건에 언급된 내용들(김기춘 비서실장 교체설, 이정현 홍보수석과 김덕중 국세청장 교체 등)이 시차를 두고 실제 이뤄져 이 문건을 두고 ‘예언서’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닌 듯하다.

검찰은 해당 문건을 작성한 청와대 민정수석실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과 박관천 전 행정관(경정)을 부르고 주변을 압수수색하는 등 문건 작성 배경과 유출 과정에 대한 조사에 치중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문건 작성자인 박관천 경정에게 당초 정윤회씨와 십상시 모임을 제보한 이가 박동열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이었다는 점을 밝혀내고, 그가 박 경정에게 과장된 정보를 흘려 허위 문건 내용을 작성하도록 했다는 쪽으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200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기 추도식에서 박지만씨(왼쪽)와 박근혜 대통령이 대화하고 있다.


국정 농단 시비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정윤회씨도 12월10일 검찰 조사를 받았다. 정씨는 조사를 받으러 가기 전 기자들에게 “불장난을 저지른 배후가 곧 밝혀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가 언급한 배후는 박 대통령의 친동생 박지만씨라는 게 중론이다. 아닌 게 아니라 검찰은 막바지 순서로 박지만씨에 대한 소환 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 검찰은 박지만씨를 따르는 청와대 내 일부 세력이 정윤회씨와 ‘문고리 권력 3인방’ 등을 음해하기 위해 허위 사실을 공식 문서로 작성해 시중에 유출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런 검찰의 수사 방향은 청와대가 최근 별도로 내부 조사를 벌인 후 검찰에 넘겼다는 특별감찰 보고서 내용과 맞물리면서 논란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는 ‘정윤회와 십상시 동향 문건’을 만든 조응천 비서관과 박관천 행정관이 ‘양천모임’(7인회)을 통해 조직적으로 허위 보고서를 양산해 유출했다는 정황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가 주장하는 양천모임의 핵심 멤버는 조응천 전 비서관과 박관천 경정, 박지만씨가 운영하는 EG의 홍보팀장 출신 전 아무개씨, 검사 출신 최 아무개 변호사, 조 전 비서관 밑에서 근무한 오 아무개 행정관, 국정원 국내정보파트 국장 출신 고 아무개씨, 1998년 박근혜 의원 비서로 활동한 〈세계일보〉 간부 출신 김 아무개씨, 검찰 수사관 박 아무개씨 등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청와대의 이런 적극적 공세는 검찰을 다시 한번 압박하는 부적절한 대응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양천모임의 주도자이자 정윤회 동향 문건의 작성과 유출을 총괄한 것으로 몰린 조응천 전 비서관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청와대가 7인회 멤버로 지목한 이들과 만남을 가진 적도, 대응책을 논의한 적도 전혀 없으며, 양천모임이라는 말 자체가 ‘문고리 권력’의 날조라는 것이다. 다만 조 전 비서관은 박지만 회장의 측근인 전 아무개씨를 박근혜 정권 출범 초기에 대통령 친인척을 관리하는 공직기강비서관실로 영입하려고 했지만 당시 ‘문고리 권력 3인방’의 반대로 좌절된 적이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박관천 경정이 지난해 말 총경 승진을 꿈꿨으나 좌절되는 등 인사 불만이 누적되면서 허황된 문건을 작성한 뒤 유출했다는 청와대발 주장에 대해서도 ‘음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2009년 경정으로 승진한 박 행정관은 최소 6년 이상 근무해야 되는 총경 승진 연한 규정으로 볼 때 지난해에는 전혀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허황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12월12일 현재, 문건을 〈세계일보〉에 흘린 이는 박관천 경정이 아니라 서울경찰청 정보분실 소속 최 아무개 경위로 알려졌다.

또 다른 청와대 문서인 ‘박지만 동향’도 유출

이번 ‘정윤회 문건’ 수사 국면에서 새로운 의혹도 불거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정윤회씨 동향 문건 말고, 박지만씨와 부인 서향희씨 주변의 동향과 비위 정보를 담은 100장가량의 또 다른 청와대 문서가 유출돼 지난 5월12일 박지만씨 손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이 문건을 최초로 입수한 곳은 〈세계일보〉였다. 〈세계일보〉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지만씨에 대한 부정적 내용을 담고 있는 청와대 동향 문건을 입수한 뒤 5월12일 사실 확인 취재차 박씨를 만났다. 문건을 본 박씨는 남재준 국정원장과 청와대에 문건 보안 시스템의 심각성에 대해 알리겠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이 문건과 관련해서는 조응천 전 비서관이 즉시 대응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 전 비서관은 이 문건의 처리 경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경악해서 박 대통령에게 알려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김기춘 비서실장을 믿을 수가 없어서 고민한 끝에 지만씨에게 건넸다. 애가 탔는데 조치가 없었다. 공직기강비서관실에 함께 있던 오 아무개 행정관에게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에게 건네라고 부탁했다. 그는 대통령을 수시로 만나는 문고리니까. 얼마 후 민정수석실 비서관이 나에게 (문건을 보낸) 의도가 뭐냐고 전화해왔다. 무고 아니냐고 물어서 당장 조사부터 하라고 소리쳤다. 그 뒤 엉뚱하게 오 행정관도 대기발령됐다.”

 

 

 

ⓒ연합뉴스박관천 경정이 근무하는 도봉경찰서를 압수수색한 검찰 관계자들이 압수 물품을 싣고 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결국 올해 초 청와대에서는 ‘정윤회 동향 문건’이 보고된 후 작성자들이 청와대에서 쫓겨났고, 역으로 ‘박지만 동향 문건’도 대량 작성돼 시중에 흘러나왔던 셈이다. 박씨에 대한 부정적인 동향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 문건을 작성한 세력과 유출 세력에 대한 별도의 수사도 불가피해 보인다. 청와대는 최근 이 문건에 대해서도 유출자가 조응천 전 비서관 쪽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조응천 전 비서관은 청와대가 너무한다는 반응이다. 그는 “나는 박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려고 했지 싸우려 한 게 아니다. 답답하고 억울하다”라고 주장했다. 조 전 비서관은 또한 이번 문건 파동을 ‘제2의 윤필용 사건’이라 지칭했다. 윤필용 사건이란 1973년 당시 수방사령관이던 윤필용 소장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각하의 후계자는 형님이십니다. 신라의 김춘추도 당나라에 갔다 와서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철퇴를 내린 사건이다. 윤필용 사령관과 그를 따르던 장교들은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모두 억울하게 처벌받았다.

 

기자명 정희상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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