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6일 저녁 7시, 안방 침대에서 권 아무개씨(24)가 잠이 든 어머니 나은숙씨(가명)를 내려다보았다. 살짝 잠이 깬 나씨는 딸의 눈에 잔뜩 고인 눈물을 보았다. 계약 해지 통보를 받은 이후 한 달 동안 권씨는 매일 울었다. 그날도, 그렇게 울음을 삼킨 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두 시간 후 잠이 깬 나씨는 딸의 방에서 쓰러진 권씨를 발견했다. 말끔히 정리된 딸의 책상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엄마’로 시작하는 편지 두 통이 놓여 있었다.

‘나는 우리 미래에 대해 희망이 없어. 내가 2년 동안 최선을 다하고 정을 쏟고 기대하고 미래를 그려나갔던 경험이 날 배신하는 순간, 겨우 참아온 내 에너지가 모조리 산산조각 나는 것 같더라(9월26일 권씨의 편지 중).’ 권씨는 경제단체인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일했다. 비정규직이었던 그녀는 무기계약직 전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4개월 일한 뒤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시사IN 이명익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권씨의 유서에는 “24개월 꽉 채워 쓰고 버려졌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보다 20여 일 앞선 9월4일 쓴 편지도 함께 발견되었다. ‘내가 타인을 위해 봉사를 실천하며 살 정도로 이타적인 사람은 못 되었지만 적어도 피해 안 끼치고 살 자신이 있었다. 최선을 다했다, 2년은. 그런데 24개월 꽉 채워 쓰고 버려졌어. 내가 순진한 걸까? 터무니없는 약속을 굳게 믿고 끝까지 자리 지키고 있었던 게….’

계약 해지 통보를 받은 8월25일,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사기를 당했다”라며 통곡했다. 다음 날 오전, 그녀는 출근하지 않았다. 상사에게 울음이 잔뜩 섞인, 격앙된 목소리로 전화했다. “어떻게 좋게 나가요, 이미 틀렸는데. 설마 했어, 아무런 대책 없이 저한테 (무기계약직 전환을) 장담하신 줄이야. 이거 사기예요(권씨가 남긴 상사와의 통화 녹취).”

숨을 거두기 직전, 친구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울증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 아침에 일어나는 게 싫어. 눈뜨는 게 악몽 같고 새벽에 깨. 항상 이상한 꿈을 꾸고 하루 종일 울어.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 이런 것보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패배감·열등감에 내가 정말 못나 보여. 하루 종일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덜 아프게 죽을 수 있을지 이런 생각해… 살아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어.’

 

 

 

ⓒ시사IN 이명익권씨는 계약 해지 통보 이후 어머니(오른쪽)의 권유로 노무사 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스스로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애쓴 흔적이 그녀의 주변 곳곳에서 보인다. 유서 옆에는 3분의 1가량 읽다 만 ‘시련을 행운으로 바꾸는 유쾌한 비밀’ ‘역경을 이겨내는 마음의 근력’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 〈회복탄력성〉이 놓여 있었다. 밑줄을 긋고, 연필로 내용을 따라 썼다. 책에 딸린 ‘회복탄력성 지수’ 자기 분석을 했다. ‘자아낙천성, 생활만족도, 감사하기 하위 20%’라고 붉은색 볼펜으로 적혀 있다.

‘지키고’ ‘이기기’ 위해 몸부림쳐봤지만…

책장에는 최근에 구입한 〈나를 지켜낸다는 것〉 〈견디면 이긴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같은 책이 꽂혀 있었다. 계약 해지 통보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는 ‘이젠 해탈한 것 같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했던 우스운 착각과 안주가 빚어낸 결과다. 이번 주만 골골대고 일어나야지. 나날이 멘탈이 강해지는 게 느껴진다’라는 글을 남겼다.

계약 해지 통보를 받은 다음 그녀는 서울 신림동에 위치한 공인노무사 학원에 등록했다. 낙담하는 딸을 보며 어머니 나씨가 권유한 공부였다. 그녀의 방 한쪽 벽면에는 노무사 시험 일정표와 시험 방법, 공부 일정표가 붙어 있었다. 인터넷 강의를 듣기 위해 노트북을 새로 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업을 듣기 시작한 9월1일부터 ‘노동단체법’ ‘근로계약법’ 등을 필기한 공책과 〈노동법〉 〈공인노무사 시험용법전〉은 이제 그녀의 영정 앞에 놓였다.

그녀는 노무사 자격시험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친구에게 “노무사가 된 사람 5명 중 1명이 회사에서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대. 그런데 고객이 노무사가 된 나에게 일을 맡길 때 ‘너는 한마디도 못하고 나왔으면서 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그러지 않을까? 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당당한 노무사가 될 수 없을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의지는 곧 낙담으로 바뀌었다. 한 노무사와 상담을 했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상사가 전환을 약속한 명확한 증거가 없어서 (계약 해지가) 부당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권씨는 어머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자 친구였다. 그녀는 지방의 한 사범대를 평균 4.3학점으로 졸업했다. 1학년 1학기 등록금을 제외한 모든 학기에 장학금을 받았다. 계절학기를 들으며 조기 졸업을 했다. 한 대학 동기는 “과대표를 맡고 과내 동아리 활동도 열심이었다. 적극적이고 명랑해 모든 친구와 잘 어울렸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중학생 멘토링을 하며 자기 용돈을 스스로 벌어 썼다. 임용시험을 권유하는 어머니에게 “모든 학생을 포용하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살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HRD(Human Resources Development:조직의 인재를 개발하는 활동)를 공부하는 데 눈을 돌렸다.

 

 

 

 

ⓒ시사IN 이명익책상에는 노무사 시험 일정표와 시험 방법 등이 붙어 있었다. ‘노동단체법’ ‘근로계약법’ 등을 필기한 공책은 이제 그녀의 영정 앞에 놓였다.

 


2012년 9월, 같은 대학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만난 중소기업중앙회 한 관계자의 소개로 회계 담당 업무보조(아르바이트)를 맡았다. 2012년 9월1일∼12월31일 4개월간 근무하는 ‘일급 4만원짜리 일용직’이었다. 야간수당이나 휴일근무는 없었다. 한 달에 100만원을 넘게 받은 적이 없었다.

계약이 만료될 즈음 SB-CEO 스쿨(Small Business-CEO:중소기업 최고경영자 과정) 보조업무인 전문위원(계약직)을 추천받았다. 매년 6개월간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기획과 홍보, 강사진 섭외와 수강생(원우) 관리 업무였다. 2013년 1월, 6개월짜리 근로계약서를 작성했다. 150만원에서 세금을 떼고 136만원을 손에 쥐었다. 근로계약서에는 야간근로, 휴일근로, 출장비, 중식대 등 기타급여가 없다고 기재돼 있다. 오전 7시30분에 시작하는 네 차례 조찬을 준비하고, 제주도와 용인에서 진행되는 두 번의 워크숍, 주말 산행과 음악 행사, 가족 행사, 기업체 방문 등을 진행하는 일도 권씨의 몫이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마자 시달림을 받았다. 중소기업중앙회 유관기관인 중소기업연구원 소속 한 연구원이 권씨를 불러 함께 식사를 했다. 그 후 그는 권씨에게 노래방을 가자고 조르면서, 강하게 거절하는 그녀를 대로변에서 안아 들어올렸다. 권씨는 “이 경험을 계기로 (성폭력 같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인식했다”라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직장 상사와 원우들은 종종 권씨에게 ‘치마 색깔이 뭐 이래?’ ‘아이 잘 낳게 생겼다’ ‘(성행위를 뜻하는 사투리)라는 말 알아? 이거 알면 갈 데까지 간 건데’ 따위의 말을 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 더해 고용 불안에 시달리던 그녀는 회사에 퇴사를 통보하고 짐을 정리했다. 하지만 같은 부서 성 아무개 차장은 “업무를 잘 처리하니 사업운영직(무기계약직) 전환이 잘될 거다. 우리가 도와줄게”라며 다독였다. 성 차장은 강 아무개 전무이사 겸 경영기획본부장에게 권씨를 격려하는 전화를 부탁했다. 강 전무는 인사에 영향력이 있었다. 강 전무는 권씨에게 전화해 “잘하고 있다고 들었다.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고 끊었다. 성 차장은 “권씨가 너무 불안해하니 순수한 격려 차원에서 전화를 부탁드렸다. 무기계약직 전환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권씨가 지인과 나눈 카카오톡 대화. 권씨는 “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당당한 노무사가 될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권씨는 강 전무와의 통화 이후 전환에 대한 기대를 더 키운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동료에게 “전환이 잘 추진되고 있대”라고 종종 말했다. 권씨는 다른 직장 동료에게 “전환이 되고 경력이 쌓이면 5급(공채), 4급(과장·차장)으로 승진 시험을 볼 거다”라고 말했다. 전환되자마자 차를 사겠다며 엄마와 함께 자동차를 구경하고 브로셔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정규직 전환의 기대를 키우는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통이 있었다. 50대 한 중소기업 대표가 권씨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왔다. 그는 ‘오빠’라고 불러주기를 원했고 해외에서 선물을 사다주려 했다. 거절하는 권씨에게 문자와 전화를 계속했다. 집 근처까지 찾아왔다. 그는 “상사와 밥을 먹으니 정규직 전환에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다”라고 은근히 협박했다. 권씨는 휴대전화를 따로 마련해야 할 정도로 스토킹을 당했다.

통화 내용과 문자는 ‘증거’가 되지 못했다

지난 6월29일 권씨는 결국 이 같은 내용의 메일을 직장 상사에게 보냈다. A4 용지 7장 분량이었다. 성희롱을 겪은 7가지 일을 열거한 뒤 ‘남성들이 다 더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치관이 혼란스러워서 전환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생각까지 미치게 되었지만, 지금은 정리가 되는 듯합니다. 솔직한 심경은 그동안 일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전환에 성공하고 싶습니다. 무사히 전환되어서 이런 나쁜 싹을 보이는 사람을 강하게 쳐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계약 해지 통보 직후인 8월27일, 권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일하면서 느꼈던 소회를 적어두었다.

 

고 부장과 권씨는 메일을 보낸 지 3시간 만에 통화했다. 이때 고 부장은 “강 전무를 너 때문에 열 번 이상 만나서 조율하고 반강제적으로 오케이 받아놨는데 거의 다 돼서… 전환의뢰서를 작성하고 있거든. 그런 와중에 되게 당황스럽더라”라고 말했다. 권씨는 구토가 나올 정도로 힘들었다고 토로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걸로 트집 잡는 걸로 비춰질까 봐 (말을 못했다)”라고 답했다(권씨는 통화를 녹음했다).

이 일이 있자마자 권씨는 7번째 근로계약서를 썼다. 우원식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4개월, 6개월, 2개월, 4개월, 2개월, 4개월, 2개월씩 총 24개월을 계약했다. 마지막으로 사인한 2014년 7월1일자 근로계약서는 애초 1개월 계약했던 것을, 7월 넷째 주에 날짜를 수정해 8월29일로 한 달 더 연장했다. 성 차장은 “8월1일부터 신입 공채가 와서 매월 열리는 인사위원회가 열리지 않았다. 8월 말 인사위원회에 권씨를 추천하기 위해 연장했다”라고 밝혔다.

8월25일, 인사위원회가 열리는 동안 권씨는 매우 초조했다. 권씨 채용 안건은 부결로 결론 났다. 곧바로 계약 해지가 통보됐다. 인사위 측은 전문위원을 채용하면 중앙회의 전문위원 70명을 전부 전환해야 하므로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했다. 강 전무는 “아르바이트 형태의 전문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선례가 없다. 전문위원은 2년 가까이 되면 그만둔다고 일반적으로 이해한다”라고 말했다. 고 부장은 “권씨가 전환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것 같다. 인사위원회에 채용추천서를 쓰는 게 부서에서 도울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라고 말했다.

권씨는 일방적인 계약 해지가 부당하다고 보고 노동청 등에 신고할 준비를 했다. 6월29일 고 부장에게 보낸 메일과 통화 내용, 계약 해지를 통보한 다음 날 상사와의 통화 내용을 모두 녹음해두었다. 성희롱을 한 원우의 문자와 통화도 모두 저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결국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경을 밝히는 단서로만 쓰였다. 그녀는 계약 해지 이후 상사에게 보내려던, 쓰다가 만 메일을 친구에게 대신 보냈다.

“제가 이 메일을 드리는 이유는 첫째로 적어도, 저한테 했던 행동을 다른 전문위원에게 더 하셨다가는 더 이상 님 경력을 이어나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계약직에 대한 님의 악질스러운 대우를 이 선에서 마무리하고 세상과 타협하려는 제 자신에 대한 경고입니다. 님은 마지막까지 제게 ‘누가 네게 그런 확신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말씀하셨죠? 그 순간 중앙회 직원들이 참 불쌍하더군요. 비굴하기 짝이 없는  밑에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일하고 있는 직원들이란 노예와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그 노예들을 싼값에….”

여전히 SB-CEO 스쿨 홈페이지에는 ‘대한민국 중소기업 최고경영자’와 함께 찍은, 꽃다운 얼굴의 그녀가 있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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