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진보가 은밀히 공유하는 오래된 가정이 있다. 보수의 지지자는 탐욕 또는 무지, 두 가지 키워드면 얼추 설명된다는 믿음이다.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부자는 탐욕, 가난한 사람은 무지. 다른 논의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진보와는 다른 보수의 도덕 감정이라는 개념을 일단 받아들이면,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길이 열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복지 문제다. 한국에서 시도된 보편복지 기획은 대체로 ‘무임승차 혐오’의 벽을 넘지 못했다(보편복지의 가장 성공한 모델로 여겨지는 무상급식 또한  보편복지에 대한 동의라기보다 ‘애들 밥’에 대한 공감이 더 강했다는 의견이 있다). 보편 대 선별 논쟁이 벌어지면 중도층은 선별복지의 손을 들어주곤 했다.

고등학생들이 카카오톡 단체 채팅 창을 통해 일베를 논하고 있다.

진보 엘리트는 이를 탐욕과 무지로 해석해왔지만, 보수는 물론이고 중도 역시 보편복지가 불러올지 모를 무임승차가 판치는 세상에 도덕적 분노를 느낀다. 이런 나름의 도덕적 정의감을 탐욕이나 무지로 몰아가는 진보의 ‘혼자 잘난 척’에 염증을 느끼기도 한다. 2012년 대선에서 야권의 복지 기획을 거의 다 가져간 박근혜 후보는, 유독 보편복지 깃발만은 야권에 남겨두고 선별복지를 내세웠다. 

복지를 의무 없는 권리로 볼 게 아니라 ‘기브 앤 테이크’가 상징적으로라도 작동하도록 해야 무임승차 혐오를 피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를테면 실업급여는 복지정책치고는 어느 나라에서나 비교적 인기가 좋다. 실업자가 적극적 구직활동이나 재취업 교육을 받아야만 실업급여를 받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대중의 무임승차 혐오를 덜 자극한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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