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2003년 6월24일 판문점에서 북한군과 유엔군 사이에 거행된 북한군 시신 인도 장면.

6자회담 이후를 겨냥한 동북아안보협의체 구상이 미국을 중심으로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7일부터 12일까지 한국·일본·중국을 방문한 네그로폰테 미국 국무부 부장관의 순방 목적이 미국 주도의 안보체제 구상을 위한 분위기 조성이었음이 알려지면서, 이 문제를 둘러싼 미국 내부 동향에 관심이 모아진다. 몇몇 관측통은 “최근 미국의 움직임에 미묘한 변화가 일고 있다”라며 그 최대 요인으로 북·미 관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친미 보수를 표방한 이명박 후보의 대선 승리가 명확해질 즈음, 미국은 노무현 시대에 무력화한 한·미·일 3각 공조 체제를 부활하고, 여기에 아태지역 친미 국가를 참여시킨, 이른바 범태평양안보협의체(PAPSU)를 결성한다는 구상을 가다듬었다(〈시사IN〉 제30호.  ‘한·미 동맹 6단계 로드맵 실체를 밝힌다’ 기사). 2004년 7월 라이스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 때부터 제기됐던, 6자회담 참여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안보협의체 구상이 북·중·러의 3각 공조로 인해, 미국의 주도권 장악에 어려움이 예상되면서, 방향이 한 번 바뀐 것이다.

범태평양안보협의체에서 4+2로

그런데 지난 5월 초 한·중·일 순방에 나선 네그로폰테 부장관은 미국이 또다시, 라이스의 원 구상으로 돌아갔다는 인상을 주었다. 워싱턴 소식에 밝은 전문가들에 의하면, 북·미 관계의 진전, 그리고 이에 따른 미국의 자신감 회복이 동북아안보협의체의 향후 방향에 또다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즉 네그로폰테가 최근 들고 나온 6자 참여국에 의한 동북아안보협의체 구상의 이면에는 기존 북방 3각 대 남방 3각의 3:3 구도가 아니라, 북한이 북방 3각에서 떨어져 나와 미국 측에 합류함으로써, 4:2 구도가 이뤄졌다는 미국의 계산이 깔렸다고 한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대한 확고한 장악 외에, 북한까지 미국 영향권에 편입시킴으로써, 중국 러시아에 대해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같은 판단 근거는 무엇인가.

미국의 50만t 대북식량 지원 내막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태까지는 미국의 식량 지원 결단이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을 막기 위해 진행된 것으로 파악됐다(〈시사IN〉 제36호, ‘통미봉남은 걱정 말라더니’ 기사). 그러나 최근 취재 결과 또 다른 내막이 드러났다.

지난 4월8일 싱가포르 북·미 협상과 거의 같은 시기,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의 수석고문인 토니 남궁 박사를 필두로, 8명의 미국 전직 고위급 관료 및 대북 전문가 그룹의 평양 방문이 추진됐다. 〈시사IN〉의 취재에 따르면, 4월10일부터 12일까지 사흘간 진행된 이들의 내밀한 방북 목적은 두 가지였다. ‘과연 북한이 미국과 정말 할 생각이 있는지, 정말 원하는 게 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Reuters=Newsis네그로폰테 미국 국무부 부장관.
북한 측에서는 외무성 고위 당국자뿐 아니라, 특이하게도 국방위원회 소속 군 고위 관계자들이 등장했다. 미국 측 전문가 그룹의 방북 미션이 식량 지원 문제와 직결돼 있다는 판단 아래 특별 출연한 것이다. 〈시사IN〉의 취재 결과, 군 관계자들은 미국 측에 두 가지 답변을 내놨다. 하나는 식량을 지원해달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가 바로 북한군과 미군 최고위급으로 구성된 ‘북·미 연례협의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북·미 양국 군부에 의한 연례협의체 제안은  미국 측 참석자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북 접근의 가장 큰 주안점은, 바로 북한 군부와의 직접 채널 확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북·미 관계 본질은 군사안보 관계라는 미국의 근본 방침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미국은 북한의 태도를 반신반의했는데, 드디어 원하던 답이 나온 것이다.

 토니 남궁 박사.
한·미·일 공조 넘어선 북·미·일 공조?

북한 군 고위 당국자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미국 측 전문가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뜻인가”라고 묻자, 북측은 “장군님의 재가 없이 이렇게 중요한 얘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김 위원장의 뜻임을 확인해줬다고 한다.

토니 남궁 박사는 워싱턴에 급전을 보내 북한 군부의 견해를 전하며, 식량 지원 결정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마침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 방문길에 오른 시점이었음에도, 워싱턴은 북한 군부 발언의 진의 여부(true or not) 파악에 분주했고, 결국 진의라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 측 전문가들은 그 뒤 RFA(자유아시아방송)와 인터뷰를 통해, 각자 처지에서 파악한 북한 군부 제안을 소개했다. 어떤 이는 북한 군부가 미군과의 정치 관계를 원했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요구했다고도 한다.  이 모임의 인솔 책임자였던 토니 남궁 박사는 북한 군부가 미국과 ‘안보조약(defense treaty)’ 체결을 원했으며, “이것이 불가침 조약을 의미하는지, 한·미 상호방위조약이나 미·일 상호방위조약 같은 종합 동맹 조약을 원하는지는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시사IN〉이 확인한 북한 군부의 정확한 발언 내용은 ‘군 최고 당국자 간 연례협의’다. 이는 곧 한·미 국방장관 간 연례협의(SCM)와 같은 체제를 원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토니 남궁 박사가 언급한 내용을 토대로 볼 때, ‘북·미 상호방위조약’, 즉 북·미 간 군사동맹 관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미국이, ‘쿠킹맨’이라는 별명이 붙은 네그로폰테 부장관의 순방을 통해 라이스 구상을 끄집어낸 배경에는 북·미 군사동맹까지 염두에 둔 북한 군부의 적극적 대미 자세가 배경에 깔려 있다. 최근 본격화하기 시작한 일본의  대북 접근까지 염두에 놓고 보면, 한·미·일 공조를 넘어 북·미·일 공조가 동북아안보체제의 핵심 파워로 급부상할 날도 머지않았다.

기자명 남문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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