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프랑스에는 회원 6000명을 가진 전국고등학생연합을 비롯해 많은 고등학생 정치 조직이 있다. 위는 교원감축안 시행에 반대하는 고등학생 시위 모습.

요즘 프랑스 고등학생은 학교에 안 가고도 바쁘다. 5월14일자 르몽드에 따르면, 파리에 있는 볼테르 고등학교의 경우 등교생이 적어 수업을 진행하지 못한 날이 올해 들어 30일이나 되었다고 한다. 학생이 학교 대신 거리에서 집회를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단은 3월 교육부 장관 자비에 다르코스가 교육개혁안을 주창하면서부터다. 그는 오래전부터 추진해온 교원감축안을 2009년부터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안에 따르면 교사 1만1200명이 줄어든다. 교원노조는 물론이고, 교사가 부족해 당장 영향을 받을 학생, 특히 고등학생이 반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3월27일 파리에서 고등학생 5000여 명이 모인 이래 지난 5월15일까지 이들의 크고 작은 집회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5월15일 발행된 리베라시옹은 “고등학생이 그들의 선생님을 구하기 위해 싸움터로 행진한다”라는 자못 비장한 제목을 달았다.

프랑스 고등학생의 시위 역사는 그 전통이 오래되었다. 이들의 집회 현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단어가 ‘68년 5월!’이라는 말이다. 정확히 40년 전인 1968년 5월 프랑스는 학생이 시작한 전국적인, 혁명 수준의 사회운동을 경험했다. 68혁명은 몇몇 정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후 프랑스의 많은 사회운동에 지표 노릇을 한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프랑스 고등학생의 사회 참여 역사 역시 1968년 5월에서 시작된다.

당시 활약했던 학생 단체로 ‘고등학생 행동위원회’(Comite d’action lyceen)라는 조직이 있다. 이들은 1967년 12월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속에서 생겨나 다음 해 68혁명을 맞게 된다. 비상시적으로 운영되는 이 단체는 2000년에는 이라크 전쟁 반대운동 및 르펜의 극우정당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하는 등 국제 사안에 관해서도 활발히 관여한다.

총리와 고등학생 대표가 4시간 토론

고등학생 정치 운동이 정점에 이른 때는 1994년이다. 당시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는 청년 최저임금제 법안을 시행하려다 고등학생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정부가 추진하려던 법안은 정식 명칭이 직업진입계약법(CIP)으로, 26세 아래의 젊은이 가운데, 대학 2년 졸업 이하의 학력을 가진 자에게 기업이 최저임금의 80%만을 지급할 수 있게끔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고등학생의 시위가 확산되자, 정부는 임금 규정을, 최저임금이 아닌 평상 임금의 80%로 바꾸는 조정안을 내놓았다.

3월28일에는 발라뒤르 총리가 직접 학생 대표 12명을 만나 4시간여 동안 토론했다. 총리 관저에서 진행된 이 회담에는 발라뒤르 총리 외에도 당시 정부 대변인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 현 대통령을 비롯해 각료 3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정부의 유화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고등학생은 총리와의 토론 이튿날인 3월30일 대대적인 시위를 반복했다. 결국 발라뒤르 총리는 법안을 철회했다. ‘고딩’이 정부를 이긴 것이다.

이 승리를 계기로 전국고등학생연합(Union nationale lyceenne·UNL)이라는 프랑스 최대 고등학생 단체가 생겨난다. 고등학생판 ‘한총련’인 셈이다. 2008년 현재 이 단체는 고등학생 6000명이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이들은 연회비 7유로를 내고 대표 선출권을 갖는다.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고등학생 협회(FIDL)’는 회원 수가 UNL과 맞먹는 규모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많은 고등학생 단체가 자기들의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활동한다. 우리나라에 비해 이들의 현실 참여가 활발한 것은 단순히 프랑스의 사회의식 수준이 높아서만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프랑스 고등학생은 우리의 대다수 고등학생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압력을 직접 느끼기 때문이다. 

1994년 CIP 법안은 결국 철회됐지만, 2006년 최초고용계약(CPE)이라는 이름으로 결국 이 법안은 부활했다. CPE는 26세 이하 젊은 층의 취업을 장려하기 위해 기업에 정규직 채용을 강제하지 않는 제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정규직을 양산해낼 위험의 소지가 많은 법이기도 했다. 결국 CIP에서 최저임금의 80%라는 방식의 임금감소 방안이 비정규직이라는 형태로 돌아온 것이었다.

대학평준화 정책으로 바칼로레아(프랑스의 후기 중등교육 종료를 증명하는 국가시험)를 통과한 전체 고등학생의 80% 정도는 대학에 진학한다. 하지만 까다로운 학사관리로 대학 학부 3년 과정을 마치는 것도 쉽지 않아 절반 이상은 중도에 탈락한다. 결국 대학 입학생 중 절반가량은 대학 중퇴 학력으로 취업시장에 진입한다. 즉, 프랑스 학생은 20세가 되면 취업시장에 진출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고등학생은 고용 상황에 영향을 미칠 정부의 정책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요즘 한국에서는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고등학생이 이끈다. 그런데 집회 신고를 했다는 이유로 수업 도중에 학생이 경찰 조사를 받기 위해 끌려가는가 하면, 교육당국은 집회에 참가하면 징계를 내린다는 식의 위협을 한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는 교육정책을 집행하는 데도 고등학생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다. 교육최고자문위원회(CSE)라는 협의체가 그것이다. 교육부 장관 주재로 초등교육에서 대학교육까지 교수·교사·학부모·학생 90여 명이 참여하는 이 회의에 고등학생 대표 3명이 들어간다. 이 3명은 앞서 소개한 전국고등학생연합 대표 가운데 선출된다.

당당하게 정부의 교육정책에 목소리를 내는 프랑스 고등학생에 비해 얼굴이 들킬까 봐 철가면을 쓰고 집회에 나가야 하는 한국 고등학생의 처지가 안타깝다.

기자명 파리·표광민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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