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지난 5월8일 네그로폰테 미국 국무부 부장관(오른쪽)과 만난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왼쪽).
미국 국무부 부장관 존 네그로폰테는 지난 5월7일부터 한국(7~8일), 일본(8~11일), 중국(11~12일)을 차례로 방문했다. 그는 이번 방문을 통해 오는 6월 말로 예상된 6자 외무장관회담에서 동북아 안보포럼을 창설하는 방안에 대해 해당 국가와 협의했다. 동북아 안보포럼에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도 포함된다. 이제 바야흐로 본격적인 동북아 질서 재편에 시동이 걸렸다.

이와 같은 질서 재편 움직임은 2005년의 ‘9·19 공동성명’과 〈젤리코 보고서〉에서 이미 예고됐던 것이다. 당시 미국 국무부 자문관이었던 젤리코는 북한 핵을 포기시키기 위해 ‘광의의 새 접근법(Broad New Approach)’을 내놓았다. 이 접근법은 방어 전략과 외교 전략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

방어 전략(Defensive Strategy)이란 북한의 위조지폐, 가짜 상표 담배, 마약 밀매 등 국제 범죄 행위를 근절해 북한의 불법 자금줄을 차단하는 것이다. BDA(방코델타아시아) 문제를 통해 북한의 돈줄을 죈 것이 대표 사례이다. 외교 전략(Diplomatic Strategy)이란 북한이 핵을 포기해도 안전하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동북아 평화안보 메커니즘(NEAPSM)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2005년 9·19 공동성명 이후 북한의 위폐 문제로 전개됐던 국면이 바로 미국의 방어 전략이 작동한 때였다. 북한은 미국이 위폐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바람에 국제 자금거래가 막히는 등 곤욕을 치렀다. 결국 북한은 2006년 10월9일 핵실험으로 북·미 직접 대화의 계기를 마련한 뒤 6자회담에서 비핵화 1단계 로드맵인 ‘2·13 합의’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하지만 BDA 문제로 한번 더 곤욕을 치른 뒤에야 북한은 미국의 방어 전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국이 북한에 쌀·비료 지원한 까닭

외교 전략의 가동은 비핵화 2단계 로드맵인 ‘10·3 합의’ 이행과 연동된다. 북한이 핵시설 불능화와 핵 프로그램 신고를 마치면, 그에 대한 상응 조처로 중유 100만t과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포럼 및 동북아 안보포럼을 발족하도록 되어 있다. 핵시설 불능화가 80% 이상 진척되고 핵 프로그램 신고 범위가 북·미 간에 타결되자, 미국은 동북아 평화안보 메커니즘 구축에 본격 착수했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정부 10년간의 대북 정책을 총체적 실패로 규정하고 ‘저자세, 퍼주기’로 일관한 남북 관계를 정상으로 돌려놓고자 한다. 맨 먼저 한·미 공조를 바탕으로 북핵 문제를 우선 해결하고, 남북 관계에서 시혜자·수혜자 관계를 분명히 하고 경협을 철저히 시장원리에 입각해 추진함으로써 ‘저자세, 퍼주기’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려 한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새 정부가 한·미 정상회담 이전에는 되도록 남북 대화를 자제하고, 정상회담 이후 한·미 공조를 바탕으로 대북특사 파견 등 대범한 대북 대화 제의로 남북 관계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전략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가 대화의 문만 열어놓은 채 기다리면, 북한 측이 5~6월 춘궁기를 견디다 못해 사실상 무릎을 꿇고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었다.

이러한 전략 추진의 바탕에는 북한과 미국이 쉽게 핵신고 문제를 타결짓지 못할 것이며 미국의 대북 식량 50만t 지원도 이루어지기 어려울 듯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특히 세계 곡물 가격이 3배 가까이 폭등했고 중국도 올해 초부터 대외 식량 수출을 통제했기 때문에 북한의 식량 사정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뉴시스이명박 정부는 대북 식량 지원 방침을 천명했다. 위는 북한에 지원한 우리 쌀.
하지만 이러한 정세의 흐름은 우리 측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 객관적인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의 요구량 15만t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쌀 5만t을 긴급 지원했고, 한국 대신 비료를 일부 제공했다. 오는 8월8일부터 시작되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대규모 식량난민이 국경을 넘어 들어와 경사스러운 잔치를 망치는 것을 중국 정부가 원치 않기 때문이다.

통미봉남이 아닌 통미경남(通美更南)

미국 정부의 움직임도 우리 측의 기대와 달리 나타났다. 우라늄 농축 문제와 시리아 핵 연계설에서 ‘철저하고 완전한’ 잣대를 들이댈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은 현실적으로 위협이 되는 플루토늄 문제에서 ‘철저하고 완전한’ 신고와 검증을 요구했지만, 우라늄 농축 문제와 시리아 핵 연계설에 대해서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이란 문제로 수렁에 빠진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북핵 문제에서만이라도 성과를 거두고 싶었을 것이다.

중국과 미국의 예기치 않은 태도는 북한 측의 고도로 계산된 외교적 판단의 결과였다. 북한은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고 나면 중국이 자신을 손볼지도 모른다고 걱정해 미국을 안전판으로 선택했다. 2006년 7월과 10월에 각각 탄도미사일 시험과 핵실험을 감행해 대립했던 것 때문에 중국이 전면 보복에 나설지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은 베이징 올림픽 이전에 핵신고 문제를 타결해 미국과의 관계를 급진전시킴으로써 중국이 자기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략게임을 벌이면서, 동시에 새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 길들이기에 나섰다. 북한은 김하중 통일부 장관의 발언을 문제 삼아 개성지구 내 경협사무소 당국자를 추방한 데 이어, 4월1일 노동신문 논평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방을 본격화하고 남북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4월8일, 싱가포르에서 미국과 핵신고 문제를 전격 타결했다. 이는 북핵 문제에 대한 한·미 공조를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이다.

우리 정부는 북한 측의 대남 비방에 대해 일일이 대꾸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지켜왔다. 하지만 연내 워싱턴과 평양에 상주대표부를 설치한다는 북·미 관계 정상화설이 나돌고 북·일도 물밑 접촉을 시작하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면서 흔들렸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이 인도적 지원을 명분으로 식량 50만t을 조기에 제공한다고 발표하자, 우리 정부는 더 이상 방관하고 있을 수 없게 됐다.

국내 언론에서는 이러한 북한 측의 전술을 가리켜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올바른 표현이 아닌 듯하다. 북한 측의 진정한 의도는 우리 정부를 고립·봉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접근하면서 이명박 정부의 대북 태도를 변화시키는 ‘통미경남(通美更南)’에 있다. 실제로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이 결정되고 북·미 관계 정상화 움직임이 본격화하자 우리 정부도 대북 식량지원 방침을 밝히는 등 대북 정책에 변화 조짐을 보인다.

ⓒ연합뉴스남북 간 힘겨루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위는 5월19일 열린 통일 관련 당·정·청 회의 모습.

하지만 북한 측의 움직임에 의해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이 변화하더라도 자존심 상해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남북 간의 힘겨루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을 대북 식량 문제의 쟁점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식량지원 문제가 남북 관계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듯한 국면이 조성되는 것은 자칫 남남 갈등을 유발할 수 있어, 대북 긴급지원을 통해 식량 문제 쟁점을 빨리 해소할 필요가 있다. 안팎으로 한반도를 둘러싸고 정세가 급변하는데 마냥 대북 식량 문제에만 매달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식량 지원 문제에서 빨리 벗어나라

앞서 언급한 네그로폰테 미국 국무부 부장관의 동북아 순방은 한반도와 동북아 질서 재편을 둘러싼 지각변동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한다. 벌써부터 미국 측에서 정책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미국의 한반도 전략이 구체화하면서 차기 주한 미국 대사로 내정됐던 스테판 스티븐스 전 미국 국무부 부차관보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것으로 알려졌다. 그 대신 국제협력처(USAID) 장관을 역임한 거물급 인사가 한반도 정책을 총괄할 주한 미국 대사로 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외교가에 나돈다.

이러한 소문의 사실 여부를 떠나 북·미 관계의 정상화 일정은 예정된 순서대로 가리라 전망된다. 북·미 관계의 진전으로 평양과 워싱턴에 상주대표부가 설치되는 마당에, 더욱이 북·일 협상이 진전되어 평양과 도쿄에 연락사무소가 세워지는데 우리 정부가 북한과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상황에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조급해할수록 북한의 의도에 말려든다.

우리에게는 남북 관계를 되돌려놓을 비장의 카드가 있다. 우리는 북한이 필요로 하는 ‘돈’과 ‘시간’이 있다.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되고 상주대표부를 교환 설치하더라도 미국의 대규모 자금이 단기간 내 북한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베트남이 미국과 1995년에 수교했지만, 6년이 지난 2001년 미국·베트남 무역협정을 맺고서야 수교의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 보상금이 북한에 들어가려면 납치 문제가 선결돼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결국 북한이 북핵 문제의 진전에 성의를 보이고 미국·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더라도 당장 경제 재건에 필요한 돈이 북한에 들어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바로 이 시공간이 우리가 대북 주도권을 잡아나갈 수 있는 기회의 장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북한이 무릎 꿇고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우리 정부가 교조적인 원칙에 사로잡히지 말고 과감하고 실용적인 접근을 시도한다면 오히려 남북 관계뿐만 아니라 동북아 질서 재편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어설프게 덫을 쳐놓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호랑이굴로 직접 뛰어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기자명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신안보연구실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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