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반도 사태는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불행했던 우리 근대사를 되돌아보면, 그 원점에 바로 크림반도가 있었다. 1853~1856년 이어진 크림 전쟁에서의 러시아 패배. 그것이 바로 출발점이다. 전쟁의 패배로 흑해 진출이 좌절된 러시아는 또 다른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우랄산맥 동쪽으로 넘어온다.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 항이 그때 러시아 땅이 되고 한반도와의 인연도 본격화한다. 그 뒤 일본과 각축을 벌이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한반도는 일제 강점의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역사는 기억의 전쟁이라고 했다.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은 난관을 극복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민족은 역사의 저주를 면치 못한다. 적어도 19세기 불행했던 역사를 기억하는 우리에게 ‘크림 이펙트’, 즉 크림반도에서 펼쳐진 세계사적 사건의 파장은 매우 현실적이고도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이제 21세기의 벽두에 또다시 발생한 크림의 대격변은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 것인가.

최근 벌어진 사건만 놓고 보면 그렇게 복잡해 보이지는 않는다.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의 친러파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러시아의 반대로 유럽연합(EU) 가입을 위한 협력협정 체결에 소극적이자 친유럽파 세력이 들고일어나 올해 1월 그를 축출했다. 그러자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계 주민이 절대다수인 크림자치공화국을 무력으로 점령했고 3월16일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에 귀속시켰다. 크림자치공화국은 원래 우크라이나에 속하지 않았으나, 1954년 흐루쇼프 서기장이 자기 고향인 우크라이나에 선물로 줬다고 한다. 1991년 우크라이나가 소련 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여러 차례 러시아 복귀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병합 이후 푸틴 대통령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토적 야심은 없다고 선언했고, 미국과 나토 역시 러시아에 대해 군사 대응은 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 소강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 붕괴와 냉전 해체 후 약 20년 동안 미국과 유럽에 밀려온 러시아가 이들이 뒤에 버티고 있는 줄 알면서도 무력으로 크림을 장악해버린 사태의 파장이 여기서 끝나리라고 보는 이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냉전 해체 이후 20여 년 만에 세계 질서의 대변동이 시작됐다’고 보는 시각이 설득력 있다. 이른바 ‘크림 이펙트’, 즉 크림반도 사태가 불러올 향후의 연쇄 파장에 유라시아 대륙 주변의 많은 국가가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EPA4월17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출연해 ‘우크라이나 국민과의 대화’를 하고 있다. 푸틴은 나토와 미국에 맞서 러시아판 유럽연합이라 할 수 있는 유라시아연합 구상을 갖고 있다.
크림반도 사태를 거슬러 올라가면 푸틴 대통령과 미국·서방의 글로벌 자본 간의 악연이 그 출발점임을 알 수 있다. 옛소련 해체 후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따위 천연자원 지배권을 둘러싼 생존을 건 싸움이 그 발단이었다. 소련 붕괴 직후인 옐친 정권 시절 경제개혁의 주도권을 쥔 세력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시장화 개혁을 밀어붙이는 한편 러시아 경제를 글로벌 경제에 편입시키려 했다. 가격 통제가 일시에 해제되면서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고, 국영기업이 소유하던 석유나 가스 등을 소수 올리가르히(신흥 재벌)에 불하해 부의 편중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들 뒤에는 서방 세력이 존재했다. 이 같은 난맥상으로 러시아는 초격차 사회로 전락했고 8년간 GDP의 절반이 날아갔으며 1998년에는 심지어 국가부도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푸틴은 왜 석유기업 유코스 대표를 구속했나

2000년에 대통령이 된 푸틴은 올리가르히와의 전쟁을 벌여 석유왕인 베레좁스키나 미디어 왕인 블라디미르 쿠신스키 등을 제거하고 주요 자원을 국유화했다. 마지막 남은 상대가 바로 석유기업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롭스키였는데,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유대 자본의 막후 실력자인 영국의 제이콥 로스차일드와 손을 잡고 ‘오픈 러시아’라는 재단을 설립했다. 헨리 키신저를 이사로 초빙하기도 한 이 재단의 설립 목적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러시아를 서방에 개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유코스 주식의 40%를 미국계 석유회사인 엑슨모빌에 매각하기 위해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자칫하면 엑슨모빌의 배후에 있는 미국 정부가 러시아 석유정책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푸틴은 그를 탈세 등의 혐의로 긴급 체포해 8년 금고형을 살게 했다. 이게 2003년 10월의 일이다. 그해 4월은 미국이 이라크 석유 장악 등을 목적으로 이라크에 침공했던 해로, 푸틴으로서는 미국이 이라크뿐 아니라 전 세계 석유를 장악하려 시도하는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호도롭스키의 체포와 구금은 미국 및 글로벌 유대 자본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이들과의 악연에 빌미가 되었다. 곧이어 반격이 시작됐다. 한때 유행병처럼 돌았던 동유럽 지역의 이른바 색깔혁명이 그것이다. 호도롭스키 체포 다음 달인 2003년 11월 조지아(그루지야)에서 장미혁명이 일어났고, 2004년 12월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오렌지혁명, 2005년 4월에는 키르기스스탄에서 튤립혁명이 일어났다. 모두 민주화를 앞세운 비정부기구(NGO)들이 전면에 나섰지만 그 배후에 미국이 있었고 내용적으로는 반푸틴 운동이었다.

흑해 서안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한 것도 바로 그즈음인 2004년의 일이었다. 미국은 양국에 군사기지를 강화해 흑해를 군사적으로 포위하다시피 했다. 특히 러시아 흑해함대의 주둔지인 세바스토폴 항구를 코앞에 두고 있는 루마니아는 최전선 국가이다. 흑해에 주둔한 미국 해군의 최대 거점 기지가 된 항만도시 코스탄차, 그리고 콘스탄차에서 가까운 미하일 코가르니세아누 공항의 군사화, X밴드 레이더 기지가 들어서 미사일 방위(MD) 기지로 건설되고 있는 데베세르 공군기지 등이 루마니아에 있다. 불가리아에서는 장래 일본의 가데나나 독일의 람슈테인에 필적하는, 미국 공군의 해외 6대 기지 중 하나로 전환될 베즈메르 공군기지를 확장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냉전은 끝났지만 러시아의 남쪽 출구인 흑해에서는 미군의 포위망이 조여오고 있었던 것이다.

ⓒEPA2월6일 러시아 소치에서 만난 시진핑 중국 주석(왼쪽)과 푸틴 대통령.

ⓒAP Photo4월24일 만난 오바마 대통령(왼쪽)과 아베 총리. 크림 사태는 아베 총리에게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색깔혁명으로 압박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군사 포위망을 좁혀오는 미국과 나토에 맞선 푸틴의 구상이 바로 ‘러시아판 유럽연합’이라고도 불리는 ‘유라시아연합(EAU)’이다. 이 구상이 처음 드러난 것은 2011년 10월4일자 〈이즈베스차〉에 실린 푸틴의 인터뷰 기사에서였다.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의 관세동맹을 확대해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을 회원으로 삼아 2015년 1월에 정식 발족하겠다는 것이다.

푸틴은 유라시아연합이 옛 소련제국의 부활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경제 가치체계’를 토대로 한 강력한 통합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과 나토 측은 이를 옛소련 재건 움직임으로 보고 경계해왔다. 따라서 스케줄로 놓고 보면 지난해 11월부터 친유럽파가 중심이 된 우크라이나 사태의 성격이 더 분명해진다. 우크라이나는 푸틴이 추진해온 유라시아연합 멤버 중 규모나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가장 중요한 국가였다. 따라서 서방으로서는 어떻게 하든 내년 1월 유라시아연합 출범 전에 우크라이나의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를 통해 합류하지 못하도록 막을 필요가 있었고, 푸틴은 푸틴대로 핵심 교두보를 장악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1월13일 러시아 국영방송 ‘러시아의 소리’에 등장한 미국 언론인 리크 로조브는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맹시킨 이후 러시아의 흑해함대를 철수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러시아로서는 1856년 크림전쟁 패배 후 흑해 통항이 봉쇄되던 시절과 비슷한 처지가 된다. ‘러시아가 양보할 수 없는 선까지 서방 측이 넘어왔다’는 푸틴의 발언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 얘기처럼, 푸틴이 1930년대 히틀러와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옛 소련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보다는 과거 스탈린 시절 소련이 동유럽을 서방과의 완충지대로 활용했던 것처럼 푸틴의 의도 역시 이 점에 가깝다는 주장이 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의도를 가졌든 간에 국제법의 제약을 간단히 무시했음에도 그 누구로부터도 제재를 받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과 나토는 그동안 러시아를 우습게 보고 나토 및 유럽연합의 동방 확대, 그리고 흑해 연안에 대한 군사 포위망을 강화해왔지만, 정작 푸틴의 기습적인 무력시위에는 속수무책이다. 3월2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있었던 G7 회의에서는 푸틴을 G8에서 영구 제명하자는 캐머런 영국 총리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만 러시아 소치에서 열기로 한 G8 회의에 불참하기로 했을 뿐이다. 그리고 푸틴 측근들에 대한 도항 금지 및 경제제재를 하는 선에 그쳤다. 냉전 이후 실질적인 1극의 위치를 차지해온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시리아 사태에서 국제분쟁 해결의 당사자 지위를 포기했듯이 이번에도 독일 메르켈 총리에게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을 떠맡기다시피 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우크라이나 동쪽의 친러시아 지역들 역시 분리 독립 움직임을 본격화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의 충돌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오바마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이 굴러갈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64~65쪽 기사 참조).

독일의 시사 주간지 〈슈피겔〉이 그리는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다. 4월28일자 특집에서 〈슈피겔〉은 앞으로 나토와 러시아 간의 무력충돌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망했다. 물론 현재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 푸틴은 동우크라이나에서 시작해 서우크라이나로 진입해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토 가맹국인 폴란드와 대치하게 된다. 이는 나토와 러시아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된다는 의미이고 이 경우 독일이 전면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흑해에 군사적 이익선이 있어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나 유럽전쟁에 개입할 생각은 없다. 프랑스나 영국도 마찬가지다. 결국 독일과 러시아 간에 또 한번 전쟁이 재연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현재 미·러·영·프·독 5개국이 매일 협의를 하지만 외교력은 거의 소진되고 있다. 외교로 풀 수 있는 길이 없다시피 하다. 현재의 유럽은 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4년 8월, 사라예보의 총성 전야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유라시아연합 뜨면 첫 번째 초대 대상은 북한

한반도와 일차적으로 직결되는 것은 바로 북한 정세와의 관련성이다. 지난 헤이그 핵안보정상회담 때까지만 해도 미·중 간, 북·중 간에 6자회담을 위한 물밑 교섭이 활발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직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위원회(NSC) 회의에서 이란 핵문제 해결 전까지는 기존 대북 정책의 기조를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고 한다(66~67쪽 관련 기사 참조). 6자회담을 계기로 김정은 노동당 제1 비서의 방중 내지는 북·중 간, 남·북 간 교류로 숨통을 열어가려 했을 북한으로서는 화가 날 만한 상황이다. 북한이 할 수 있는 것은 추가 핵실험을 통해 핵무력을 증강시키는 등 긴장을 높이는 일밖에 없다.

ⓒAP Photo3월18일 타이완 대학생들이 입법원을 점거했다. 마잉주 총통의 통일 교섭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크림반도에서 미국 및 나토와 대치 중인 러시아로서는 유라시아 동쪽의 북한을 어떻게 하든 우군화할 필요가 있다. 서방 측과의 대치 전선이 하나 더 만들어져서 나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년 1월을 기해 푸틴의 계획대로 유라시아연합이 출범하게 되면 북한은 옛소련권 이외 국가 중 첫 번째 초대 대상이 될 것이다. 과거 냉전 시대 북한은 중국보다는 소련과 가까웠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중국과 관계를 맺느라 애먹었는데 옛소련권이 하나로 뭉치면 북한도 힘을 받는다. 그렇게 되면 북한이 앞으로 3년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암암리에 깔고 있는 남쪽의 ‘통일대박론’ 등 통일에 대한 기대감 역시 물거품이 될 공산이 크다.

‘크림 이펙트’는 러시아를 통해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오바마의 미국이 더 이상 국제경찰 노릇을 포기한 상황에서 푸틴의 성공은 다른 지역의 패권국들을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 유라시아 동쪽에서는 시진핑 체제의 중국과, 중국을 핑계로 군사적 자립을 꿈꾸는 일본의 동향이 최대 관심사다. 크림반도 사태 직후인 지난 4월호와 5월호 일본의 시사 잡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센카쿠가 크림이 되는 날’이라는 자극적 제목으로 중국의 센카쿠 침공 가능성을 분석했다. 센카쿠뿐 아니라 중국의 궁극적 목표는 타이완과의 통일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타이완에서 대륙에 가장 가까운 진먼다오(金門島)와 마쭈다오(馬祖島) 주민은 중국과 일체감이 깊은데, 중국군이 자경단으로 변장해 침공하면 간단히 점령할 수 있다는 소문이 타이완에 파다하다는 것이다. 지난 3월18일 타이완 대학생 1000여 명이 국회 격인 입법원에 난입 점거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진 것도, 표면적으로는 타이완 정부가 중국과 벌이고 있는 서비스업 개방 반대를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마잉주 총통의 통일 교섭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타이완에서도 위기감이 높아간다는 얘기다.

시진핑 주석이 최근 전통적인 집단지도 체제에서 벗어나 푸틴형의 강권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고 있고, 푸틴과의 협조를 외교의 기축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체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푸틴은 유라시아 서쪽에서 나토와 대립하고 시진핑은 유라시아 동쪽에서 미·일 동맹과 대립한다는 면에서 동병상련이다. 두 사람은 지난 2월 소치 동계올림픽 직전에 만나 내년의 ‘반파쇼 전쟁·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공동축하 기념행사’를 같이하기로 재확인했다. 그 일환으로 지난 3월 중국 전인대에서는 9월3일을 항일전쟁승리기념일로, 12월13일은 난징대학살 희생자국가추도일로 지정했다. 1년에 두 차례나 반일본 기념일을 지정한 것이다. 올해는 청일전쟁 발발 120주년이 되는 해로 지난 1월 정치국 회의에서는 올해를 대일 투쟁의 가장 중요한 1년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 3월18일 베이징시 제1중급 인민법원은 일제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소장을 접수함으로써, 대일 전쟁 배상 청구를 포기하기로 한 1972년 중·일 공동선언의 합의를 무너뜨렸다. 일본의 배상을 포기하는 대신 일본이 중국 경제 재건에 기여하는, 1972년 이후 40여 년간 유지돼온 양국 관계의 기본 토대가 붕괴했다는 평가를 낳고 있다. 따라서 올해도 중·일 양국은 더욱 치열하게 역사 및 영토 분쟁을 치르게 될 것이며, 그 와중에 센카쿠가 과연 크림과 닮은꼴 운명이 될지에 관심이 모인다.

흥미로운 것은 크림 사태가 일본의 아베 총리나 극우파들에게는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 아베 총리는 나라 안팎에서 궁지에 몰렸다. 미국의 만류에도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자 미국 측이 이례적으로 실망했다는, 외교적으로는 격렬한 반응을 쏟아낸 바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아베 측근들이 ‘우리도 미국에 실망했다’고 받아치면서 일본 정국에 파문이 일었다. 아베를 중심으로 한 반미 보수의 단면이 드러난 것으로, 자민당 55년 체제 동안 친미 보수를 기치로 내걸었던 당내 주류파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사태였다. 이에 따라 후쿠다 전 총리를 정점으로 자민당 내 반아베 세력과 공명당, 창가학회까지 연결된 연합세력이 구축되던 참이었다. 이 와중에 크림 사태가 터졌고 오바마 대통령의 방일이 겹쳤다. 오바마로서는 관심 사항인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협상에서의 양보 대가이기도 했지만, 집단적 자위권과 센카쿠 열도 문제에 대해 일본의 손을 들어주는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환영하며 일본의 사정권에 들어 있는 센카쿠 열도는 미·일 안보조약의 적용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립서비스에 불과한 측면이 크다. 실제 적용 과정은 헌법 절차에 따르기로 되어 있어서 시리아 사태처럼 의회 동의 과정에서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베로서는 일단 야스쿠니 참배 이후의 궁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계기는 되었다.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처럼 크림 사태는 유라시아 동쪽 끝에까지 파장을 전하기 시작했다. 지난 20세기에는 러일전쟁과 한반도의 식민화로 이어졌던 크림 분쟁이 21세기 오늘날에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동북아에 영향을 미치게 될까.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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