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푸틴(오른쪽)이 2020년까지 권력을 유지한다는 이른바 ‘2020 푸틴 플랜’을 만드는 데 메드베데프 대통령(왼쪽)이 깊이 개입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새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러시아는 정치 실험에 돌입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실세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전 대통령이 권력을 분점하는 ‘양두정치 체제’가 출범한 것이다. 힘의 중심이 크렘린(대통령궁)에서 행정부로 쏠리는 와중에 세계는 메드베데프의 향후 행보를 예의 주시한다.

지난 5월7일 메드베데프는 크렘린 대궁전에서 제5대 러시아 대통령에 취임했고, 권력의 상징인 핵가방과 세계를 나는 양탄자라 불리는 전용 비행기를 이양받았다. 취임 직후 그는 푸틴 전 대통령을 총리로 지명했고, 다음 날 두마(하원)는 압도적인 표차로 총리 인준안을 통과시켰다. 공산당 이외의 모든 정파가 찬성표를 던졌다. 전임 대통령의 총리 취임은 전례가 없는 정치 문화다.

메드베데프는 푸틴에게 빚이 많다. 푸틴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그의 성공과 배려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이런 이유로 외교가에서는 그가 푸틴의 그늘에 가려 대통령이 가진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하다. 나아가 푸틴과 메드베데프 사이에 모종의 밀담이 오갔다는 풍문도 나돈다.

성공한 대통령의 후계자라는 사실도 메드베데프에게는 무거운 짐이다. 푸틴 재임 8년간 러시아는 6.5% 이상의 경제성장과 세계 3위의 외환보유고, 세계 10위 경제대국 진입이라는 발전을 이룩했다. 성공의 일등공신은 고유가다. 하지만 푸틴의 탁월한 지도력 또한 과소평가할 수 없다. 재임 기간에 70%대 지지율을 넘나들던 그는 퇴임 직전 여론조사에서 84.7%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대통령 직을 마감했다.

‘푸틴 사람’ 중용하고 대통령 견제 장치 설치

이를 의식한 메드베데프는 푸틴의 정책을 계승·추진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가 대선에서 얻은 71% 득표율은 푸틴 정책을 계승한다는 선거공약 덕분이라는 평가다. 푸틴은 퇴임 연설에서 “나의 국가 발전 노선을 후임자가 계속 추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라고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는 러시아 재건 로드맵인 ‘2020 푸틴 플랜’이 러시아의 미래이며, 러시아가 승리하고 선진국에 진입하는 바른 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푸틴 플랜은 메드베데프가 깊숙이 개입한 공동 작품이다. 국가의 미래 비전을 제시해 2020년까지 푸틴의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이 플랜의 골자다.

ⓒReuters=Newsis푸틴 총리는 크렘린에서 함께 일했던 옛 측근을 행정부로 데려갔다. 왼쪽부터 주브코프 제1부총리, 세르게이 소뱌닌 부총리, 이고르 세친 부총리, 드미트리 페스코프 홍보국장.
5월12일 발표한 조각 명단을 보면, 푸틴의 영향력이 건재함을 실감할 수 있다. 푸틴 사람이 거의 재기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드베데프 견제를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었다. 일명 ‘푸틴 포석’이라 불리는 새 정치제도는 세 가지 주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 총리 권한이 대폭 강화되었다. 푸틴은 임기 말 총리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대통령령을 발표했다. 우선 총리 의전의 격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총리실의 격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총리실도 새롭게 수리·단장했다. 다음은 총리의 지역통제권 강화다. 이제 지방 주지사는 총리에게 업무를 보고하고 그의 지휘를 받는다. 크렘린(대통령궁) 행정실의 기능이 위임된 것이다. 주지사 임명권은 여전히 대통령에게 있다. 하지만 재임명의 주요 토대인 주지사 업무 평가는 총리가 한다. 결국 총리가 지방을 통제·지휘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전국 5개 지역에 파견된 대통령 전권대사에 대한 통제권도 총리에게 넘어갈 것으로 관측한다.

둘째, 힘의 중심이 크렘린에서 행정부로 쏠렸다. 푸틴은 크렘린에서 자신을 보좌했던 측근을 그대로 행정부로 데려갔다. 총리 취임 전 드미트리 페스코프와 드미트리 칼리물린을 홍보국장과 문서국장으로 각각 발령냈던 푸틴은 이고르 슈바로프 전 대통령 경제보좌관을 제1부총리로, 세르게이 소뱌닌 전 대통령 행정실장과 이고르 세친 전 대통령 행정실 부실장을 부총리로 중용했다. 대통령 보좌·비서관에도 푸틴 사람이 중용되었다.

이번 조각에서는 부총리가 두 명 더 늘었다. 이전에 다섯 명(제1부총리 2명 포함)이던 부총리가 일곱 명이 된 것이다. 제1부총리로 강등된 빅토르 주브코프 전 총리는 가즈프롬 이사장을 겸직할 예정이다. 부총리 자리를 늘려 행정부 기능을 강화한 것은 푸틴 측근을 위한 배려이면서 총리 권한을 강화하고 푸틴 플랜을 밀어붙이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마지막으로 국회가 막강해진다. 통합러시아당은 지난 4월20일 전당대회에서 푸틴을 당 의장으로 추대했다.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전직 대통령이자 현 총리인 푸틴이 의장으로 있는 통합러시아당은 강력한 여당으로 국사를 좌지우지하리라 보인다. 지난해 말 총선에서 통합러시아당은 푸틴 대통령의 지원을 받으며 두마 450석 가운데 315석(70%)을 차지하면서 국회를 접수했다. 더욱이 공산당 57석을 제외한 나머지 의석도 통합러시아당 계파다. 나아가 통합러시아당은 국회가 압도적인 표결로 대통령 권한을 제한할 수 있는 법안도 마련해놓았다. 통합러시아당 단독으로 개헌(두마 의석의 3분의 2)도 가능하다. 결국 대통령에서 물러난 푸틴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한 셈이다.

외교는 대통령이, 경제는 총리가 맡을 듯

포스트 푸틴 시나리오는 원래 통합러시아당 대표이자 두마 의장인 보리스 그리즐료프와 상원의장이자 러시아정의당을 이끄는 세르게이 미르노프 작품으로 알려졌다. 현 양두 체제는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가 교묘히 융합된 형식이다.

그렇다면 새 대통령 메드베데프의 위치가 약해진 것일까? 결론은 시기상조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메드베데프가 옐친이나 푸틴이 휘둘렀던 전권을 행사할지는 불분명하지만,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이미 메드베데프는 내무부·외무부·비상대책부·연방정보부(FSB)·마약통제부 등 주요 부서를 지휘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연방정보부와 내무부를 통제하지 못한 채 최고 통수권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러시아 정가의 상식이다.

푸틴과 메드베데프 간 ‘대타협’에 따라 대외적 외교 문제는 메드베데프가 맡고, 푸틴은 경제 문제에 집중할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명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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