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베이징을 방문한 박의춘 북한 외무상(왼쪽)이 양제쓰 중국 외교부장과 포옹하고 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 때문에 한국민에게 미국이 지금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지만, 북한 문제에 관한 한 ‘생큐, 아메리카’를 해야 할지 모른다. 한국 정부가 ‘아무것도 모른 채’ 뒷짐 지고 있는 사이 북한이 통째로 중국으로 넘어갈 뻔한 것을 미국이 가까스로 붙잡아두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중국에 넘어간다는 것은 곧 김정일 위원장 방중을 가리키는 얘기다. 지난 2006년 9월의 방중 취소 이후 북한·중국 간에는 김 위원장 방중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계속돼왔다. 이런 와중에 김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하면 그 순간, 북한이 중국 영향권에 편입돼 ‘동북4성화’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게, 북·중 관계 내막을 아는 전문가의 지배적 견해였다.

바로 김 위원장의 방중이 막 성사되려는 순간, 미국이 북한에 대한 50만t의 식량 지원 카드를 급히 꺼내들어 제동을 건 것이다. 바로 지난 4월 말부터 최근까지 벌어진 일이다. 대북 소식통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김 위원장 방중을 둘러싸고 치열한 외교 전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여야 할 한국 정부는 어디 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라며 신랄하게 꼬집었다.

박의춘 외무상 방중으로 물밑 전쟁 시작

외교 전쟁의 첫 스타트는 박의춘 북한 외무상의 4월26일 방중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북한 핵 신고 및 6자회담 문제 협의가 목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과 베트남을 상대로 한 대규모 식량 지원 요청과 김정일 위원장의 방문 협의를 위한 것이다.

얘기는 지난해 10월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10월16~18일 베트남의 농득마인 서기장이 50년 만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이 앞으로 베트남을 방문할 경우 베트남 측이 식량 30만t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이 양국 간에 이뤄졌다. 그러자 열흘 후인 10월29일, 류윈산 중국 공산당 선전부장이 달려와 후진타오 주석의 ‘커우신(口信·구두 메시지)’을 전했다. 김 위원장이 중국을 하루빨리 방문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 경우 최소 10만t(최근 밝혀진 바로는 15만t)의 식량 지원이 약속되었다(〈시사IN〉 제10호).

김 위원장은 방중을 통한 식량 지원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가급적이면 남한·미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식량을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주변에는 북한이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간 전문가로 득실댔다. 그들은 어차피 5월만 되면 북한이 못 버티고 손을 내밀 것이라며, 이 대통령을 몰아갔다. 최근까지도 북한이 먼저 달라고 요구해야 식량을 주겠다며, 무릎 꿇기를 요구했다. 미국은 미국대로 50만t 지원설을 흘리면서도, 세계식량기구(WFP) 쪽 사정 때문에 빨라야 올해 12월에나 지원이 가능하다는 방침이었다. 5, 6월에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할 처지인 북한으로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Reuters=Newsis영변 원자로 가동 관련 자료를 들고 판문점을 넘어오는 성 김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가운데).
박의춘 외무상의 방중에는 여러 팀이 따라붙었다. 그 중의 한 팀이 베이징에 도착한 다음 날, 베트남으로 날아가 김 위원장의 방문을 위한 정지 작업에 착수했다. 중국과의 교섭은 4월29일 박 외무상과 중국 차기 지도자인 시진핑 국가 부주석 사이에 이뤄졌다. 박 외무상은 15만t을 주기로 해놓고 3월과 4월에 1만t씩밖에 안 줬다며,  나머지를 빨리 달라고 요청했다. 시진핑 부주석은 “중국에 제5세대 지도자가 등장했으니 위원장께서 한번 다녀가셔야 하지 않느냐”라며 김 위원장 방중을 식량 지원과 연계했다. 박 대사는 본인도 뜻을 전하겠으니 중국 측도 공식적으로 초청 메시지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5월5일 류샤오밍 북한 주재 중국 대사의 후진타오 주석 구두 친서 전달이었다. 내용은 당연히 김정일 위원장 방중에 대한 공식 초청이었다.

워싱턴이 긴장했다. 그동안 방중설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틀림없었다. 김 위원장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베트남과 중국으로 떠나버리면 미국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다. 외교적 주도권 상실뿐 아니라 싱가포르에서 북한과 합의한 화려한 외교 쇼도 불투명해진다.

결국 미국이 대신 식량을 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4월22일부터 2박3일간 평양을 다녀온 성 김 국무부 한국과장이 2주 만인 5월8일 또다시 방북길에 오른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미국 측은 성 김 과장의 재방북에 앞서 5월5일, 국무부와 NSC 등 각 부처 대표단을  평양에 급파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질질 끌어온 50만t 식량 지원 문제를 5월8일까지 단 나흘간 협상으로 타결지었다. 5월8일 조선중앙통신이 미국과 식량지원 협상이 잘 진행됐다고 만족을 표시할 정도였다. 바로 이날 성 김 과장이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이틀 뒤인 5월10일 북한으로부터 영변 원자로 가동 관련 서류 일체를 선물로 받아 개선장군처럼 판문점을 넘어왔다. 미국은 냉각탑 폭파 쇼 등 세계적 이벤트뿐 아니라 김 위원장의 방중을 차단함으로써 일단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다.

현재 외교가에는 중국 CCTV가 갑자기 수호이-17 전투기의 단둥 배치 사실을 보도하고, 싱가포르 외무장관이 느닷없이 평양과 베이징 사이를 왔다갔다 한 것을 두고, 북한에 대한 중국의 항의 표시라고 해석한다. 

문제는 미국 혼자 50만t 식량을 다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벌써 외교가에는 그 중 20만t은 한국에 떠맡길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하다. 물론 우리 정부는 미국이나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은 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북한이 우리에게 요청할 리도 만무하고, 미국도 한국 정부 사정을 봐줄 처지가 아니다. 조만간 대북 지원용 식량을 실은 첫 배가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과 더불어 한국에 대한 압력도 높아질 듯하다. 쇠고기 개방을 둘러싼 외교 마찰에 이어, 대북 식량 지원에서도 미국에 할 말이 없게 됐다.

기자명 남문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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