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근 일병 사망사건과 김훈 중위 사망사건은 군 의문사를 상징하는 양대 축으로 꼽힌다. 사건이 발생한 지 올해로 30년(허 일병)과 16년(김 중위)이 되었지만 여전히 해묵은 숙제로 남아 있다. 두 사건은 초동수사 과정의 축소 의혹과 자살몰이, 다른 국가기관의 재조사를 통한 타살 규명, 이에 대한 국방부의 반격 등이 얽히고설킨, 군 의문사의 문제점을 대부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시사IN〉은 허원근 일병 30주기(4월2일)를 맞아 허 일병의 부친 허영춘씨(75·어업·사진 왼쪽)와 김훈 중위 부친 김척씨(69·예비역 육군중장·사진 오른쪽)의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아들을 군에서 잃고 긴 세월을 어떻게 보냈나?

허영춘(허):1984년 4월2일 큰아들 원근이를 군에서 잃었다. 부대에서는 원근이가 첫 휴가 나오기 전날 M16 소총으로 자기 오른쪽·왼쪽 가슴에 각 한 발, 머리에 한 발 도합 3발을 쏴서 자살했다고 통보했다. 그 뒤 30년 동안 생업(김 양식업)을 제치고 서울과 진도를 오가며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애써왔다. 1988년부터는 유가족협의회에서 활동하며 군 의문사 진상 조사를 이끌어내기 위해 143일간 노숙 농성을 하기도 했다.

ⓒ시사IN 윤무영
김척(김):1998년 2월24일, 한때 내가 군단장으로 근무했던 부대 인근의 판문점 241GP 소대장실 지하 벙커에서 아들이 권총을 맞고 사망했다. 그날 이후 내 삶은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일과 명예를 회복하는 활동으로 점철됐다. 지난해 봄 국방부가 언론을 통해 훈이의 순직 처리와 국립묘지 안장 방침을 발표했다. 그 뒤로 사방에서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그러나 훈이의 유해는 아직도 군부대 창고에 있다. 국방부가 거짓말로 언론에 흘린 뒤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사기였다.

두 사건은 ‘처음에 군이 자살이라고 발표했다가 다른 국가기관의 재조사에서 자살이 아니라고 결론이 났지만 국방부가 수용하지 않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대방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나?

:법의학자들 사이에서는 장준하 사건과 김훈 중위 사건이 자살로 남아야 밥그릇을 지킬 수 있다는 절박함이 있다고 한다. 나는 법의학자 12명이 쓴 책에서 ‘두정부 혈종(정수리 부위 피멍)은 자살이 아니라는 근거’라는 내용을 봤기에 김훈 중위는 처음부터 자살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국방부가 자살로 몰고 가기에 분노했다. 1999년 1월 국방부가 주도한 김훈 중위 법의학 토론장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교과서에도 나온 타살 증거를 언급하면서도 결국 다 자살 편에 손을 들더라. 다행히 법원과 군 의문사위, 국민권익위 등에서 재조사해 김훈 중위는 자살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국방부가 아직도 묵살하고 있어 안타깝다.

:군에 오래 몸담은 사람으로서 허 일병 사건을 보며 고통과 분노를 느꼈다. 이 사건을 끝까지 자살로 밀어붙이는 국방부를 보면서 ‘조작의 신’이라고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었다. 의문사위 등 다른 국가기관과 국방부 안에서도 양심 있는 사람들이 이미 타살이라고 밝혔으면 국방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끝까지 깔아뭉갠 채 자살몰이를 했다. ‘3성 장군 출신인 당신도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일반 국민이 어찌할 수 있겠느냐’는 한탄을 들을 때면 군 생활을 오래 한 사람으로서 너무 참담하고 힘들다.

자살이 아니라는 근거를 간단히 짚고 가자.

:원근이가 사망한 사건 현장에는 피 한 방울 없었다. 부대원 4명이 2발의 총성을 들었다고 증언했고 현장 탄피도 2개뿐이었는데 원근이 몸에 3발의 총알 자국이 있으니 멋대로 3발을 쐈다고 발표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M16 소총은 다른 사람 총이었는데 원근이 총기번호로 바꿔치기했다.

:헌병대 수사관이 훈이 사망 현장에 들어가려 하자 부대에서 막고 물청소를 실시했다. 훈이 손목시계가 파열되고, 크레모아 스위치 박스가 파괴되는 등 격투와 반항의 흔적이 수두룩했지만 아예 조사 대상에서 빼버렸다. 훈이가 본인 소지 M9 베레타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해놓고 나중에 유족이 조사해 다른 사람 권총이었음이 드러나자 ‘그날 김 중위가 다른 사람 권총을 차고 근무에 들어갔다’고 둘러댔다.

지난해 8월 허 일병 사건 항소심 재판장은 ‘타살이라면 동료애를 가진 부대원들이 입을 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라던데.

:부대원들을 공범으로 만드는 과정이 있었다. 사건 전날 모든 사병에게 머그잔으로 소주 한 컵씩을 먹이고 사건 직후에는 사체를 옮기고 탄피와 시간을 조작하는 일을 분담시켰다. 일명 ‘매미타기 고문’이라고, 철조망에 매달고 곤봉을 무릎에 껴서 밟는 고문을 당한 뒤 부대원들이 자살을 뒷받침하는 진술을 해줬다고 한다. 재판장은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동료 부대원에게 그런 짓을 했겠느냐고 하지만 5공 시절의  물정을 모르는 소리다.

:김훈 중위 휘하 소대원들의 판문점 군기 문란 행위는 보안법에 걸리는 것이라서 기무사가 먼저 조사해서 처벌 위협을 하니까 특조단 조사 때 겁을 먹고 자살 방향의 허위 진술을 한 것이다. 타살을 증언한 병사에 대해서는 수사관이 윽박지르며 ‘그럼 네가 죽였지?’ ‘네가 죽인 사람 봤지?’라고 몰아붙였다. 이것이 군 의문사위 재조사에서 다 드러났다.

다른 국가기관의 재조사로 자살 결론이 뒤집힌 뒤 유족에게 회유는 없었나?

:군에서는 자살만 수긍하면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했다. 항소심 과정에서 국방부 측 변호인이 유족 변호인에게 ‘자살만 인정하면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국방부 뜻을 전해왔다. 군 의문사위 조사 과정에서도 수백 명의 군 의문사 유족들에게 국방부에서 연락해 자살로 수긍하고 군 의문사위에 진정을 내지 않으면 국립묘지에 보내주겠다고 조건을 거는 바람에 오랜 싸움에 지친 일부 유족은 이를 수용해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끝낸 일도 있다.

:특조단 발표 전에 국회 국방위 소위원회에 국방부 간부가 찾아와 ‘타살로 보면 범인을 지목하지 못하겠다’ ‘자살로 보아도 징후와 동기를 밝히기 어렵다’라면서 유족과 국회의 입장을 생각해 진상 규명 불능 사건으로 처리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살로 만들어내느라고 밤새 고생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국방부 자문 법의학자들이 반발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법의학자가 바로 서지 않으면 의문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원근이 사건 국방부 기록에도 김훈 중위가 거론된다. 김훈 중위 사건을 법의학 토론회로 잠잠하게 만들었으니 허원근도 법의학 토론회로 끝내자는 것이다. 국방부 자문 법의학자들이 국방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고 있는데 양심의 편에 설 수 있겠나. 국과수 출신 한 법의학자는 유족들에게 “내게는 국방부에서 떡값이 더 이상 안 온다. 계속해서 객관적 소견을 냈더니 그런가 보다”라고 하더라.

:법의학자가 개입하려면 반드시 사건 현장에 데려가야 한다. 국방부가 일방적으로 주는 자료와 떡값으로 움직이는 법의학자들은 군 사망 사건 조사에서 퇴출돼야 한다.

국민과 군 의문사 유족에게 하고픈 얘기는?

:군 의문사를 근절하기 위해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서 싸우자는 말을 하고 싶다. 군에 자식 보내는 사람들이 다 국민 아닌가. 군 의문사 유족이 공동으로 잘못을 저지른 법의학자들을 고발하는 것이 어떨지도 제안드리고 싶다.

:군에서 아들을 잃으면 가정이 파탄난다. 군 사망자 유가족의 피눈물은 16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국방부가 진실을 외면하고 묵살한다면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나서는 수밖에 없다. 국가 안보와 강한 군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기자명 정희상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