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과 지방자치단체는 합동으로 부랑인을 단속하고, 강제구금했다. 1975년 12월15일자 내무부 훈령 410호 ‘부랑인의 신고·단속·수용·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을 보면, ‘공무원이 부랑인을 신고·단속·수용·보호하고 귀향, 사후 관리하는 데 성실하고 책임 있게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고 적시되어 있다. 복지국가 건설, 사회정의 구현을 내세운 군사정권의 ‘부랑인 정화 사업’의 일환이었다.
1981년 4월10일 전두환 대통령은 국무총리에게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 행각이 늘어나고 있다는 바, 실태 파악을 하여 관계부처 협조하에 일절 단속 보호조치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주기 바랍니다”라는 지휘서신을 내렸다. 이후 일주일 만에 관계부처 연석회의가 열렸고, 부랑인 단속을 실시한 지 8일 만에 1850명이 수용되었다. 2만명에 가까운 공무원이 투입돼 부랑인을 단속한 결과다.
1987년 2월4일에 발표된 신민당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986년 형제원 수용자 3975명 중 경찰이 수용을 의뢰한 사람은 3117명이었다. 당시 경찰 내부 근무평점이 구류자 1명당 2∼3점인 데 비해, 형제원 입소는 1명당 5점이었다. 공무원이 부랑인을 단속하면 인계서에 서명을 하고, 시설에서 인수증을 받아 인수인계를 끝냈다. 시설에서는 구청에 보고해 수용의뢰서를 발부받아 처리했다.
당시 김용원 검사는 수사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가혹 행위나 강제노역 여부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조사조차 할 수 없었다. 정부보조금 횡령액 11억4254만원을 찾아냈지만, 검찰 상부의 지시로 6억8178만원으로 축소했다. 이 같은 내용은 그가 쓴 저서 〈브레이크 없는 벤츠〉(예하 펴냄)에 나와 있다. 대법원은 ‘법령에 근거한 정당한 직무수행’이라며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 형제원 박인근 원장은 업무상 횡령 등으로 1989년 7월11일 2년6월형이 확정되는 데 그쳤다. 당시 대법관 중의 한 명이 헌법재판소 소장을 지냈고 박근혜 당선자 인수위원장을 거쳐 국무총리 후보자로까지 지명됐던 김용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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