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이던 하정우씨(가명·48)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부산 광안리 인근 보육원에 여동생과 함께 보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집을 나간 뒤였다. 열한 살이 된 1976년, 집을 찾아가겠다며 보육원에서 도망을 나왔다. 거리 생활은 얼마 가지 못했다. 부산역 대합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붙잡았다. 그와 비슷한 차림의 아이 10명과 함께 ‘닭장차’에 실려 어디론가 향했다. 부산 북구 주례2동 산18번지 형제복지원(이하 형제원)이었다.

하씨는 형제원을 세 번 입·퇴소했다. 아동이 많다는 이유로 형제원에서 서울 소년의 집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도망을 쳤다. 곧바로 붙잡혀 형제원으로 보내졌다. 어머니가 찾아와 퇴소한 1985년까지 유소년기 10년을 형제원에서 보냈다.

ⓒ형제복지지원재단 자료집 부산 주례동 산자락에 있는 형제복지원.

ⓒ형제복지지원재단 자료집 형제복지원에서 노역에 시달렸다.

ⓒ형제복지지원재단 자료집 경찰이 부랑자와 아이들을 형제복지원에 인계했다.

1987년 1월, 형제원은 3164명(남자 2811명, 여자 353명)을 수용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시설이었다. 그해 3월 형제원 수용자 35명이 집단 탈출하면서 형제원의 문제점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불법 감금·폭행·강제 노역과 관련한 증언이 잇달았다. 형제원 기관지 〈새마음〉에 나온 1975~1980년 자료에 따르면 이곳에서 6년간 513명이 죽어나갔다. 수사가 본격화됐지만 원장 박인근씨(85)는 불법 감금·폭행·살인에 대해서는 기소조차 되지 않고, 횡령죄로 2년6월형을 받는 데 그쳤다. 같은 해 6월30일 형제원은 폐쇄됐다. 전국으로 흩어진 피해자는 부랑자라는 낙인과 지우고 싶은 기억에 몸부림치며 입을 닫았다.

하정우씨가 기억하는 형제원은 군대와 같았다. 소대는 28개로 나뉘어 있고 소대마다 수용자 60~100명에 소대장 1명, 총무 1명, 조장 3∼4명이 있었다. 모두 수용자들이다. 여아동 소대는 23·24소대, 남아동 소대는 27·28소대였다. 군인처럼 스포츠머리로 깎고 ‘형제복지원’이라고 쓰인 파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아동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기상은 오전 6시. 4열종대로 점호를 했고, 4열종대로 씻었다. 그리고 운동장에 나가 군가를 불렀다. 매일 전어젓, 깍두기, 건더기가 없는 소고기국을 먹었다. 배불리 먹은 기억은 없다. ‘앙꼬 없는 찐빵’을 그나마 맛있게 먹었다. 오후에는 일을 했다. 일당을 받은 적은 없다. 나전칠기, 낚시 바늘, 칵테일에 꽂는 종이우산, 장갑, 신발 따위를 만들었다.

ⓒ발바닥행동 제공 김용원 당시 부산지검 울산지청 검사가 쓴 검찰 내부 정보 보고서.

그가 처음 형제원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아동소대가 따로 없었다. 1970년대 말, 1층짜리 18개 건물이 지어지면서 소대가 나뉘었다. 하씨와 아이들은 가로 30㎝, 세로 20.5㎝, 높이 20㎝ 벽돌을 만들었다. 냇가에서 직접 채취한 돌과 자갈, 시멘트를 혼합해 벽을 쌓았다. 1층이던 건물을 2층과 3층으로 올리고, 슬레이트였던 지붕을 철근 콘크리트로 바꾸고 보강했다. 1982~1986년, 수용자들은 35동(한 동에 396㎡, 총 1만5867㎡) 건물을 완성했다. 3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3500명이 들어가는 1487㎡ 규모의 새마음 교회도 직접 지었다. 강제노역이었다.

하씨는 도망가기도 했다.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2.5m 담벼락에 사다리를 놓고 담을 올랐다. 산을 두 개 넘어 개금2동으로 향했다. 그러다 주민의 신고로 파출소에 끌려간 뒤 또 형제원으로 보내졌다. 중대장은 장갑을 끼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5m 몽둥이로 ‘개같이’ 맞았다. 걸을 수 없어서 입구에서 소대까지 반나절에 걸쳐 기어갔다. 일주일 동안 포대자루를 입고 식당 앞에 서 있었다. 거기에는 ‘도망갔다가 잡혔습니다. 나는 은혜도 모르는 못된 놈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한 대도 맞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없었다. 그냥 때리는 타작, 물구나무 서는 히로시마, 이불에 싸서 때리는 이불말이, 머리를 땅에 박고 열중쉬어 자세를 하는 원산폭격 따위의 구타와 기합이 수도 없었다. 선도실이라도 끌려가면 개 잡듯 맞는 날이다. 13세가 되자 하씨도 조장이 되었다. 폭력은 폭력을 낳았다. 제지하는 이 없는 상황에서 친구를 마구 때리다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잘못 때려 팔목을 부러뜨리기도 했다. 하씨가 조원을 ‘잡지’ 못하면, 조장의 지위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구타에 의해 숨진 사고는 은폐되었다. 1986년 7월부터 이듬해 1월16일까지 형제원은 운전교습시설을 만든다며 수용인 168명을 동원해 일을 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용자 김계원씨(당시 40세)가 도망가던 중 붙잡혔다. 1986년 7월31일 관리자 이 아무개씨는 주먹과 발로 김씨의 전신을 수없이 구타했다. 김씨는 사흘 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의 사망진단서에는 ‘직접 사인:심부전증, 선행사인:전신쇠약’이라고 기재돼 있었다.

ⓒ시사IN 신선영하정우씨(위)는 “지금도 꿈에 형제복지원이 나온다. 꿈속에서 매번 누군가에게 맞고 있다”라고 말했다.

박인근 원장 두 차례나 훈장받아

형제원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는데도 박인근 원장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비에 의한 부랑인 선도시설 마련과 부랑인 선도’를 공적으로 1981년 4월 보건사회부 장관이 추천한 국민포장을 받았다. 1984년 5월에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형제원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던 1987년 5월, 전두환 대통령이 제16회 소년체육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왔다. 이때 부산시장이 “복지원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라고 사죄하자, 전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

이 사건을 수사한 김용원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 검사가 쓴 정보 보고서를 보면, 박 원장과 부산시가 유착되어 있다는 의심이 들 만하다. 1987년 3월11일 기록된 ‘구속 중인 박인근 원장의 동향’에는 박 원장이 면회 때 한 발언이 기록돼 있다. ‘부산시에서 신문에 보도되는 것같이 형제원을 생각한다면 섭섭하다(2월9일)’ ‘(동생 박 아무개씨에게) 안기부, (부산)시장을 찾아가라(2월9일)’ ‘부산시장이 너무하는구나. 두고 보자(2월19일·면회 오지 않는 것이 유감이라는 뜻)’ 따위다.

1985년 어머니가 찾아오면서 급작스럽게 사회로 나온 하씨는 순탄한 길을 걷지 못했다. 돈이 필요했던 그는 껌을 팔았다. 거리에서는 욕과 주먹이 먼저 나갔다. 때리고 맞던 형제원의 일상은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건달 세계로 빠졌다. 소매치기를 배웠다. 그 때문에 1년, 1년6개월씩 네 번 ‘별’을 달았다. 

정신을 차린 건 지금의 아내 덕분이다. 1990년 서울로 올라왔다가 돈이 떨어져 들어간 봉제공장에서 아내를 만났다. 결혼하기까지 2년간 닥치는 대로 일했다. 지금은 대학생 딸아이를 둔 어엿한 가장이다.

ⓒ시사IN 신선영3월5일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진상 규명과 보상을 요구하며 ‘입법 청원’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27년이 지난 지금도 하씨의 꿈에 형제원이 나온다. 그는 매번 누군가에게 맞고 있다. 한때 운명이라고 생각했지만 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형제원에 의해 내 삶이 꼬이고 말았다. 이제라도 그 당시의 시시비비를 명확하게 가릴 필요가 있다.”

“국가가 불법 강제구금을 용인한 사건”

형제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대책위) 여준민 활동가는 “어떤 법률적 근거도 없이, 오직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국가가 불법 강제구금을 용인한 사건이다. 12년간 정부와 시설 운영자들이 빚어낸 인권침해 참사다”라고 규정했다.

현재 대책위를 통해 연락이 닿는 형제원 피해자는 80명에 이른다. 대책위에 따르면, 연락이 닿는 피해자 가운데 전과자이거나 가정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90%가 넘는다. 하정우씨는 “졸업장이 없어서 제대로 된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데다, 사회의 질서를 제때 배우지 못해 떠도는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대책위는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폭행·강제노역·성폭력으로 인한 피해 사례를 낱낱이 조사하고, 진상이 규명된 피해자에 대해서는 국가가 보상을 통해 구제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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