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자이언츠는 오랫동안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1992년 이후로 한 번도 우승을 해보지 못했으니 도대체 몇 년째인가. 그러나 자이언츠의 근성과 저력을 믿기에 편파적 응원, 희망 섞인 전망을 멈추지 않는다. 나를 아는 이들은 야구와 자이언츠에 대한 나의 팬심을 종종 확인한다. ‘부산 갈매기’의 정서를 간직하고 있는 나로서는 은연중 그 애정을 드러내곤 한다.

현재의 자이언츠에는 포수로서 팀의 중심을 잘 잡아주는 강민호 등 여러 스타급 선수가 있다. ‘빅 보이’ 이대호는 떠났지만 ‘장돈건’ 최준석이 돌아왔다. 물론 내 마음속의 자이언츠는 최동원의 팀이다. 부산 구덕초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최동원은 내 어린 시절 추억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난 아직도 그가 경남고 에이스로 1975년 고교야구대회에서 경북고·선린상고를 상대로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을 이루었던 장면을 기억한다.

이후 나는 동네 ‘형님’이 ‘영웅’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대학 2학년이던 1983년 최동원은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전두환 정권이 만든 프로야구는 우민(愚民)정책이라고 비판하면서도, 그의 경기는 챙겨 보았다.
 

ⓒ연합뉴스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거둔 최동원 선수. 나중에 ‘선수협’ 활동에 앞장섰다.


역대 최고의 한국시리즈 중 하나로 꼽히는 1984년 경기에서 자이언츠는 당시 최강이던 삼성 라이온즈를 맞아 혼자 4승을 거둔 최동원의 무쇠팔 덕에 7차전까지의 승부 끝에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라이온즈가 약체인 자이언츠를 한국시리즈 상대로 골랐다는 말이 있었으나, 호되게 당하고 만다. 이후 최동원의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활동을 보면서 나는 그와 개인적 교감을 넘어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타급이 아닌 선수들의 인권과 복지는 취약하다. 당시 최고급 대우를 받던 최동원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총대’를 멨다. 최동원의 선수협 조직을 위한 법률 조언을 민주당 문재인 의원이 맡았음은 이제 잘 알려져 있다. 이후 최동원은 선수협 주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전 구단에서 왕따를 당했고, 1988년 팀에서 방출당해 라이온즈로 갔다가 1990년 반강제로 은퇴한다.

이후 최동원은 잠시 정치의 길을 걷는다. 만약 그가 고교 선배 김영삼을 따라 1990년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에 합류했더라면 국회의원이건 지방의원이건 떼놓은 당상이었을 터인데, 이를 거부하고 노무현·김정길 등의 ‘꼬마 민주당’을 선택했다가 낙선한다. 그의 선거 구호는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 정치의 강속구”였다. 안철수 의원이 좋아할 만한 구호다.

낙선 후 방송에서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를 보았을 때 굴욕감을 느꼈다. ‘영웅’이 ‘광대’가 되도록 만든 현실에 화가 났다. 그는 2001년 한화 야구단의 코치로 복귀해 마지막 야구인생을 불태웠고, 자이언츠 구단 최초의 영구 결번(11번) 주인공이자 영원한 전설이 되어 동료 선후배는 물론 팬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연합뉴스‘악바리 정신’의 대명사, 박정태 선수.

위기 때마다 빛났던 ‘박정태 리더십’

최동원 다음으로 박정태 선수를 좋아한다. 특유의 ‘흔들 타법’이 유명했다. 하지만 많은 자이언츠 팬들은 그를 ‘악바리 정신’의 대명사로 기억한다. 그의 끈질김은 패색이 짙은 경기를 끝내 뒤집어놓았다. 그가 있었기에 1990년대 자이언츠는 부흥할 수 있었다.

그는 최동원같이 찬란히 빛나는 스타형 선수는 아니었다. 최동원은 행군 대열 앞 멀리서 자기 앞에는 아무도 없는 길을 깃발을 들고 쑥쑥 걸어가는 향도와 같은 존재였다. 많은 야구선수들은 하늘에 떠 있는 북극성처럼 그를 바라보며 야구를 했다.

반면 박정태는 늘 선수들과 함께 길을 걸었다. 때론 격려를, 그리고 질책을 하면서 팀을 이끌었다. 그가 최고의 2루수이자 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리더로 인정받은 것은 포기할 줄 모르는 그의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동료들과 늘 함께하며 끈질긴 근성, 타오르는 투지, 무한대의 성실로 팀을 단결시켜 팀을 준우승까지 올려놓았다.

1999년 대구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그의 역할은 빛났다. 자이언츠는 1패3승으로 패색이 짙었다. 그런데 ‘검은 갈매기’ 호세가 홈런을 날리자 라이온즈 팬들이 호세에게 오물을 던졌다. 처음에는 참았던 호세가 오물이 사타구니에 맞자 배트를 관중석에 던졌고, 이로 인해 퇴장 명령을 받는다. 이어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이라 할 만한 난동 사건이 벌어진다. 경기장이 관중석에서 날아온 오물로 엉망이 되어버린다.

격분한 자이언츠 선수들은 짐을 챙기고 구장을 떠나려 했다. 그랬더라면 자이언츠는 몰수패를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장 박정태는 “오늘만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라며 동료들을 격려했고 경기는 재개된다. 경기가 속개되자 마해영·임수혁의 ‘마림포’가 홈런을 뿜어내어 자이언츠는 승리하고 한국 시리즈에 진출한다. 아, 임수혁은 10년간의 투병 끝에 2010년 세상을 떠났다.

최동원과 박정태의 그라운드는 나에게는 연구실과 세상이다. 교수가 된 이후 지금까지 나는 주중이면 거의 매일 23㎡(7평) 연구실에 나와 연구 작업을 한다. 동시에 대학 바깥의 세상에 눈과 귀를 열고 세상과 소통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집념의 승부사 최동원과 박정태는 나에게 묻는다. ‘당신이 걷는 길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공격이나 비난을 받고 고비를 겪을 때 힘들다고 주저앉으려 하지 않는가, 조금 힘들다고 긴 호흡을 잃고 조급하게 대응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div align=right〉〈font color=blue〉〈/font〉〈/div〉조국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조국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물론 나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다 버리고 처염상정(處染常淨:더러운 곳에 머물면서도 깨끗함을 유지한다는 뜻)의 길을 걷고 있다고 전혀 말할 수 없다. 다만 돈이나 권력을 우선순위에 놓지 않고 지식인이자 학자로서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려 노력할 뿐이다.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 포수 요기 베라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야”(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렇다. 잊히고 사라질 때까지 내게 주어진 일,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어떨 때는 맹렬히, 어떨 때는 담담히. 어떨 때는 웅변으로, 어떨 때는 침묵으로.

세상을 살며 난관에 부딪히거나 좌절할 때 나는 자이언츠를 떠올린다. “괜찮아, ‘꼴데’ 시절도 버텼잖아!” 하면서. 2001년부터 2008년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하기 전인 2007년까지 자이언츠의 성적은 8-8-8-8-5-7-7이었다. 팬들 사이에는 “임수혁의 저주”라는 말도 돌았다. 그러나 오랜 기간 바닥에서 헤매던 자이언츠는 이제 가을 야구의 단골이 되었다. ‘저주’는 끝났다. 그리고 2014년, 자이언츠는 우승할 것이다!

 

기자명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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