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5월5일 뉴욕의 한 한인 단체 간부들이 기자가 보는 앞에서 쇠고기 음식을 먹는 행사를 가졌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국 내의 격렬한 논쟁이 미국 교포 사회에서도 연일 화제다. 이달 초 워싱턴 한인연합회와 뉴욕 한인회, 로스앤젤레스 한인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한국민에게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강변하는 기자회견이 열리기도 했다. 기자회견에 나선 인사들은 “250만 미주 한인들이 오랫동안 걱정 없이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왔으니, 고국에 계신 동포들도 안심하고 드셔도 된다”라는 요지의 성명서를 연이어 낭독했다. 남문기 로스앤젤레스 한인회장은 직접 한국에 가서 5월6일 이같은 주장을 설파했다.

이 사람들이 과연 순수하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기자회견을 연 것일까. 현직 의사 자격으로 로스앤젤레스 기자회견을 주도한 이용태씨는 한나라당 산하 해외 조직인 한민족네트워크 미주본부장이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회장을 지낸 그는 지난해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공식 후원조직이었던 MB연대 미주본부장을 맡아 교포 사회의 ‘MB 바람’을 이끌었으며, 4·9 총선 직전 한나라당 비례대표를 신청하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 인물이다.

한국으로 날아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을 설파한 남문기 로스앤젤레스 한인회장도 지난해 대선 때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후원모임에 꾸준히 참석한 인물이다.

사상 최대 쇠고기 리콜 파동

뉴욕 기자회견을 주도한 이세목 한인회장은 식품 운송업자다. 식품 관련 사업을 통해 미국 동부 지역 한인 사회 최고 수준의 부를 축적했다. 그가 주도해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홍보한 회견은 한인회의 이름을 빌려 업자들의 이익을 호소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회장의 회견 직후 뉴욕 한인회 인터넷 게시판은 하루 만에 교포 네티즌의 항의글이 500여 개나 몰리는 수난을 겪었다. 네티즌은 “업자 개인의 의견을 마치 한인 사회 전체의 목소리인 양 주장한 한인회장에게 분노를 느낀다”라는 등 비난을 쏟아냈다.

ⓒ중앙일보 미주미주중앙일보는 미국 학교 급식에서 쇠고기를 없앤 이후 기뻐하는 한국인 학생들 이야기를 기사화했다(위).
지난 2월 미국에서는 축산업계가 도축 직전 소의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현행법을 어기고 광우병 증세가 의심되는 소를 잡은 후 이 쇠고기를 학교 급식을 비롯해 전국의 대중식당과 패스트푸드점 등에 공급한 사실이 적발되어 역사상 최대 규모의 리콜 파동이 일어났다.

미국 농무부는 2월17일자(이하 현지시간) 긴급 연방행정명령을 통해 시중에 풀린 1억4300만 파운드 쇠고기를 전량 수거해 폐기하도록 조처했다. 이전까지 역대 최대 쇠고기 리콜 사례였던 1999년 3500만 파운드 규모의  4배가 넘는 일대 사건이었다.

언론은 연일 쇠고기 문제를 주요 뉴스로 다뤘다.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 교육청 산하 학교 급식 메뉴에서 쇠고기가 사라졌고, 현재까지 공급이 중단된 상태다. 당국은 리콜 대상 쇠고기를 취급한 기록이 남아 있는 음식점 명단을 샅샅이 공개했고 해당 업소는 된서리를 맞았다.

파문의 중심은 로스앤젤레스 인근 ‘치노’라는 소도시의 대형 도축장이었다. 한인 언론은 치노 도축장에서 나온 쇠고기가 인근 한인 마켓이나 한국 음식점에 흘러들어가지 않았는지 추적하는 보도를 연일 쏟아냈다.

한인 교포 사회도 이같은 사태에 주목해 쇠고기를 먹지 않는 가정이 늘어났다. 학부모 사이에서는 때 아닌 ‘도시락 싸주기 운동’이 펼쳐졌다. 혹여 급식이나 매식을 통해 자녀들이 쇠고기를 접촉할까 봐서였다. 급식 시스템이 오랜 기간 자리잡아온 미국 내 학교 현장에서 한인 학부모가 펼친 도시락 운동은 이색적이기까지 했다. 한인 재학생이 많은 로스앤젤레스 시내 ‘서드 스트리트’ 초등학교에서는 도시락을 싸오는 학생이 전교생의 절반에 이르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인 앤 아웃’이나 ‘잭 인더 박스’같이 교포 사이에 인기 있던 패스트푸드점을 찾는 발길도 뚝 끊겼다.

미국과 한국, 정말 같은 고기를 먹을까?

이런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직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졌고, 교포 사회는 긴장하면서 후속 상황을 지켜봤다. 미국 내에서 쇠고기가 강하게 불신받는 현실을 숨긴 채 안전성을 강변하는 기자회견을 지켜본 교포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세목 뉴욕 한인회장(왼쪽)은 식품 유통업자이고, 이용태 한인의사협회 부회장(오른쪽)은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 신청자이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사상 최대 리콜 파동을 일으켰던 치노 도축장의 쇠고기를 전량 한국에 내다 팔아도 현행 협정문으로는 막을 길이 없다는 점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3년째 유학 중인 윤근일씨(25·UCLA)는 “쇠고기가 위험하다고 한인 신문과 방송에서 떠들어댄 일이 엊그제인데, 입 싹 씻고 무조건 안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인간에 대한 회의마저 들 만큼 충격을 받았다”라며 “관제 회견으로 한국민을 혹세무민한 그들은 비웃음을 받아도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그럼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미국내 교포들이 먹는 것과 같은 쇠고기를 먹게 될까? 미국 내 마켓에서 유통되는 국내산 소는 최상급 ‘프리미어’부터 ‘초이스’ ‘셀렉트’ ‘스탠더드’ 등으로 품질 등급이 나눠져 있는데, 최하품인 스탠더드급도 30개월 미만으로 도축하도록 법제화돼 있다. 물론 그보다 낮은 등급의 쇠고기도 있지만, 육골분 사료 등에 들어가는 것으로 일반 소매점이나 음식점에는 유통이 금지돼 있다. 따라서 미국의 일반 소비자들은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절대로 구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상황을 보다 못한 교포 주부가 발끈하고 나섰다. 미국 전역에 거주하는 한인 주부들은 최근 온라인을 중심으로 ‘쇠고기 수입 재협상 실행을 요구하는 미주 한인 주부들의 모임’을 결성해 5월7일 각 지역 한인회와 상공회의소 등이 주도한 회견을 반박하는 설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몇몇 미주 한인회가 미주 동포들이 먹는 미국산 쇠고기는 무조건 안전하다는 식의 성명을 발표하여 마치 이것이 전체 미주 한인의 목소리인 양 사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호도했다”라며 유감을 표시했다.

기자명 로스앤젤레스=오종수 (언론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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