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석의 〈포스트 1945〉. 벽에 붙은 소형 금고 속에 뭉칫돈이 담겨 있고, 그 옆 안내문에 “지금 이곳에 창녀가 한 명 초대됐습니다…이 창녀를 찾아낸 분은 120만원을 받게 됩니다”라는 내용이 한글과 영어로 적혔다.
흡족한 심정으로 전시 개막식을 관전했다. 누구도 부인 못할 영민한 공상의 개발자, 김홍석씨의 개인전(국제갤러리, 4월17일~5월19일)은 한참 앞질러가는 예술의 외형을 갖췄다. 한데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문제의 소동은 내가 전시장 문을 나선 후 터졌다고 한다. 입길에 오른 이른바 ‘창녀 퍼포먼스 파동’의 전모를 요약하면 이렇다.

김홍석은 개막 행사의 일환으로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뭉칫돈이 담긴 소형 금고와 안내문이 나란히 벽에 붙었다. 안내문에는 “지금 이곳에 창녀가 한 명 초대됐습니다…(중략)…이 창녀를 찾아낸 분은 120만원을 받게 됩니다”라는 거짓말 같은 지문이 적혔다. 김홍석의 기상천외한 허구적 예술관에 친숙한 하객이라면 이 또한 변형된 트릭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행사가 진행되자, 누군가 전시장 안을 겉도는 한 여성을 정확히 지목해 신원을 밝혀냈고, 그 대가로 약속받은 현찰더미를 건네받았다. 매춘 여성도 사례금 60만원을 받고 전시장을 떴다고 한다. 이날 행사를 사회면에 처음 보도한 조선일보는 돈 받고 전시장을 떠난 매춘 여성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며, 기자의 목격담을 실었다. 다른 일간지도 비슷한 논조로 가세했고 문화일보는 120만원 당첨의 주인공조차 눈물 지었다고 썼다.

‘지금 여기 창녀가 한 명 초대됐습니다’

보도 직후 국제갤러리는 항의 전화 쇄도에 한시적으로 시달렸다고 한다. 외부인의 견지에선 무릇 옳고 그름이 명쾌해 보이는 이 소동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나는 주저했고 난처했다. 발표 당시의 미학적 완성도와, 이번 사태처럼 윤리 문제 모두에서 공중의 비난을 면치 못했던 예술적 도발이 후세에 포용되고 주류를 형성한 예가 적지 않아서다. 20세기 모더니즘 운동의 전례가 그러했고, 1980년대 버블경제 붕괴 후 영국 미술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성장시킨 yBa(영국청년미술)의 처지도 유사했다.

2004년 미국 여성 미술인 안드레아 프레이저가 예술가와 소장가의 제도적 관계를 매춘에 빗댈 목적으로 실제 컬렉터에게 돈을 받고 성관계를 가졌고 그 과정을 녹화한 영상을 개인전 도중 틀어준 해프닝이 있었다. 이탈리아 악동 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같은 해 아동복 차림의 마네킹 셋을 마을 어귀 거목에 목매단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교수형 장면은 물론이고 ‘간접 아동 학대’를 연상시킨 이 문제작은 공공기금으로 제작돼 구설에 올랐고, 설치 다음 날 어느 진노한 시민에 의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두 사건은 ‘창작자의 윤리’가 문제된 경우로 프레이저는 제도 비판 예술의 변용이라 해명했지만 여론과 비평 모두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반면 카텔란의 뒤통수 때리는 장난은 정서적 관행을 거스른 퇴행의 결과로 테러 대상은 되었지만 저주받은 역작으로 추앙되는 면이 있다.

김홍석의 창녀 파동은 어떤 경우일까? 유형적으로 프레이저와 닮았다고 나는 본다. 여론은 물론 전공자 집단조차 지지를 주저한다. 비록 여성에게 화대가 아닌 임금이 지불되었지만 사태의 추이로 봐 영혼의 화대처럼 인식 못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 행사를 성토하길 주저한 걸까? 다른 출품작과 김홍석의 지난 성과가 일회적 과오를 덮어줄 만큼 탄탄해서일까?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내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이 남은 게 더 큰 이유다.

ⓒ조선포토오른쪽은 개막식 당일 국제갤러리 표정.
악의 없는 엉터리 거짓말 제조가였던 김씨가 개막 퍼포먼스에는 어째서 ‘오리지널’ 매춘부를 섭외했는지 의문이다. 그의 작업은 시사 현안에서 실마리를 발견해 터무니없이 썰렁한, 그러나 달리 탓할 수 없는 유희의 허무주의를 구축했다. 탈북자 문제에 기초한 〈This is a Rabbit〉은 토끼 의복 안에 진짜 탈북자가 들어간 것처럼 꾸몄지만 실제로는 그저 스펀지 고무인형일 뿐이다. 안내문만 참조하고 까맣게 속는 이가 적지 않다.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서 출발한 엉터리 대담 〈The Talk〉는 동티모르 노동자로 국내 연기자 안내상이 배역을 맡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희극을 선사한다.

그 외에 비운의 인물 유미 다카하시와 나타샤를 내세운 조형물도 전부 지어낸 인물이다. 이 엉터리 이야기는 죄다 한국 사회가 떠안은 부조리를 성찰하는 기본 틀을 갖추고 있다. 제도 정치, 사법부, 시민운동조차 막아내지 못하는 현실 부조리와 사회 거악에 대해 나약한 예술까지 애써 가세하는 것이 도무지 가당찮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김홍석의 어깨 힘을 뺀 정치성이 눈부시다. 그의 블랙 코미디 정공법은 그래서 큰 반향을 얻었다. 정치적 올바름이 때로는 작가와 관객에게 실효 없이 허망한 분노와 심리적 부담만 안겨주면서 소외되는 예가 적지 않은 터에 그 누구도 해를 입지 않는 가짜 배역 놀이가 등장한 것이다.

물론 실제 주인공이 섭외된 예가 김씨의 전작을 통해 전혀 없지는 않지만 〈포스트 1945〉의 매춘 여성 등장은 의외였다. 지어낸 배역이었어야 흐름에 부합하는 듯했는데 말이다. 혹 매춘 여성 섭외 사실 자체가 허구였던 건 아닐까? 이걸 하나의 가능성으로 간주한다면 꽤 기발한 시도라고 평가해도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언론 보도 이후 작가와 갤러리의 대처 방식으로 미뤄볼 때, 고용된 이는 실제 매춘 여성인 듯하다(최소한 현재까지 이게 잠정적 사실이다). 그러면 다른 판단이 요구된다. 교양과 문화의 열린 공간을 표방하는 갤러리는 특정 계급에게 배타적으로 열린 혹은 닫힌 멸균된 공간이다.

구조적으로 충분히 위화감이 조성될 수밖에 없다. 문제의 시작은 지금부터다. 매춘 여성이 돈을 쥐고 치욕의 눈물을 머금으며 행사장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설령 그게 과장 보도여도 문제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녀에겐 낯선 실내에 갇혀 자신과 딴판의 인생을 사는 하객의 틈에 끼어, 공간의 이방자로서 자신과 ‘그들’ 사이를 갈라놓을 신원 노출 퍼포먼스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렸을 것이다. 공개 지목을 걱정하며 2시간가량 불편하게 서성댔을 그녀의 처지를 대역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괜한 신파를 유도하고 싶진 않지만 가슴이 저려야 옳지 않을까? 갤러리 측은 ‘돈이면 다 되는 시대 상황을 꼬집으려는 의도’였다고 밝혔다는데 더 군색해졌다.

기획안의 훈고적 성격과는 정반대의 대가를 지불했지 않은가. 하류 인생을 사는 어느 불청객을 닫힌 공간으로부터 내쫓는 꼴이 되었고, 전 과정을 관객은 퍼포먼스라는 예술의 이름으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수용했을 게 분명하다. 작가에게도 그가 이제껏 성취한 미학적 독창성을 근본부터 회의하게 만든 결과다.

현대 예술의 난해함은 선택된 소수의 구성원과 그들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 현대 미술은 그렇게 존립한다. 이걸 비단 안 좋게 볼 일만은 아니다. 대중적 몰취향과 불필요한 간섭에서 비호될 필요가 있다. 다수를 위한 예술이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것이 최선도 아니다. 현대 미술의 닫힌 계는 ‘소통’과 ‘실험’을 내세워 간혹 임계점에 도달할 때가 있다. 결국 붕괴를 맞이한다. 이 사태가 그런 예다. 관계자에게 악의는 없었을 터이나, 일종의 위험신호로 받아들여야 온당하다. 괜히 ‘해석은 관객의 몫으로’ 따위의 진부한 둘러대기만은 말았으면 한다. 지나치게 앞질러 갔다. 그것이 임계점인지를 가리는 일까지 작가와 기획자의 몫이다.

기자명 반이정 (미술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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