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왜 그러고 살았나 싶게 얼굴이 화끈해질 때가 많다. 특히 어학 공부와 관련한 나의 과거는 입 밖에 꺼내기조차 부끄럽다. 고등학교 3년, 그리고 대학 교양과정 2년, 물경 5년 동안이나 독일어를 제2 외국어로 ‘선택’했으나 지금 지껄일 줄 아는 독일어라고는 몇 마디 되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 독일어 선생님 별명이, 어느 학교에나 한 명씩은 있었던, 학생들이 지독하게 싫어했던 ‘미친개’였다는 걸로는 해명이 안 된다. 그 많은 독일어 시간에 나는 도대체 뭘 하며 지냈던 것일까.

전두환 일파가 대학에 탱크를 밀고 들어와 할 수 없이 휴학을 하고 군에 가기 직전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내 꼴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일본어 공부를 강권하다시피 했다. 일제 때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그 후에도 계속 책을 읽어 아버지는 일본어를 읽고 말하는 데 자유로웠다. 아침마다 주먹만 한 눈곱을 매달고 부어터진 얼굴로 마지못해 아버지에게 일본어를 배웠다. 덕분에 지금 입은 벙긋 못하지만 사무라이 소설은 읽을 수 있을 만큼 일본어를 익혔는데, 가르치는 분에게 실망만 안겼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면목이 없다.

그때야 우리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조차 영어는 물론이거니와 중국어나 일본어 심지어 아랍어나 몽골어까지 예사로 들을 수 있는 요상한 시대를 살아갈 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 집에서 가까운 서울 외국어대 앞 카페에 앉아 있으면 어느 외국의 낯선 도시에 와 있는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로 국적도 짐작하기 힘든 가지가지 외국어가 들려온다. 전 세계 이민자 수는 1960년 7500만명에서 2005년에는 1억9100만명으로 늘어났다. 사람들은 이제 다른 어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로도 서슴없이 주민등록지를 옮긴다. 세계 관광기구의 예상에 따르면 2020년 국경을 넘나드는 관광객 수는 16억명에 달하리라고 한다. 대한민국은 그런 경이로운 변화 속에 편입돼 있다.

ⓒ한성원 그림
지난해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 〈굿바이 영어사교육〉(시사IN북, 2012) 편집 작업을 하면서 대오각성을 하고 오랫동안 밀쳐두었던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앞으로 배워야 할 것은 문법과 발음에 치중한 앵글로색슨 영어가 아니라 소통이 중요한 글로벌 영어, 즉 ‘반기문 영어’임을 깨달은 덕분이다.

발음과 문법의 덫만 벗어던진다면야 영어 공부도 뭐 할 만하지 않은가. 수준과 취미에 맞는 책을 잘 골라 꾸준히 읽으면 성취가 쏠쏠하리라는 믿음도 생겼다. 그 책에서 영어 교육의 달인인 선생님들은 “지긋지긋한 영어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재미있는 책을 읽는다고 여기며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권하는데, 효과가 있다.

얼마 전 중국 출장을 다녀와서는 중국어에도 기웃거린다. 옆집 사람처럼 익숙하게 생긴 그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시끄럽게 떠들어대는데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일본어를 배울 때처럼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녹음 테이프를 구해 ‘철수야 영이야’(사실은 잉쯔:그림자이다)부터 기세 좋게 시작했는데 끈기가 없어 개점휴업 상태다. 미국의 그래픽 노블 작가 크레이그 톰슨이 그리고 쓴 만화 〈하비비〉(미메시스, 2013)를 읽은 뒤에는 아랍어와 사랑에 빠졌다. 그 책을 읽고 지렁이처럼 꼬불꼬불하게만 보였던 아랍어 알파벳이 사막의 밤하늘을 수놓는 달과 별, 그리고 모래 위에서 꿈틀대는 강과 뱀의 형상임을 알았다. 하비비란 그 어감은 ‘내 사랑’이나 ‘마이 러버’보다 또 얼마나 감미로운가. 아랍어를 배우면 거기서 파생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스와힐리어도 익히기 쉽다던데. 꿈이야 좀 야무진들 어떠랴.

외국어 학습에 흑마술 같은 비법은 없을까

<언어의 천재들>마이클 에라드 지음민음사 펴냄
미국의 언어학자인 마이클 에라드가 쓴 〈언어의 천재들〉(민음사, 2013)은 바벨탑을 무너뜨리면서 오만한 인간들에게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수많은 언어로 말하며 살게 한 형벌을 내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외국어의 달인들을 추적한 책이다. 그래서 원제가 ‘바벨 노모어(Babel, no more)’이다.

그는 초다언어 구사자라 불리는 이들에게서 언어를 깨치는 우리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아내고 싶었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의 로망이며 거대한 돈벌이이기도 한 외국어 학습에 흑마술과 같은 비법은 있는지 엿보고 싶었다. 앞으로 바벨탑을 무너뜨린 하나님의 뜻과는 매우 다르게 살아가야 할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줄 최선의 방법은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내가 50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책을 끼고 기꺼이 끙끙댄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이제껏 그 누구보다도 많은 천재들을 만났다. 이런 일을 해낸 이는 그가 처음이다. 그는 죽은 이들의 신화를 추적했고 세계 곳곳의 살아 있는 전설과도 인터뷰했다. 신경학·뇌과학 등 최신 발전하는 언어학습 이론과 그 한계도 섭렵하고 소개했다. 그는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 이 천재들에 관한 소문이 많이 과장되었으리라 여겼다. 연구가 끝난 뒤 그는 자신의 판단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가 처음 추적한 이는 19세기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활동했던 메조판티 추기경이었다. 무려 72가지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언어구사 능력이 경이로워 찬사 속에 살았지만 종종 사기꾼이 아닌지 의심을 받았다. 저자는 이 추기경의 유품 가운데서 그루지야어, 헝가리어, 아랍어, 터키어, 페르시아어 등을 공부한 수많은 메모 꾸러미들을 발견했다. 중국의 사제들과 한자로 교환한 서신도 있었다. 세계 10여 개국에서 몰려온 성직자들과 각국 언어로 자유롭게 토론했다는 그는 ‘진짜’였던 것이다.

저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초다언어 구사자 웹사이트를 대표하는 인물인 앨릭잰더 아르겔레스를 만났다. 멕시코계인 그는 30대 초반에 한국 한동대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그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최소한 6개 국어는 할 수 있다고 저자에게 말해주었다. 실제로 저자는 그가 인도하는 대로 잠깐 공부한 뒤에 힌디어가 눈앞에서 서서히 열리는 걸 경험했다. 아르겔레스는 전 세계의 고전을 그 나라 말로 읽겠다는 목표 아래 1년 열두 달 31개 언어를 공부하며 상당한 성취를 쌓아가는 중이다.

신경종족(neural tribe)이라 불리는 초다언어 구사자가 한자리에 모인 적이 두 번 있다. 벨기에의 언어학교 교장 출신인 외헤인 헤르만스라는 이가 주최한 두 차례의 경연대회에서다. 저자는 이 대회 첫 번째 우승자인 요한 판테발러도 만났다. 네덜란드 헨트 대학 터키학과장인 그는 31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 가운데 일곱 가지는 사어였다. 그는 쟁쟁한 참가자들 사이에서 발군의 성적을 거두었는데 거듭되는 인터뷰 요청에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그저 그 나라에 직접 가서 그 나라 말로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저자는 연구를 끝내면서 이 특별한 천재들이 가진 재능은 상상 이상이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들이 원어민처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언어는 10여 개를 넘지 못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다만 이들은 냉동 상태로 수많은 언어들을 기억 속에 묻어뒀다가 필요할 때면 꺼내 쓸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 이들에게는 전 세계의 언어를 모두 깨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200년이든 300년이든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이렇게 특별한 이들에게는 못 미치더라도 보통 사람들도 얼마든지 다중언어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저자가 내린 결론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 수많은 천재들에게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웠을까. 책 전체에서 외국어 학습자들이 목말라 하는 아이디어가 반짝인다. 하지만 언어 천재들에게도 외국어 학습은 피 말리는 일이었다. 메조판티 추기경은 “나는 언제나 처음 공부하는 학생처럼 집중한다”라는 푸념 같은 말을 남겼다. 저자가 본 것은 기적이 아니라 우화였다.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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