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4월21일 이명박 대통령(왼쪽)이 후쿠다 야스오 총리 겸 자민당 총재와 회담했다.

‘실용 외교’를 외치는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첫 외국 순방길에 올라 미국 부시 대통령과 일본 후쿠다 총리를 만났다. 성과가 많았다고 자부하는데 공교롭게도 두 외국 정상 모두 퇴임을 앞둔 ‘끈 떨어진’ 신세다. 부시 대통령은 임기가 9개월 남짓 남아 벌써 레임덕에 빠졌다. 후쿠다 총리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후쿠다가 부시보다 더 빨리 물러날지도 모른다.

4월21일 현재 후쿠다 총리 지지율은 25%(아사히 신문)로 정권 출범 이후 최악이다. 그의 임기는 내년 9월이지만, 자민당 일각에서는 조기 총선을 실시해 새 총리를 뽑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후쿠다 총리는 취임 당시인 지난해 9월에도 채 1년을 못 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신기한 것은 조기 총선론이 야당인 민주당이 아니라 자민당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자기 당 총리 지지율이 최악인 때 총선을 하면 불리할 텐데? 아니다. 경쟁 당인 민주당 지지율은 더 낮기 때문이다. 정당 지지율에서 자민당은 민주당보다 10%포인트 이상 앞서 있고, 차기 총리를 묻는 설문에도 자민당 인물이 대부분 상위를 차지한다. 도쿄에 있는 민주당 중앙당의 한 당직자는 “개인 의견이지만, 올해 총선이 열린다면 민주당이 정권 교체를 하기는 어렵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위기 때마다 총리를 바꾸며 집권을 연장하는 모습은 자민당이 지난 반세기 동안 보여준 생존전략이다.

자민당은 1955년 이래 53년째 집권 중이다. 1993년 국회 과반 점유에 실패해 연립정권을 꾸린 적은 있지만 한 번도 야당 신세가 된 적은 없다. 민주주의 국가 가운데 드문 사례다. 멕시코 제도혁명당이나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도 장기 집권한 사례가 있지만 20세기 말 모두 정권 교체했다. 정치학자 펨펠은 일본 자민당 체제를 ‘희한한(uncommon)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요즘 이 희한한 일본 정치구조가 한국 정치인 사이에 주목되고 있다. 우리 정치 상황이 옛 자민당 전성기와 비슷해 ‘한국판 자민당 시대’가 올지 모른다는 전망 때문이다.

한나라당, 자민당의 유연성 배워야

올해 초 한나라당이 200석을 넘긴다는 총선 여론조사가 나오자 “과거 일본처럼 1.5당제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서울신문 1월1일)라는 등 여러 언론이 자민당과 한나라당을 비교했다. 총선 전인 지난 4월5일 통합민주당 선대위 회의에서 김민석 최고위원은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친박연대·친박 무소속 후보 등을 모두 합하면 230석을 넘게 되고” “자민당 체제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230석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수치가 나왔다. 한나라당 153석에 친박연대 14석, 한나라당 복귀를 천명한 무소속 의원 11석을 합치면 178석이 된다. 전 한나라당 출신으로 구성된 자유선진당과 보수 성향 무소속을 포함하면 204석에 이른다. 1987년 민주화 이래 보수 진영이 이렇게 세를 넓힌 적은 없었다.

총선 직후 언론은 “한국판 일본 자민당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헛된 과장만은 아니다”(4월11일 연합뉴스) “구태만 재연한다면, 민주당이 그렇게 우려하는 한국판 자민당 독주시대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뷰스앤뉴스 4월15일)라고 진단했다.

4·9 총선 결과는 일본 정치의 1.5 체제와 유사하다. 1.5체제란 우월적 지위에 있는 정당 하나와 그 절반에 미치는 야당으로 이뤄진 1+0.5 정치구도를 뜻한다. 자민당은 1990년대까지 중의원 3분의 2 가량을 차지했다. 1.5체제는 ‘55년 체제’라는 말과 함께 일본 정치구도를 대표하는 용어다.
 

 


1.5체제 아래서는 야당의 여당 견제 구실이 무력해진다. 총리를 견제하는 것은 여당 내 계파 가 된다. 박근혜 계파가 이명박 대통령 발목을 잡는 상황은 우리 정치가 일본을 닮아간다는 증거다. 과거에도 정치 계파는 있었지만 특정 정치인의 이름을 딴 당이 만들어질 만큼 계파 정치가 공공연해진 것은 초유의 일이다.

한나라당을 자꾸 자민당과 비교하는 배경에는 ‘과연 한나라당이 자민당처럼 수십 년간 장기 집권할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깔려 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자민당 50년 집권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는 4월30일 발간된 잡지 〈시민과 세계〉에 일본 자민당 장기 집권 사례를 연구한 글을 실었다. 이 기고에서 김용복 경남대 정치언론학부 교수는 자민당 장기 집권 요인으로 ①자민당의 정책 능력과 지지동원 능력 ② 야당의 무능력과 분열 ③ 중선거구 제도를 꼽았다.

이 셋 가운데 선거구제 요인은 대통령제인 한국 상황과 잘 맞지 않지만, 첫째·둘째 요인은 우리 상황과 비견해볼 만하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전문위원은 “한국판 자민당이 출현하려면 한나라당이 자민당과 같은 위기관리 능력을 갖춰야 하고 대안 세력이 허약하다는 등의 조건이 따라야 한다. 이 중 대안 세력 부재는 우리 상황과 어울리지만 한나라당의 장기 집권 역량은 자민당과 차이가 난다”라고 말했다. 김용복 교수는 자민당의 지지 동원 능력에 대해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국민 통합에 노력했다. 환경정책이나 복지정책에서도 야당의 주장을 수용했다. 지지 기반을 확대하려고 애써 사회당 정책도 받아들였다”라고 분석했다.

주한 일본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정치 평론가들은 자민당을 카멜레온 정당이다고 칭한다. 환경 변화에 따라 자기 색깔을 수시로 바꾼다는 뜻이다. 자민당에 모여 있는 사람은 이념으로 뭉친다기보다 정치적 성공을 위해 모였다는 말도 있다. 자민당 안에는 다양한 사람이 섞여 있고 좌파에 가까운 인물도 있다. 국민 여론에 따라 정권 성격이 달라진다”라고 설명했다.

‘카멜레온 정당’ 자민당 모델을 한나라당이 따라갈 수 있을까. 요즘 한나라당은 예전보다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다. 지난 4월2일 홍사덕 친박연대 선대위원장은 CBS와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의 고진화 의원 제명 조처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예전 일본 자민당에는, 사회당이나 공산당 의원보다 더 좌파(정치가)가 있었다”라며 “당의 세는 넓을수록 좋은데, 굳이 제명할 필요가 있었나”라고 반문했다.

진보 지식인들은 한국판 자민당 시나리오에 부정적이다. 출판사 후마니타스 박상훈 주간은 “일본 자민당 집권은 일본의 모든 정당과 사회세력이 경합한 결과 총체적 합의에 의해 안착된 체제였다. 자민당이 의석 3분의 2를 차지할 때 투표율은 70%를 상회했다. 하지만 우리 경우는 낮은 투표율에서 보듯 냉소의 결과에 가깝다. 일본도 1.5체제가 무너지자 투표율이 60% 아래로 떨어졌다”라고 말했다.

 

 

ⓒReuters=Newsis자민당 출신인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대표(위)는 일본 정치 질서를 미국식 양당제로 재편하려 한다.

요즘 일본 자민당은 예전과 모습이 다르다. 일본 사회민주당 후쿠시마 미즈호 대표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자민당이 신자유주의 경향이 강해져 지방민·농민·여성·비정규직을 외면한다. 그래서 국민이 등을 돌렸고 지난해 참의원 선거 참패로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일본 헌법상 내각과 총리를 결정하는 중의원은 480석 중 자민당 306석, 민주당 113석이다. 하지만 참의원은 242석 가운데 자민당 83석, 민주당 109석으로 민주당이 더 많다. 자민당이 1당을 빼앗긴 것은 사상 처음이다.

"자민당은 카멜레온 정당"

이 때문에 장차 일본 정치가 일당 우위 체제에서 양당제로 변할 거라고 보는 학자가 많다. 서강대 국제관계학과 김세걸 교수는 “최근 일본이 소선거구제를 도입하면서 미국식 양당제로 가는 흐름이다. 좌우 대립 정당구도가 아니라, 다양한 지지층이 섞인 포괄정당 2개가 경쟁하는 구도로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부응하듯 민주당 오자와 이치로 대표는 ‘정권 교체가 가능한 양당 정치’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주장해왔다.

미국식 양당제는 한국 역시 익숙한 시나리오다. 미국식 양당제는 좌우 정당과 녹색당 등이 경쟁하는 유럽의 다당제와는 크게 다르다. 보수 2당이 대등하게 군림하는 속에 진보(좌파) 정당은 설 자리를 잃는다. 한국 정치가 일본을 닮는다는 말은 한나라당이 자민당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한국 좌파가 일본 좌파를 닮는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한때 일본 정치의 한 축이었던 일본 좌파 계열 정당은 현재 의석수 기준 3% 대로 추락했다. 진보,혁신 정당의 몰락이 우리와 닮은꼴이다. 지난 총선 결과 민주노동당은 5석으로 반토막 났고, 진보신당은 한 석도 못 건졌다. 의석수 기준으로 1.7%, 득표율로는 진보신당을 합쳐 8% 정도다. 2000년 0석에서 2004년 10석으로 세를 넓혔던 추세가 반전된 것이다. 한국 정치가 일본 정치를 닮아가는 게 아니라 한국·일본이 미국식 정치를 따라가는 형국이다.

한국은 본격적인 민주 정당 정치를 시작한 지 겨우 20년 남짓 된다. 지금 한국 정치는 구일본식 일당우위제, 미국식 양당제, 유럽식 다당제 중 어느 방향으로 발전해갈지 갈림길에 서 있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한 번 정치제도가 고착되면 50년이 지나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기자명 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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