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벗들 제공함경북도 청진시의 한 장마당 모습. 장마당 뒤로 가동이 중단된 김책제철소가 보인다.
지난 3월4일, 함경북도 청진시 수남구역에 사는 이충영씨(가명, 34세)는 둘째 아이를 들쳐 업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자꾸만 젖을 달라고 보채는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여주고는 점심 끼니를 거른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남 시장 관리소 앞에 벌써부터 진을 친 아주머니들 중에는 아는 얼굴이 여럿 보였다. 오후 1시가 넘어가자 어디서 오는지 여자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리씨는 며칠째 멀건 죽으로만 하루 한 끼니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라 몹시 허기진 상태에서 군중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평소 성을 낼 줄 모르는 유순한 그도 어제 그 일을 당하고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보안원과도 맞장 뜨는 괄괄한 금철이네가 가자고 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먼저 나설 판이었다.

젊은 여자 장사 못하게 나이를 제한한다고 할 때만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그였다. 금철이네가 그랬듯이 그도 청암구역에 사는 본가(친정) 어머니에게 수남시장으로 나와달라고 이미 부탁을 해둔 터였다. 자기가 옆에서 일러주면서 어머니더러 장사를 하게 하면 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여겼다.

청진시 주민 20% 굶주려

그런데 지난해 말 수남시장 관리소 소장이 대형 부정축재 건으로 걸리면서 시장 분위기가 확실히 뒤숭숭해졌다. 수남시장이 공화국에서 도매시장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다들 먹고살 만하게 된 데는 관리소장의 공이 컸다는 게 장사하는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어떤 사람은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이 없는데, 뒤로 좀 빼돌린 게 무슨 대수냐며 소장을 두둔하기도 했다. 하도 여론이 시끄러워지자 당국은 그의 죄상을 낱낱이 공개했고 결국 그는 공개 재판에서 노동교화형 13년형을 받고 해임됐다. 이때 시장관리소 소장부터 말단 관리원까지 모조리 물갈이됐다. 평양에서 특별히 파견된 사람으로 시장관리소 조직이 새로이 꾸려졌다. 이때만 해도 어수선하긴 했지만 자신과 별로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김책제철소에 다니는 남편은 새해 들어서도 벌써 몇 달째 빈손으로 왔다. 어찌된 일인지 경기는 점점 나빠졌다. 게다가 새로 구성된 시장관리원들은 상당히 빡빡한 인사였다. 툭하면 나이를 걸고 넘어졌다. 어머니를 옆에 대동한 것도 안 된다며 빨리 공장에 들어가라고 성화였다. 장사벌이도 영 신통치 않아 옥수수쌀 한두 주머니도 사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2월이 되자 쌀독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보릿고개를 생각하면 아끼고 또 아껴야 했다. 이씨는 통옥수수를 가루로 빻아 풀과 섞어 죽을 쑤었다. 본가 어머니의 이악스러움 덕분에 고난의 행군 때도 풀죽 한번 안 먹던 그였다. 서른 넘어 뒤늦게 시집와서 별의별 고생을 다하던 그가 결국에는 자기 자식 입에 풀죽을 넣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건 하루 전날인 3월3일, 젊은 여자를 더 이상 장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며 시장관리소에서 판매대를 모조리 없애버린 것이 일종의 도화선이었다. 판매대가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본 아주머니들의 눈에 파르르 불이 붙었다. 금철이네는 시장관리원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난리를 쳤다. 아무리 땅을 구르고 복장을 터뜨려도 꿈쩍 안 하는 것을 본 이씨는 그저 맥이 탁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괜히 서러운 눈물이 났다.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저게 우리집 식구 명줄인데’ 하고 웅얼거릴 뿐이었다. 아주머니들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이러다간 다 죽는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라고 입을 모았다.

ⓒ좋은벗들 제공장마당(시장) 내에 판매대가 없어 골목에서 중국제 과자류를 파는 할머니
3월4일 수남시장에 모인 인원만 수천명이 넘었다. 누구의 입소문을 탔는지 이씨 같은 여자가 그렇게나 많았다. 청암·포항·신암 등 다른 구역 시장에도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수천명씩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시장관리소 앞에서 “쌀을 달라” “장사를 못하게 하겠으면 배급을 달라” “이러다간 다 죽게 생겼다. 줄 쌀이 없으면 장사를 하게 해달라” “죽을 바엔 너 죽고 나죽고 해보자”라며 아우성을 쳤다.

이날 긴급히 열린 시전원회의에서 시노동국은 김책제철소를 비롯한 공장, 기업소 노동자 6만 세대가 굶고 있다고 발표했다. 한 세대를 3~4인 가족으로 보면 20만명이 넘는다. 100만 인구라고 하면 5분의 1이 공식적으로 굶는다는 소리다. 시당국은 “청진시는 노동자들에게 배급을 일절 주지 못하기 때문에, 세대주의 출근율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시장까지 막으면 모든 공장이 멈춰 서는 것은 둘째치고, 우선 많은 노동자가 굶어죽게 된다”라며 일단 중앙당의 방침이 내려오기 전까지 젊은 여성의 장사를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중앙당은 3월11일에야 비로소 시장 관리법상 나이 제한에 걸린 여성을 모두 공장, 기업소에 입직시킨다는 방침을 재차 확인했다. 청진시 사례가 다른 도시에 파급될 것을 염려해 신의주·함흥·평성·남포 등 다른 도시에서의 단속이 더욱 심해졌다.

지금까지 2008년 3월3~5일, 청진에서 일어난 사건을 재구성해보았다. 이 사건은 북한 식량 위기 징후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배급을 못 받게 되면서 공장에 나가지 않는 노동자가 점차 늘고 있다. 유일한 돈벌이는 여성들의 장사이다. 이마저 당국의 시장 단속으로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졌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물가는 오르기만 한다. 식량값 폭등은 가히 무서울 정도다. 지난해 이맘때 쌀 1kg당 800~850원 하던 것이 4월 현재 2500원으로 약 300% 이상 올랐다. 쌀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옥수수를 사 먹던 것도 더 이상 어렵게 됐다. 옥수수 1kg에 300~350원 하던 것이 1500~1700원으로, 지난해 쌀의 최고 가격만큼 올랐기 때문이다. 옥수수를 빻고 또 빻아 하루 한 끼니 풀죽을 쑤어 먹는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당국의 단속은 필연적으로 주민의 생존 의지와 부딪힐 수밖에 없다. 정치적 시위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은 낮지만, 우발적인 집단 소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전국 도처에 잠재해 있다.

집단 소요 사태 일어날 가능성

더욱 심각한 것은 비단 노동자와 장사하는 여자들에게 국한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 심각한 경우는 농민이다. 아무리 노동자들에게 먹을 것이 없어도 농민에게는 먹을 것이 있었다. 매년 식량가격 추이를 보면, 4월부터 가격이 오르기 시작해 6~7월 보릿고개를 고비로, 7~8월 감자, 옥수수가 나올 때쯤 일시 하락한다. 그러다 9월 말 가을 추수 직전에 가장 높았다가, 추수가 시작되는 10월부터 다시 하락한다. 11~12월에 식량가격이 가장 낮게 떨어지고, 다음 해 1~3월에는 비교적 안정된 가격대를 형성한다. 이때는 농민이 식량을 충분히 보유하는 시기다. 그런데 올해는 이 시기에 벌써 먹을 것이 떨어져 일을 못 나가겠다고 아우성이다. 황해남북도 곡창지대를 비롯해 강원도·자강도·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 등 평양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사실상 제2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는 소리가 나돈다.

지난 4~15일 ‘2008년 북한 식량 위기 진단과 대북 인도주의적 지원 원칙’이라는 주제로 평화재단에서 개최한 제20차 전문가 포럼에서, 전문가들은 현재 북한의 식량 상황이 1차 고난의 행군에 비견할 만큼 최악으로 치닫는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쌀값이 2500원, 심지어 2700원까지 오르는 상황이 한 달 이상 계속되면 앞으로 대규모 아사 사태를 피할 수 없으리라는 암울한 전망에도 공감대가 형성됐다. 현재 북한 정부에는 식량대란을 뚫을 만한 출구가 사실상 없다.

외부 환경도 최악이라고 할 만하다. 국제 곡물가격 상승 속에게 중국은 지난 1월 곡물 수출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1~2월 북한의 대중국 식량 수입은 예년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해관 무역 통계에 따르면 2007년도 1~2월 곡물 수입 478만7000달러에서 올해는 1836만1000달러로 껑충 뛰었다. 이렇게 수입량이 늘었으니 식량 사정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년 같으면 추수 뒤 1~2월에는 식량을 거의 수입하지 않았는데, 올해 이 시기에 벌써 들여온다는 것은 식량 부족이 연초부터 심각하다는 뜻이다.

ⓒ좋은벗들 제공손수레로 손님의 짐을 날라주는 짐꾼이 일거리가 없어 수레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권태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07년 가을 수확 이후 대중국 식량 수입량이 대폭 증가했으나, 국제 곡물가격의 상승에 따라 수입가격이 30% 이상 올랐다고 밝혔다. 아울러 올해 초부터 중국이 주요 식량에 대해 수출 쿼터제와 수출 관세 부과를 실시해 북한 정부의 식량 수입 부담이 더욱 커졌다. 북한이 중국에 대규모 식량 수입을 위한 수출 쿼터를 요청했으나, 중국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식량 50만t을 지원할 의사를 비쳤으나 이것이 실현될지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핵문제가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권태진 박사를 비롯한 북한 전문가들은 다행히 지원이 결정된다 하더라도 8월 이후라야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이 식량 분배 모니터링을 요구할 경우 식량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협의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굶어 죽느니 차라리 전쟁이라도...'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어떤가. 일부에서 의례적인 기 싸움에 들어갔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현재 남북한 관계는 긴장 국면의 연속이다. 물론 새 정부로서는 지난 10년간의 모든 대북 정책을 검증할 조정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의도적 무시인지 전략적 무시인지, 한국 정부는 현재 관망 중이다. 해마다 보내주던 비료도 올해는 먼저 요청하지 않으면 주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자존심 강한 북한이 응하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는 사실상 주지 않겠다는 의도로 읽힐 수밖에 없다. 지난 3월 김하중 통일부 장관과 김태영 군 합참의장 후보의 대북 발언, 이어지는 이명박 대통령의 통일부 업무보고 자리에서의 모두 발언 등은 북한 지도부의 신경을 상당히 자극했다.

ⓒ좋은벗들 제공장마당 안에 있는 판매대에서 중국제 생필품을 파는 아주머니.
한국 정부의 유연하지 못한 태도는 역설적으로 북한 정부의 내부 통제에 좋은 빌미를 제공했다. 북한 정부는 “이남이 우리 공화국과 무역 거래를 전면 중단하는 등 우리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여 우리를 정복하려고 한다. 이명박 반민족도당의 고약한 심보를 폭로하고 투쟁해야 한다”라고 연일 강도 높은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전 계층과 단위를 망라해 매일 비판 대회를 열어 인민에게 철저히 학습시키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로 사회가 불안해지자, 일부 국경지대에서는 “쌀값이 비싼 건 안기부 간첩의 작간이다”라고 선전하기도 한다. 매점매석을 통해 쌀값을 올리는 일부 돈주들을 안기부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는 등 남조선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는 분위기다. 일부 주민은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다. 차라리 전쟁이라도 콱 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익명을 요구한 중앙당의 한 고위 간부는 “몇 사람 싸움 때문에 죄 없는 백성만 죽어나가게 생겼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처지는 격이 되었다. 공화국이야 그렇다 치고, 남조선도 알고 보니 어느 것 하나 공화국보다 나은 게 없이 그저 둘 다 똑같다. 백성은 안중에 없고 서로 누가 더 잘났나 힘자랑하는 꼴이다. 검둥이와 까마귀 싸움이라 우리 민족의 앞날이 안 보인다. 도대체 누구를 믿고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남조선은 정말 우리 백성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거냐”라고 개탄했다. 한국 정부는 협상 대상자인 북한 지도부를 몰아세움으로써 책임을 북한 정부에 지우려 하지만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사실상 북한 민심을 잃어버릴 위험에 직면한 것은 바로 우리 쪽이다.

한국 정부에는 선택권이 있으나 북한 주민에게는 없다. 한국 정부는 지금이라도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식량을 조건 없이 지원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처럼 계속 북한 탓을 하며 모른 척 내버려둘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 주민은 생존권이 스스로에게 없다. 마지막 남은 희망은 남조선밖에 없다고 믿는 순진한 그들이다. 통일을 생각한다면 바로 지금이야말로 북한 민심을 사로잡을 절호의 기회다.

“지금 북한 식량 사정이 위기라면, 누가 먼저 요청하느냐, 이게 뭐 중요한가. 인도적 위기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하고 지원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북한 정부와 협상해야 한다. 북한 정부에 항구를 열라고 요구하자. 나진·청진·단천·신포·함흥·원산·해주·남포·신의주 등 배로 보낼 수 있는 곳에 몇 만t, 몇 십만 t씩 보내겠다고 제안하자. 강원도와 황해도는 육로로 보내겠다고 하자. 한국 정부가 쌀을 보낸다는 소식만으로 쌀값이 떨어지는 사회다. 만약 우리가 주겠다는데도 북한이 안 받겠다고 하면, 북한 주민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라고 한 법륜스님(평화재단 이사장)의 지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람도 살리고 민심도 얻고, 대북 협상의 주도권도 쥘 수 있는 일석삼조의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당장 인도주의적 자세에서 긴급 식량 지원을 제안하고 북한 당국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기자명 이승용 (사단법인 좋은벗들 사무총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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