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서 일한 지 10년, 헌책방을 연 지는 7년이다. 서울 은평구 응암동 골목길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하는 윤성근씨(38)는 어느 날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라는 낡은 책에서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 책 맨 뒷장에 그 책의 주인이라고 짐작되는 사람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던 것. 경남 마산에 사는 홍광식씨였다. 1974년에 남긴 글이었다. 주소까지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40년 전 메모를 토대로 주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윤성근씨(위)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하며 박원순 시장의 집무실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동사무소의 협조를 얻는 데 실패한 게 2년 전. 최근 다시 홍광식씨 찾기에 도전했다. 나이를 추측하고 활동 범위를 추적한 결과, 〈국제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홍씨는 부산지법 부장판사를 지낸 뒤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한창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스물다섯 때 썼던 메모를 그는 기억했다. 여전히 독서광이고 책에 메모를 즐기며 책 선물하기를 좋아했다. 홍씨를 만난 윤씨는 두 시간여 회고담을 들었다. 부친이 서점을 했는데 무슨 반항심이었는지 인근 경쟁 업체에서 종종 책을 사 읽었다는 일화도 전해 들었다.

책을 정리하다 보면 돈이 나올 때도 있고 낙엽이 발견될 때도 있다. 이름이 쓰인 책갈피도 그대로 끼워져 있다. 특히 자필 시가 많다. 선물할 때 쓰기도 하고, 자기 자신한테 쓸 때도 있다. 판매를 위해 책 상태를 기록하다 보니 읽게 됐다. 짧지만 진솔한 글이 많아 그냥 넘기기 아까웠다. 10년 전부터 조금씩 모았다. 책은 팔더라도 메모를 사진으로 남겼다. 그걸 모아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를 냈다.

윤씨의 말을 빌리면 그때의 청춘은 누구나 시인이었다. 좋아하는 시 몇 편쯤 욀 줄 알았고 노트 한 귀퉁이에, 아끼는 책 한구석에 자작시 몇 줄 부끄러움 없이 끄적일 줄 알았다. 그가 모은 메모에는 청춘의 흔적이 가득하다. 누군가는 장준하 선생의 책에 ‘진정한 애국이란 무엇이며,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이며, 진정한 진리 탐구는 무엇이며, 진정한 그 무엇은 무엇일까’라고 썼고 누군가는 ‘2004년 5월 어느 날, 학생회관에서.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에 대답할 수 없어서’라고 끄적였다. 윤씨는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시집에 누군가 자필로 쓴 글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성석제라는 이름을 한자로 써놨는데, 혹시 실제 소설가일까 싶어 눈여겨봤지만 아니었다. 메모가 시적이면서도 진지했다.

책과 삶이 공존하는 곳, 헌책방

헌책방.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는 이름이다. 윤씨의 헌책방은 아직 버틸 만하다. 초창기 문을 열었을 때보다 단골도 많아졌다. 북적이는 정도는 아니지만, 자주 찾는 사람들이 고맙다. 윤씨는 V자형 서가가 있는 박원순 서울시장 집무실을 디자인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일본 만화와 드라마 중에 〈비브리아 고서당의 사건수첩〉이라는 작품이 있다. 오래된 서점을 배경으로 한 추리극이다. 극중 고서당에서 고서는 상당히 귀한 대접을 받는다. 윤씨 역시 드라마를 재밌게 봤다. 일본 사람들은 책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르다 보니 그런 이야기가 가능한 것 같다. 우리나라는 일본만큼 진지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게 그의 평이다. 책을 정보 습득 용도로만 여기는 게 아니라 삶과 함께하는 거라 여겼으면 좋겠다.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곳이 헌책방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엔 대형 온라인 서점에서 헌책방을 운영해 타격을 입었다. 매장에 와서도 스마트폰으로 그곳과 가격을 비교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쓰럽다. 

책에 등장하는 메모의 실제 주인공은 대개 중년이 되었다. 그들에겐 헌책 속 메모가 반가움이고, 열정적인 시절에 대한 회고다. 10~20대에게는 겨우 20여 년 전에 이런 감수성의 시대가 있었다는 걸 알려준다. 휘발성 짙고 진지하기 어려운 시대에 권할 만하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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