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멸렬하네요. 예술이 어떻게 삶을 이길 수 있겠어요.” 김노암 예술감독이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중얼거리며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먹구름 아래 나부끼는 깃발 수십 개가 정지된 화면에 담겼다. 6월12일 오전, 가는 빗줄기가 뿌리는 서울역 앞은 ‘2013 전국노점상대회’에 모인 ‘붉은 머리띠’ 인파로 붐볐다. 옛 서울역사 앞 광장이다. 옛 서울역사는 재작년 8월,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284’로 재탄생했다. 이렇게 큰 집회가 있을 때면 4분의 1 이상 관람객이 줄어든다. 비까지 오면 절반 수준. 전시를 둘러보는 동안 바깥에서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가 작품의 여백을 메웠다. 어떻게 예술이 삶을 이기겠느냐는 물음이 실감났다. 나부끼는 전노련 깃발 사이, 새 전시를 알리는 현수막도 함께 펄럭였다.

지금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리는 기획전은 〈대중의 새 발견〉이다. 올해 열리는 ‘새 발견 3부작’ 중 하나다. 지난 전시 〈여가의 새 발견〉은 캠핑·레저·수집 등 현대인의 취미 생활을 실내로 옮겨왔다. 여러 수집가들이 모은 스타벅스 텀블러, 코카콜라 병, 모형 군용전차, 레고 등 대형 컬렉션은 오타쿠 문화를 재조명했다.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져 연장 전시를 했다. 연말에는 〈근대의 새 발견〉을 열 계획이다.

ⓒ시사IN 조남진김노암 ‘문화역서울284’ 예술감독이 전시장에 서 있다. 안쪽에 강영민 작가가 만든 기구가 보인다.

‘새 발견’ 시리즈 모두 공통적으로 대중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서울역이라는 공간이 가진 상징성 때문이다. 누구나 찾을 수 있도록 전시장의 문턱을 낮췄다. 실제 전시장에는 오전부터 곧 귀환을 앞둔 군인, 퇴직한 장년층, 대학생 등 다양한 사람이 오갔다. KTX 신역사가 개통된 후 문을 닫은 지상 2층, 지하 1층짜리 기차역을 1925년 준공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총알 자국이 박힌 6·25전쟁의 흔적은 그대로 두고 대합실·귀빈실 등의 분위기를 재현했다. 개관 이후에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일상을 이야기한 〈인생사용법〉, 무성영화에 변사의 목소리를 얹은 〈청춘의 십자로〉 등 어렵지 않게 다가갈 만한 전시와 공연, 강연을 선보여왔다.

5개월 전 이곳에 부임한 김노암 상임 예술감독이 전시 큐레이터로 일한 지는 15년째다. 서울프린지 페스티벌, 헤이리 판페스티벌, KT&G 상상마당 등에서 기획자 및 전시감독으로 있으면서 대안공간 스페이스 휴를 운영한다. 그에게 서울역은 기획자로서 욕심나는 공간이었다. 일단 규모가 크고, 공간이 갖는 권위가 있었다. 서울역이라는 장소가 주는 압도적인 정체성이 있다. 이는 전시 기획의 방향에도 영향을 준다. “월요일마다 역 앞 광장에선 통일교 신도들이 집회를 연다. 통일교의 성지로 알고 있다. 과거엔 시골에서 상경하는 이들의 성공과 야욕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근대의 명암이 교차하는 곳으로, 물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국 사회의 축소판 같은 곳이다. 그래서 대중이 탄생하는 장소로 봤다.”

대중문화의 형식 고민해온 작가들

‘대중’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낡은 이름이 되었다. 시민이나 다중 등 대체하는 이름이 많다. 특히 시민은 너무 많이 소비되어 진부해졌다. 그래도 다시 ‘대중’으로 돌아갔다.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나 깊이 있는 인식이 아직 제대로 이뤄진 것 같지 않아서다. 재발견이 아니라 새 발견인 이유는 이전에 발견된 적 없는 미술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얼핏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은’ 작품을 모았다. 민병직 기획자는 “대중 개념의 등장은 근대의 시작과 함께였다. 익명의 사람들이 특정한 공간에서 공통의 생활감각을 공유하고 유사한 행동양식을 보이며 살아가게 된 건 사실상 근대에 나타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근대와 대중의 관계를 설명한다. 한국의 대표적 근대 공간인 서울역이 대중에 주목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의미다.

이번 전시에는 개인 24명과 그룹 한 팀이 참가했다. 10년 이상 대중문화의 형식과 내러티브를 고민해온 작가를 초청했다고 김 감독은 귀띔한다. 설치, 애니메이션, 그래피티, 회화, 커뮤니티 아트 등 형식이 다양하다. 가장 친숙할 만한 작가는 팝아티스트 강영민과 낸시랭이다. 최근 낸시랭과 함께 팝아트 투어를 다니는 강영민 작가는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 베스트 저장소’의 공적이 되어 신상 정보가 털리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 ‘조는 하트’ 캐릭터를 이용해 만국기를 기구 형태로 설치했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영감을 얻어 평화를 표현한 것. 낸시랭은 이건희 삼성 회장,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 유명 인사의 초상화에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고양이를 얹었다.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천성길의 ‘냉장고에 들어간 코끼리’, 낸시랭의 ‘이건희 회장 초상화’, 왕치의 막대사탕 퍼포먼스.

요셉보이스 계열의 윤진섭 작가는 1970년대 이후부터 해온 자신의 퍼포먼스 이력을 전시했다. 매일 혈당을 체크할 때 묻은 솜의 피, 손톱·발톱의 모음에 이어 작품에 똥칠까지 했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지웠다. 김지훈 작가는 피를 뽑아 물감으로 만들어 앤디 워홀, 마이클 잭슨을 그렸다. 매혈을 해서라도 성공하려는 욕망 사회를 은유한다. 동양화를 전공한 권기수 작가는 ‘동구리’라는 캐릭터를 이용해 현대판 죽림칠현(竹林七賢)을 표현했다. 삶의 다양한 모습과 실현 불가능한 이상향에 대한 미련을 컬러 풍선 숲으로 만들었다. 가장 젊은 그룹인 MOD는 공주대 만화학부 대학원 출신의 실험 애니메이션 그룹이다. 1990~2000년대에 대중문화를 체험한 이들은 다른 작가들보다 ‘근대성’에 대한 부담과 집착이 덜하다. 이 외에도 권오상 김준 김창겸 김태진 라선영 이현진 윤현선 이기일 이동환 이준형 전미래 전수현 천성길 최경우 난나 최현주 후디니 반달 코마 등의 작가가 참여했다. 전시는 7월14일까지 열린다.

전시의 20~30%는 한국의 팝아트(대중미술)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팝아트 계열로 분류되기를 꺼리는 작가도 적지 않다. 김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1950년대 전후로 등장한 팝아트는 원래 실험적이고 냉소적인 동시에 세련된 정치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 한국 사회에 수용된 팝아트는 그 뉘앙스를 삭제한 채 장식적이며 유희적인 것만 남기게 되었다. 다소 제한적으로 쓰이는 것. 하지만 팝아트와 별개로 팝의 감성은 대부분 현대 미술가들의 의식을 관통한다. 작가 스스로 대중이고, 대중문화의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를 단지 소재로만 활용하는 경향도 옅어졌다. 그 와중에 검찰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백설공주에 빗대어 포스터를 그린 팝아트 작가 이하씨를 기소했다.

사적 제284호 서울역은 대중적이다. ‘소설가 구보씨’는 경성역 3등 대합실에서 유랑민·지게꾼과 만났다. 지난 시절, 농민·노동자·학생은 띠를 두르고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근엄하다. 그 세월에 압도당하지 않는 재기발랄한 작가와 관객이 옛 역사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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