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가가린(위)은 40년 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었다. 사고 원인은 1급 비밀에 부쳐졌다.
2008년 4월8일 한국 최초의 우주인 탄생을 계기로 러시아 우주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4월은 러시아 우주 개발 역사에 의미있는 달이다. 1961년 4월12일 당시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 우주선에 승선해 1시간29분 만에 최초로 지구궤도를 돌았다. 아울러 올해는 가가린 40주기를 맞은 해이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그의 사망 원인을 두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은 러시아 영웅이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미소로 세계를 매료시켰던 그는 1968년 3월27일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었다. 사망 직전까지 가가린은 ‘달 탐사 프로젝트’ 요원으로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날 오전 10시 동료 비행사 블라디미르 세레긴과 함께 ‘스파르카’(Mig-15) 훈련 비행기에 탑승했으나 예정된 오후 5시 언론 인터뷰 현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다.

최근 러시아 언론이 가가린 사망 원인에 의혹을 제기하는 이유는 베테랑 조종사인 그의 사고·사망과 관련해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가가린의 여조카인 타마라 필라토바는 러시아 주간지 〈논쟁과 사실〉 2008-13호 인터뷰에서, 사고 직전 만남을 회고하면서 “그(가가린)는 닥쳐올 재앙을 예감했음을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집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가가린은 작별을 못내 아쉬워하며 돌렸던 발걸음을 다시금 돌이키길 반복했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무엇보다 가가린 사고 직후 소련 당국이 사고 원인에 대해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사고와 관련된 일체의 사항을 ‘1급 비밀’로 부쳐 기밀 문서함에 보관한 것이 의혹을 부채질했다. 사고 전투기 잔해는 밀봉·보관했다.
1980년대 그의 사인 규명 조사가 최초로 이루어졌다. 당시 조사단은 비행기가 회전·급강하하면서 지상에서 폭발했다고 발표했다. 그 원인으로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으로 비행기가 기상관측용 기구와 충돌했거나, 상공에 구름이 짙게 끼어 지상으로 급강하했다가 다시 상승하지 못하고 추락했을 가능성, 그리고 다른 비행기가 근접하자 이를 피하려다 중심을 잃고 추락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가가린은 우주 비행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권력개입설도 꾸준히 나온다. 즉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 국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가가린을 시샘해 죽였다는 주장이다. 결국 질투가 화근이라는 얘기다. 나아가, 1990년대에는 권력음모설도 등장했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가가린의 우주 비행 자체가 소련 정부가 조작한 허구였다는 주장이다. 냉전 시대 미국과의 우주 탐사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최초 우주인 가가린 신화를 조작했고, 이 비밀을 은폐하기 위해 그들을 의도적으로 살해했다는 것이다.

인터넷 통신사 리아 노보스티의 알렉산드르 페스랴크의 논설위원은 정부가 가가린 사망 원인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사인을 밝혀줄 비밀 문건을 공개하라는 것이다. 이제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기밀함 문건을 세간에 공개해 사인을 분명히 밝혀주고 가가린의 명예를 회복해주자는 주장이다.

사인은 차치하고도 가가린은 이데올로기 선전의 희생양으로 간주할 수 있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 미국과 소련은 우주 탐사 경쟁을 치열하게 벌였다. 체제의 우월성을 우주과학으로 선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누가 먼저 지구궤도를 개척하느냐를 놓고 자본주의·사회주의 양 체제가 경쟁했다.

이 우주과학 경쟁에서 소련이 먼저 개가를 올렸다. 1957년 최초로 생물체(개·쥐 등)를 태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지구궤도상에 띄운 소련은 1961년 유인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이와 동시에 최초의 우주비행사 가가린은 27세의 나이에 일약 전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추앙받는 우상이자 스타로 주목되었다.

ⓒReuters=Newsis3월19일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씨(왼쪽)가 우주선을 함께 탈 러시아 동료 2명과 함께 모스크바 크렘린에 있는 유리 가가린 묘지에 헌화하러 가고 있다.
하지만 가가린은 정치 이데올로기의 홍보물이었다. 권력층은 최초 우주 비행이라는 과학 성과를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선전해 민중을 단합하고 체제를 공고히 하는 정치 도구로 활용했다. 우주 비행에 성공한 다음 날 권력의 상징인 붉은 광장에서는 ‘최초 우주인과의 만남’이라는 행사가 개최되었고, 운집한 수많은 인파는 “가가린!” “우주는 우리 것!”이라고 구호를 외치며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확인했다. 또 행사는 텔레비전으로 생방송돼 수백만 국민이 시청했다. 정부는 우주 비행에 성공한 4월12일을 ‘우주인의 날’로 선포하고 우표·배지·휘장 등 각종 기념품을 제작·판매했다.
 
소련, 가가린을 정치 선전에 이용

우주 비행에 성공한 직후 가가린은 크렘린으로 직행해서 흐루시초프 당시 서기장을 면담했다. 나아가 소련 홍보대사 격으로 서방 각국을 차례로 순방했다. 과학기술이 어떻게 정치에 이용되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가 ‘가가린 영웅 만들기’였다. 최근 러시아에 번진 가가린 음모론은 이런 영웅 만들기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다.

가가린은 사망과 함께 전설적 인물로 남았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으로 선발된 고산씨와 이소연씨가 훈련을 받은 곳도 그의 이름을 딴 가가린 우주센터다. 또 가가린이 태어난 그자츠크 마을은 그의 사망 직후 가가린이라 명명되었다. 아울러 모스크바 레닌 대로에는 비행기 3대 분량의 티타늄을 녹여 만든 거대한 가가린 동상이 건립되었다. 러시아 기술을 빌려 한국 최초로 탄생한 우주인도 한국에서 영웅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냉전시대의 영웅과는 다르지만 과학과 정치가 만나는 그 접점에 우주 개발 기술이 있다.

기자명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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