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봉’으로 시작해 ‘멘붕’으로 끝냈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은 한국 정상외교 사상 초유의 스캔들로 청와대와 여당을 ‘집단 멘탈 붕괴’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

윤 전 대변인의 워싱턴 DC 성추문 의혹이 터진 5월10일 하루 동안 청와대는 입을 닫았다. 새누리당은 옹호해주지 않았다. 앞장서서 격한 논평을 쏟아냈다. 새누리당 민현주 대변인은 “부적절한 행동과 처신에 강한 유감을 표명한다”라고 논평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첫 미국 방문 외교는 ‘윤창중 성추문’에 휩쓸려 잊히다시피 했다.

오후에 약간의 기류 변화가 감지되기는 했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오전 논평이 좀 세게 나간 것 같더라”라고 한 발짝 후퇴했다. 국내로 돌아온 윤 전 대변인이 “술은 마셨지만 추행은 없었다”라고 해명하면서, 책임론에서 진상규명론으로 일단 논점 전환을 시도했다.
 

ⓒ뉴시스 지난해 12월27일 윤창중 당시 인수위 수석대변인이 인수위 인선 명단을 “나도 지금 본다”라며 밀봉 봉투에서 꺼내고 있다.

하지만 새누리당 안에서는 청와대 체면을 생각한다고 ‘물타기’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더 많아 보인다. 일회성 해프닝으로 정리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하는 기류도 있지만, 이마저도 어느 정도는 한국 정부의 통제 밖에 있는 문제다. 미국 국내 여론과 수사 결과에 따라 이슈가 장기화될 가능성도 있다(14~16쪽 기사 참조).

윤 전 대변인이 언론인 시절 쓴 예전 칼럼도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2006년 4월 〈문화일보〉 칼럼에서 그는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말을 단순히 옮기는 입이 아니라, 대통령과 정권의 수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얼굴이고 분신이다”라고 썼다. 이 말은 고스란히 “박근혜 대통령과 정권의 수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윤창중”이라는 야유로 돌아왔다.

언론 대응보다 충성 과시에 더 공들여

이 ‘대형 사고’의 뿌리는 어디일까. 윤 전 대변인은 박근혜 정부의 ‘잘못 끼운 첫 단추’였다. 박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첫 번째 인사로 발탁한 윤 전 대변인은 시작부터 거센 논란에 휩싸였다. 극우적인 성향, 좌우를 막론하고 썩 호의적이지 않았던 업계의 평판, 정치권과 언론을 오락가락한 이력 등이 두루 문제가 되었다. 야당은 물론 여당 일부와 보수 언론에서도 재검토 의견이 나왔다. 몇몇 인터넷 언론과 극우 성향의 인터넷 사이트 정도를 제외하고는 부정적 기류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박 당선자는 인수위에 이어 청와대까지 그를 데리고 가면서 힘을 실어주었다.

윤 전 대변인은 본연의 업무인 언론 대응보다도, 대통령을 향한 충성 과시에 더 공을 들인다는 평을 들었다. 윤 전 대변인은 지난해 12월27일 인수위원장 등 인수위 인선 명단을 “나도 지금 본다”라며 밀봉 봉투에서 꺼내 읽는 퍼포먼스로 단숨에 화제에 올랐다. 박근혜 정부에 ‘밀봉 정권’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대변인은 인선의 의미와 배경까지 취재기자들에게 안내할 수 있도록 미리 맥락을 숙지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윤 전 대변인은 도리어 ‘밀봉’을 자랑 삼아 내세웠다.

이번 박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도 윤 전 대변인과 김행 대변인이 ‘수행 경쟁’을 벌이는 것 아니냐는 말이 청와대에서 나오기도 했다. 한때 두 대변인이 모두 국내 언론 대응을 버리고 해외 순방을 따라 나서기로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나왔다가, 결국 김행 대변인이 국내에 남는 것으로 교통정리가 되었다. 대변인들이 언론 대응보다 충성 경쟁에 더 열을 올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여당에서도 나온다.

왜 그럴까. 인사권자의 성향이 충성 경쟁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어떤 촉새가 나불거려 가지고”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비대위원 명단이 몇몇 언론에 미리 풀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청와대 입성 이후, 박 대통령의 ‘메시지 통일’ 요구는 더욱 잦아졌다. 남북 대치 국면에서 외교안보 라인이 여러 차례 질책을 받았고, 조원동 경제수석도 혼이 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런 박 대통령의 성향을 잘 아는 공보 라인은 ‘백그라운드 브리핑’보다는 공식 견해만을 철저히 되풀이하게 된다. 박 대통령이 당내 비주류 대선 주자이던 시절 대변인 격이었던 이정현 당시 국회의원이 대표 사례다. 사석에서도 박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말을 하는 법이 없었던 그는 박근혜 정부 초대 정무수석이 되었다. 정무수석을 여당 지도부와 ‘격’을 맞춰주는 관례를 깬 파격이었다.

윤창중 전 대변인도 ‘밀봉’과 “발표된 대로 쓰시면 된다”(인수위 시절 입버릇)로 상징되는 ‘취재 안 되는’ 대변인이었다. 인사권자의 의중을 정확히 읽은 셈이다. 대변인으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거센 논란을 몰고 다녔지만, 박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인수위가 끝난 후 그를 청와대에 재발탁했다.

함량 미달 인사들도 고위직 노리는 구조

숱한 반대를 무시하고 윤 전 대변인을 발탁한 이상, 박 대통령도 이번 사태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청와대와 여권이 가장 걱정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5월10일 오후 “윤창중 파문은 인사 문제로 보기보다는 개인의 처신 문제다”라고 말했다. 인사권자인 대통령으로 불똥이 튀는 것을 막겠다는 의중이 읽힌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숱한 비판을 무시하고 윤창중 카드를 두 번이나 중용한 기억이 아직 생생한 터라 이런 ‘꼬리 자르기’가 제대로 먹힐지는 미지수다.

충성심을 높이 사고 보안 유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박근혜식 인사 스타일은, 공개 검증에서 충분히 걸러낼 수 있는 문제를 놓쳐버리는 인사 실패로 이어진다. 인사에서 ‘충성심’이 과대평가되고, 함량 미달의 인사들도 ‘충성 경쟁’을 통해 고위직을 노리기 쉬운 구조가 된다.

윤창중 전 대변인의 시작과 끝이었던 ‘밀봉’과 ‘멘붕’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밀봉’으로 상징되는 보안 강조와 충성 경쟁은 인사 과정에서 다른 요소를 압도할 만큼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덕분에 청와대 전체를 ‘멘붕’에 빠뜨릴 다른 위험 요소는 과소평가되었다. 진보와 보수가 거의 한목소리로 ‘윤창중 카드가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밀봉’은 그렇게 ‘멘붕’으로 돌아왔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