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P프랑스의 전직 교사 샹탈 세비르(사진)와 벨기에의 유명 작가 위고 클라우스는 모두 안락사를 택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죽음의 양상’은 달랐다.

지난 3월19일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소도시 디종에서 전직 교사 샹탈 세비르 씨(52)가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같은 날 벨기에 앤트워프의 미델하임 병원에서 유명 문학가 위고 클라우스 씨(78)가 죽었다. 생전 서로 공통점이 없는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은 죽음을 통해 유럽 사회에 ‘안락사 합법화’를 외쳤다.

세비르의 죽음이 프랑스 사회에 충격을 준 이유는 그녀가 죽기 직전까지 언론과 인터뷰하며 뉴스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슬하에 세 아이를 둔 세비르는 8년 전부터 코(비강) 부위가 부풀어 오르고 얼굴이 기형적으로 변하는 악성 종양을 앓아왔다. 후신경모세포종이라는 질환으로 치료가 불가능했다. 세비르는 병세가 심해지면서 미각 등 몸의 감각을 잃고 지난해에는 시력마저 상실했다.

세비르는 고통 속에 사느니 편안한 죽음이 낫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평소 “마치 파티를 하는 것처럼 집 침대에서 가족·친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새벽까지 잠들다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프랑스 법률은 안락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 죽을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관련 법규를 개정해 달라고 호소했다.

세비르의 탄원은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어느새 그녀는 ‘안락사 시민운동가’가 되었다. 특히 3월17일 디종 지방 최고법원이 그녀가 신청한 안락사 허용 요청을 기각하자 르몽드 등 유수 언론은 앞 다투어 그녀의 목소리를 전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안락사를 받기 위해 외국으로 갈 생각이라고 했다. 유럽에서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는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스위스다.  세비르는 3월18일 인터뷰 때는 스위스로 가겠다고 말했다. 스위스는 안락사에 가장 개방적인 나라다. 스위스는 ‘안락사(Euthanasia)라는 단어 대신 ‘도움 자살’(Assisted Suicide)이라는 말을 쓴다. 여기서는 의사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환자의 자살을 도와줄 수 있다. 1998년 이래 안락사를 희망한 외국인 700명이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AP Photo프랑스의 전직 교사 샹탈 세비르와 벨기에의 유명 작가 위고 클라우스(위)는 모두 안락사를 택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죽음의 양상’은 달랐다.

하지만 이미 안락사 시민운동가가 된 세비르가 프랑스를 떠나 외국에서 안락사하는 것에 부정적 의견도 있었다. 네덜란드 시민단체 ‘죽을 수 있는 권리’ 의장 로브 장퀴에르 씨는 3월18일 네덜란드 국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세비르가 스위스로 떠나는 것을 이해하지만 세상에 남은 안락사 희망자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세비르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안락사를 희망하는 프랑스인은 스위스로 가면 된다’는 식으로 문제가 정리된다면, 프랑스 정부와 의회는 자국의 법률을 고쳐야 할 압력에서 벗어나게 된다”라고 말했다.

“미성년자에게도 안락사할 권리 줘라”

세비르가 이 방송을 들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녀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법원 기각 발표가 있은 이틀 뒤인 3월19일 죽은 것이다. 프랑스 경찰은 ‘자연사는 아니다’라고 말했을 뿐 현재까지 정확한 사인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그녀가 죽을 때 방 안에 가족이 있었는지 여부에도 답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세비르의 선택이 헛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비르 사망 이후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내각에 안락사와 관련한 법률을 정비할 필요가 있는지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가톨릭 지도자가 완강하게 반대하는데도 안락사 지지 여론은 높아졌다.

우여곡절 속에 생을 마감한 세비르와는 달리 위고 클라우스의 죽음은 훨씬 당당했다. 클라우스는 병원 의사에게 안락사를 정식으로 요청해 벨기에 법률에 따라 편안히 죽음을 맞았다. 벨기에 현지 언론은 ‘용기’ ‘존엄’이라는 표현으로 그의 선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클라우스는 지난해 가장 유력한 노벨상 후보 5인에 꼽힌 문학가다. 클라우스의 친구들은 그가 왕성히 활동하던 알츠하이머병 초기 시절부터 이미 안락사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벨기에의 안락사 지지 시민단체 회장인 재클린 헤레만은 “그의 선택 덕분에 안락사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벨기에는 2002년부터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안락사를 위해서는 환자 의식이 또렷할 것, 환자가 적극적이고 반복적으로 요구할 것 따위의 조건이 있다.
 

ⓒAFP3월17일 법원이 세비르의 안락사 허용 신청을 기각하자 세비르의 변호사(위)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클라우스의 죽음은 지난 9개월 동안 정치 혼란 끝에 지난주 집권한 신생 여당에 새로운 과제를 던져줬다. 벨기에 진보당 지도자인 바트 톰멜레인이 클라우스의 죽음을 계기로 안락사 허용 범위를 넓히자는 법안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톰멜레인은 “현행 18세 이하 환자의 안락사 금지 조항을 폐지하자”라고 주장했다. 미성년자도 불치병을 앓을 경우 안락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벨기에 가톨릭의 수장 다니엘 추기경은 부활절 예배 설교에서 “고통을 회피하는 것은 결코 용기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죽음과 고통에 맞서 싸우지 못해서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클라우스의 안락사 결정을 ‘용기’라 평가하는 벨기에 언론을 비판한 것이다. 벨기에에서는 매달 40건에 가까운 안락사가 이뤄지는데, 실제 보고되지 않는 안락사는 두 배 정도 될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에서는 아직 안락사 관련 법안이 정비되지 않았다. 2007년 7월 서울중앙지검은 말기 간암 환자의 산소호흡기를 떼 ‘소극적 안락사’를 집행한 의사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린 적이 있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 때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존엄사 보존법’ 제정을 주장했다. 지난 2월16일 서울신문이 보건복지부가 ‘소극적 안락사’를 연내 허용할 것이라고 보도했으나 보건복지부는 ‘적극적 안락사’는 물론 ‘소극적 안락사’도 반대한다는 것이 정부 방침이라고 해명했다. 한국에서 안락사 문제가 이슈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판 세비르’가 나와야 할지도 모른다.

기자명 파리·표광민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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