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시대 상황에 비추어 피고인이 고문 행위에 가담하게 된 경위에 어느 정도 참작할 만한 사정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중략) 그 위법 행위가 지극히 조직적이고 억압적이고 비도덕적이어서 그 불법성이 중대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것인데, 피고인이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지 아니하고 이 사건 각 범행을 부인하고 있는 점 등을 종합하면 그 행위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을 함이 마땅하다.”

지난 10월11일 서울남부지법 형사11부. 김기영 부장판사가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법정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공직선거법 위반 징역 3개월, 무고·위증죄 징역 1년. 도합 1년3개월의 실형이 선고되자 피고석에 앉아 있던 추재엽 양천구청장(57)의 표정도 굳어졌다. 재판정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옆 사람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던 그였다. 판사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습니까?” 몇 초간 침묵하던 추 구청장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가혹하십니다.” 이 말을 끝으로 그는 법정 구속됐다.

 

 

‘3선 구청장에서 고문 전과자로.’ 이번 사건은 고문 전력과 관련해 현직 단체장이 실형을 선고받은 최초의 판결이라는 점 외에 고문 가해자와 피해자 간 갈등이 엄존함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남영동〉은 2012년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던 것이다.

추재엽 구청장이 연루된 고문 사건은 〈남영동〉과 같은 해인 1985년 벌어졌다. 김근태 전 의원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되기 석 달 전인 1985년 6월, 보안사 장지동 분실에는 유지길씨(당시 43세)라는 재일동포 사업가가 북한 밀입국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된다. 보안사 수사5계가 유씨 사건을 담당했는데, 추 구청장은 당시 6급 군무원으로 5계에 재직 중이었다.

선거 과정에서 불거진 추재엽 고문사건

박원순 서울시장이 인권 변호사 시절 고문의 역사를 연구해 집대성한 〈야만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1985년은 전두환 정권 출범 이후 간첩 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한 해(26건)로 기록된다.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면서 정권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높아지던 시기다. 치안본부·안기부 등이 민주화 관련 인사들을 연행·고문해 국가보안법으로 얽어매며 정권 보위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그 선봉에 선 것이 보안사였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보안사령관 출신인 만큼 당대의 보안사는 거칠 것이 없었다.

특히 보안사에서 대거 양산한 것이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이었다. 북한에 일가친척을 둔 경우가 많은 데다, 일본에서 살아 남북의 경계가 희미한 재일동포는 간첩으로 조작하기 쉬운 가장 좋은 먹잇감이기도 했다. 이령경 릿쿄 대학 강사에 따르면 1970~1980년대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가 2012년 5월 현재 재심이 진행 중이거나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모두 22명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에서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으로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씨에 따르면 이 22건 중 1980년대 벌어진 7건의 경우 안기부나 경찰이 담당한 사건은 한 건도 없다. 모두 보안사 관할이다. 이씨는 이에 대해 “민간인을 수사할 권한이 없는 보안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음을 증명한다”라고 말했다. 유지길씨 사건도 바로 이 시기 벌어졌다.

 

 

이 사건이 추재엽 구청장과 관련해 새삼 불거진 경위가 흥미롭다. 추 구청장의 고문 전력이 표면에 불거진 것은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이제학 후보가 이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였다. 이 후보는 양천구청장에 당선됐으나 그로부터 불과 1년 뒤 구청장 직에서 물러난다. 선거 기간 ‘추재엽씨가 보안사 근무 시절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를 간첩으로 조작하려는 고문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가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당선 무효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당시 추씨는 “신영복 교수가 고문받을 당시 나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불과했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 뒤 치러진 2011년 10·26 재선거에서 추재엽씨는 구청장에 다시 당선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새누리당 당적도 회복했다(추씨는 2006년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해 왔다). 박근혜 후보가 당시 추씨를 위한 지원 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3선에 성공한 추 구청장 앞에는 탄탄대로가 열린 듯했다. 그러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거 직전 추씨가 〈보안사〉 저자인 김병진씨를 고발한 것이 자승자박이 됐다. 재일동포 3세로 1983년 모국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보안사 조사를 받았던 김병진씨는 그 뒤 보안사에 6급 군무원으로 특채돼 1984~ 1985년 일본어 번역·통역 업무를 맡았던 인물이다(32~33쪽 인터뷰 기사 참조).

 

유지길씨 사건 당시 김병진씨는 한국어를 전혀 모르던 유씨를 위해 통역으로 투입되어 조사 과정 전반을 지켜보았다. 2010년 진화위는 보안사가 유씨에게 잠을 재우지 않고 집단 구타를 하는 고문 외에 이른바 ‘엘리베이터실 고문’ ‘전기고문’ ‘소금밥 먹이기 고문’ 등을 행한 결과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고 확인했다. 김병진씨가 〈보안사〉에서 기술한 내용과 대부분 일치했다. 이 중 추재엽씨는 ‘인간 바비큐 물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책에 묘사돼 있다.

가해자는 부인, 떠넘기기, 자기 합리화

“유지길씨는 꿇어앉은 모습으로 두 손발이 포승으로 꽁꽁 묶였다. 팔과 무릎 사이의 얼마 안 되는 틈새에 쉽게 부러지지 않을 각목이 끼워지고 그 나무의 양끝을 들어올려 두 철제 책상에 놓았다. (중략) 유지길씨의 몸은 등이 아래로 처진 모습으로 공중에 매달렸다. 얼굴은 머리가 뒤로 젖혀지고 입이 위에 있었다. 추재엽이 젖은 손수건으로 코에서 눈까지를 덮었다. 공기를 마실 구멍이란 입 밖에 남지 않았다. ‘불어라 불어’ ‘항복해!’ 사나이들의 욕설이 한층 더 높아졌다. 추재엽이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최후의 구멍에 새빨간 물이 부어졌다…. 나는 이 광경을 더 이상은 쓸 수 없다….”

추재엽씨는 이것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간첩죄로 체포되었다가 동료를 밀고한 공으로 처벌을 면했던 재일동포 3세 김병진’이 터무니없는 허위 사실을 살포하고 있다는 문자 메시지도 유권자들에게 대량 발송했다. 이에 맞서 김병진씨도 추씨를 무고·위증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검찰은 이를 받아들여 지난 4월 추씨를 기소했다.

진실 게임은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됐다. 첫째는 부인 단계. 이제학씨 재판 증인으로 채택된 추씨는 “유지길을 직접 고문한 적도 없고, 고문 현장에 참여한 적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1985년 당시 추씨와 함께 근무했던 보안사 수사관들도 “고문은 없었다”라고 입을 모았다. 당시 수사과장이던 박호순씨 외에 수사관 6명이 추씨를 위한 탄원서에 이름을 올렸다.

두 번째는 떠넘기기. 재판부는 고문이 없었다는 이들의 진술이 서로 어긋남을 지적하며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들 수사관은 유지길씨에 대한 조사가 있었음을 시인하면서도 각자 ‘외근 중이었다’ ‘파견교육 중이었다’는 식으로 면피하기 바빴다. ‘수사5계 전원이 장지동 분실에서 합숙하며 유지길을 조사했다’는 또 다른 증언과는 배치됐다. ‘고문하는 것을 보고 내가 말렸다’는 한 수사관의 진술까지는 나왔지만 자기가 직접 고문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부는 죽은 동료 수사관 김 아무개씨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도 했다.

 

이들은 이른바 ‘엘리베이터실’에 대해서도 엇갈린 진술을 했다. 엘리베이터실은 김병진·유지길씨를 포함해 고문 피해자들이 가장 공포스럽게 떠올리는 보안사 특유의 시설 중 하나다(그림 참조). 가로 4m, 세로 3m쯤 되는 방에 이용실(또는 미용실) 의자 같은 게 있고, 거기 사람을 묶은 뒤 버튼을 조작하면 순식간에 바닥이 꺼지면서 의자가 낙하했다는 것인데 ‘아주 냉기가 있고 음습하고 물소리가 들렸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제로 물에 처박혔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부 수사관은 “그런 기구는 없었다”라며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세 번째는 자기 합리화. 이들은 재판부에 보낸 탄원서에서 ‘보안사에 근무했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사람이 고문 기술자이고 파렴치한으로 매도된다면 이는 간첩들이 창궐했던 암울한 시대에 대한민국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이라고 주장했다. 〈시사IN〉은 탄원서에 이름을 올린 수사관 7명 전원과 통화를 시도했다. 이 중 고문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일로 전화하지 마, 골치 아파”(신 아무개) “노코멘트”(최 아무개)라며 전화를 끊어버리는가 하면 “고문 자체가 없었다. 다 거짓이다”(황 아무개) “간첩 새끼들이 거짓말만 한다”(김 아무개)라며 분개하는 사람도 있었다(상자 기사 참조).

결국 27년이 흐른 오늘까지도 가해자와 피해자 간 접점은 없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법정에 직접 출두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동영상 인터뷰에 응한 유지길씨는 힘없는 목소리로 답하다가 추재엽씨의 최근 사진을 보는 순간 “하이(네), 이 사람입니다”라며 음색이 높아졌다. “지금처럼 살이 찌진 않았지만 이 사람이 맞습니다. 그때는 안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아가 수사관 중 아키(‘秋’의 일본식 발음)라는 성(姓)을 지닌 사람이 있었으며, 그가 자신에게 고춧가루 물을 부었음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진화위 조사관을 지낸 임채도씨(인권의학연구소 연구기획실장)는 이처럼 피해자 대부분이 가해자와 ‘그날’을 잊지 못한다며 “우리 사회가 너무 빨리 용서를 말한다”라고 지적한다. 피해자들은 심리 상담을 받고 법원 재심 절차를 밟으며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데, 사회 전반은 ‘과거사 진상 규명도 했고 국가가 사과도 했으니 얼른 잊자’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사과·배상과는 별도로 ‘고문방지법’ 등을 제정해 가해자 처벌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27쪽 기사 참조).

 

 

추재엽 구청장 법정 구속의 여파는 새로운 방향으로 번지고 있다. 지난 10월19일 재일동포 윤정헌씨는 1984년 보안사에서 자신을 고문했던 수사관 고 아무개씨를 모해위증죄로 고발했다. 

그런가 하면 추재엽씨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제2의 피해자도 등장했다. 1985년 반공법 위반으로 15년형을 받고 1997년 출소한 나종인씨(74)가 그 사람이다. 1984년 10월 보안사에 연행돼 70일간 엘리베이터실 고문, 통닭구이(인간 바비큐) 고문, 전기고문 등을 당했다는 나씨는 “모진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이 받을 상처가 걱정돼 출소 후 입을 닫고 살았으나 추재엽씨가 법정 구속되는 것을 보며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연행 당시 엔지니어링 회사를 운영했다는 나씨는 “조사 과정에서 수사관들이 ‘우리 중에도 전기공학 한 사람이 있다. 허튼소리 말고 다 불어라’고 겁을 줬는데 실제로 내가 하는 사업 얘기를 잘 알아듣는 조사관이 있었다. 그가 추재엽씨였다”라고 기억했다(추 구청장은 홍익대 전기공학과 출신이다).

이에 대해 추 구청장 측은 “모든 것이 법정에서 밝혀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현노 양천구청 비서실장은 “보안사에 근무했다고 다 고문하나? 말도 안 되는 걸 갖고 트집을 잡고 있다”라고 말했다. 추씨의 항소심 첫 재판은 11월21일 열린다.

기자명 김은남 선임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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