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문제는 사람이다. 대통령이란 결국 사람을 쓰는 것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이고, 쓴 사람이 사고를 안 쳐야 안정된 통치를 할 수 있는 자리다. ‘사람을 쓰는 능력’은 대선주자를 검증할 때 가장 주의 깊게 보아야 하는 대목이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 이후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이때부터 따져 40년 가까이 이런저런 조직에서 주로 리더로만 살아왔다. ‘왕가’의 적통다운 삶의 궤적이다. 유권자는 그녀의 사람 쓰는 능력을 확인해볼 수 있는 ‘40년치 샘플’을 갖고 있는 셈이다.

사람 쓰는 리더십에 주목하는 것은 박 후보의 과거사를 평가하는 새로운 관점이다. 1970년대 청와대에서 최태민 목사와의 말 많은 관계부터, 영남대·육영재단·정수장학회 등 3대 재단 의혹에 이르기까지, ‘박근혜의 40년’은 주로 의혹과 진상규명 차원에서 논의되어온 경향이 있다.

“진상을 밝혀라” “이미 문제없는 것으로 결론 났다”라는 공방이 대상만 바꿔서 반복됐을 뿐 유권자에게 의미 있는 정보를 주지는 못했다. 박 후보는 과거사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해석이 있으니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라는 특유의 대응논리를 제시했는데, 명백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힘들다는 과거사 이슈의 속성상 이런 방어도 제법 먹히게 된다.

〈시사IN〉은 박근혜의 지난 40년을 ‘사람 쓰는 리더십 검증’이라는 관점으로 재조명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의혹’과 ‘논란’을 대신할 만한 ‘사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박근혜식 용인술에서 40년 동안 반복되는 패턴과 그에 따른 한계를 짚어볼 수도 있다. 먼저 박근혜 리더십과 용인술의 원형이 형성된 1970년대 청와대에서부터 출발해보자.


1979년 청와대, ‘근혜 스타일’의 단초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쏘았던 김재규는 이듬해 1월28일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이렇게 쓴다. 김재규는 자신이 대통령을 쏜 이유 중 하나로 박근혜·최태민 두 사람이 이끈 단체의 부정 문제가 청와대 내에서 긴장을 고조시켰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유명한 ‘최태민 의혹’이다.

박 후보의 답은 한결같고 간명하다. “이후 정권에서도 이 잡듯이 뒤졌는데 나온 것이 없었다.”(2007년 한나라당 대선경선 청문회) 박 후보는 또 김재규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이 아버지를 암살하지 않았습니까.”(2002년 4월호 〈월간조선〉 인터뷰)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김재규만이 아니다. 유신정권의 마지막 비서실장 김계원은 2005년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당시 청와대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최태민이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어요. 그런데 근혜양은 최태민은 아주 선량한 사람인데 왜 중앙정보부(김재규)에서 모략을 해 아버지 생각을 흐려놓느냐고 하면서 오해가 생겼어요.” 전임인 김정렴 비서실장의 증언도 일치한다. 그는 회고록에서 “최모라는 목사가 구국선교단을 조직해서 근혜씨에 가세하였다. 나는 큰 따님이 이용될 위험성이 크다 생각해 대통령에 보고했다”라고 적었다.

보수 논객으로 이름을 날리는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은 현장 기자 시절이던 1992년 박정희 청와대의 비사를 다룬 〈청와대 비서실〉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김진 위원은 “최태민씨가 얼마나 골칫거리였는가는 증언을 통해 거듭 확인된다. 김정렴·김계원 비서실장을 비롯해 거의 모든 수석과 특보들이 벙어리 냉가슴 앓듯 고민했으나 큰 영애 일이라 상소 한번 변변히 하질 못했다”라고 썼다. 김 위원은 이 책에서 박승규 당시 민정수석이 고민 끝에 최태민의 비위 내용을 모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총대를 멘’ 사실도 공개한다.

요약하면, 비서실장·민정수석·정보부장으로 이어지는 사정·정보 라인 핵심 인사들이 입을 모아 최태민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는 그때나 지금이나 ‘모함’이라는 의견을 유지하고 있다. 공식 라인보다 자신이 믿는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는 박 후보 특유의 스타일이 이때 이미 단초를 보인다.

 


결과는 파국이었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차지철(경호실장)과 김재규가 싸운 걸 나중에 보면 최태민 때문이야. 차지철이 최태민을 앞세우고 박근혜를 너무 업고 다니니까 김재규가 안 된다 그러거든”이라고 증언했다(〈이코노미스트〉 인터뷰). 10·26의 직접적 도화선으로 평가받는 김재규·차지철 갈등에 최태민 문제도 한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박 후보는 이런 해석도 부인한다.

핵심 당사자들이 세상을 떠난 지금, 양쪽 주장의 진위를 가릴 방법은 없다. 하지만 박 후보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청와대 공식 라인과 박 후보의 ‘비선’ 격인 최태민 간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았고, 누가 옳았든 이 갈등이 1970년대 후반 청와대 조직에 큰 스트레스를 줬던 것만은 여러 증언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20대에 이미 리더 구실을 하게 된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영남대 재단·육영재단·정수장학회 등의 조직을 번갈아 맡는다. 그리고 1980년대의 박근혜가 맡았던 조직에서는 비리와 갈등이 두드러지곤 했다.


영남대·육영재단… 가는 곳마다 최태민

“영남대학이 국정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당황했다. 사립대학이 감사를 받는가 생각했다.”(영남대 총장)

민주화 이후 16년 만에 부활한 1988년 국정감사에서, 영남대는 사립대 최초로 국정감사 대상이 되는 ‘수모’를 당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구대와 대구대를 ‘접수’해 1967년 설립한 영남대는 박정희 일가의 돈은 한 푼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1980년 4월 박근혜 후보를 이사장으로 선출한다. 박 후보는 7개월 후 평이사로 돌아가지만 여전히 실권자로 통했다. 영남재단 이사회는 1981년 이렇다 할 근거 없이 박정희를 ‘교주’로 칭하는 정관을 승인한다.
 


영남대에는 ‘박근혜와 4인방’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당시 국감장에 나온 영남대 교수협의회 이성대 교수는 “총장이 재단에 일일이 문의해서 박근혜 이사와 4인방의 명령을 받아 움직였다”라고 증언했다.

‘4인방’이란 곽완석 사무부처장, 김정욱 이사, 영남투자금융 조순제 전무, 영남의료원 손윤호 부원장을 말하는데, 이들 중 조순제 전무를 주목해야 한다. 조씨는 최태민의 다섯 번째 부인 임 아무개씨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최태민의 의붓아들인 셈이다. 또 손윤호 부원장은 조씨의 외삼촌으로 알려졌다. 공식 의사집행구조 위에 군림했다는 ‘영남대 4인방’에도 최태민과 직간접으로 이어진 사람이 둘이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청문회에서 박근혜 후보는 “김정욱·조순제·손윤호·곽완석(영남대 4인방)을 아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김정욱씨만 안다”라고 답했다. 최태민의 의붓아들이고 영남대 4인방이자, 명지원과 한국문화재단(두 곳 다 박 후보가 이사를 지냈다. 한국문화재단은 23년째 이사장직을 유지하고 있다)에서 이사로 일했던 조씨를 모른다고 했다.

격분한 조순제씨는 “박 후보의 진술은 거짓말이다. 1975년 구국선교단 이후 박 후보가 몸담은 봉사단체는 박 후보·최태민 목사와 나 세 명의 합의체제로 운영됐다”라고 주장하는 진정서를 한나라당에 제출했다. 당시 박 후보 측은 “특정 후보 측(이명박 후보를 지칭)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라고 반박했다.

이 논란의 진위 역시 가릴 방법은 없다. 하지만 조씨가 최태민의 의붓아들인 것, 당시 영남대 내에서 ‘4인방’으로 불린 것, 이후 한국문화재단 이사로도 재직한 것은 사실이다.

청문회를 거치며 학교 설립 당시 박정희 정권이 무리수를 뒀다는 시비와 부정입학 파문이 불거지자, 박근혜 후보는 그해 11월 이사직을 사임한다.

1990년 11월에는 육영재단 이사장도 내놓는다. 육영재단은 1987년과 1990년 두 차례 갈등이 밖으로 불거졌는데, 박 후보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두 번 모두 “최태민의 전횡에 반대한다”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2007년 청문회에서 박 후보는 “최씨는 재단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순전히 오해다”라고 해명했다. 1970년대 청와대의 풍경과 판박이다.

‘오해’의 골이 깊었던 모양이다. 여동생 박근영(지금은 박근령)씨와 남동생 박지만씨는 1990년 8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 앞으로 “최태민의 손아귀에서 언니를 구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냈다(2007년 8월 〈오마이뉴스〉가 이를 입수해 보도했다). 그해 10월에는 박근령씨가 언론 인터뷰에서 “물러날 사람은 언니가 아니라 최태민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육영재단 분쟁이 전직 대통령의 자녀들 간 분쟁으로 번지면서 일반 언론은 물론 여성지들도 큰 관심을 보였고, 박 후보가 이사장직을 사퇴한 후에야 관심이 잦아들었다.

정수장학회 문제는 2005년에 불거졌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정수장학회 강제헌납 문제를 재조사하며 논란이 되자, 당시에도 유력 대선주자였던 박 후보는 이사장직을 사퇴한다. 이후 박 후보는 “정수장학회는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라는 기본 입장을 고수했다. 후임 최필립 이사장이 최측근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최 이사장은 5공화국과 김대중 정부 때도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나의 측근이라는 것은 억측이다”라고 말했다(2007년 청문회).

최필립 이사장마저 측근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에 대해서는 “너무 나갔다”라는 평이 많다. 유신정권의 마지막 비서실장 김계원은 이렇게 회상했다. “최태민 단속을 위해 큰 영애 전속 비서실을 만들어야겠다 싶었다. 큰 영애에게 추천을 받았더니 최 아무개씨를 지명했는데, 그가 최태민과 가까운 걸 알고 다른 사람을 고르라 했다. 이번에는 최필립 비서관을 지명하더라. 큰 영애가 걔를 예뻐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최필립도 최태민을 아는 거야. 나 참.”(〈이코노미스트〉 인터뷰)


최필립 이사장도 올해 2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박 후보와의 밀접한 관계를 과시한 바 있다. 최 이사장은 최근 정수장학회의 언론사 보유지분을 매각해 장학사업에 사용하려는 ‘선거운동성’ 논의를 MBC 측과 한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어 본인과 박 후보 모두 곤욕을 겪고 있다. 박근혜 캠프에서는 “정수장학회 처리 문제가 ‘제2의 인혁당’이 될 수 있다.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청와대를 나와 정치인이 되기 전까지(1979년부터 1998년까지) 박근혜 후보는 재단 두 곳에서 사실상 불명예 퇴진을 했다(영남대 재단과 육영재단). 정수장학회까지 세 재단 모두에서, 어떤 식으로든 최태민 관련 의혹이 나오거나 관련 있는 인물이 주요 직책을 맡았다.


1998년 등장한 의원실 ‘4인방’의 위세

1998년 정치 입문 이후 박 후보는 신선한 이미지와 아버지의 후광을 무기로 빠르게 거물 정치인이 된다. 2002년에는 벌써 대선주자로 거론됐다. 20대 때부터 어딜 가나 조직의 장이었던 박 후보는,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손발’ 노릇은 생략하고 곧바로 ‘머리’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다면 정치인이 된 이후로 박근혜 후보의 사람 쓰는 법은 달라졌을까.

처음 만나게 되는 이름은 정윤회다. 정씨는 1998년부터 박근혜 후보의 의원실 보좌관으로 의원실을 진두지휘했고, 2002년 박 후보가 탈당해 만든 한국미래연합에서는 총재비서실장을 지낸 핵심 중의 핵심이다. 그의 부인은 최태민의 딸 최순실씨다. 즉, 정씨는 최태민의 사위다. 2007년 청문회에서 박 후보는 정씨가 최태민의 사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2007년 박근혜 경선캠프 주변에서는 이른바 ‘논현동팀’으로 불린 비선 라인이 진짜 실세이고, 이 팀을 지휘하는 사람이 정윤회라는 설이 나돌았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 측에서는 “2004년 이후 얼굴도 본 적이 없다”라고 부인한다.

이른바 ‘문고리 권력’ ‘환관 권력’ 논란을 불러온 ‘의원실 4인방’들도 정씨와 함께 박 후보 참모가 된 1998년 원년 멤버들이다. 최고 선임 보좌관이 보좌진 진용을 짜는 국회 관례대로라면, 이들 4인방도 정윤회씨가 인선에 개입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이들 보좌관은 정책(이재만), 온라인 홍보(이춘상), 정무·메시지(정호성), 일정·회계(안봉근) 등 대선캠프의 핵심 구실을 수행하는데, 현역 의원은 물론 선대본부장급과 비교해도 위세가 더 높다는 평이 새누리당 주변에 공공연하다. 2007년 당시 캠프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캠프 공식 라인에서 만든 안이, 다음 날 4인방이 ‘어딘가를 다녀온 후’ 뒤집혀 있곤 했다. 선대본부장들조차 ‘이런 식으로 할 거면 캠프 해체하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본부장급들은 회계를 담당하는 보좌관에게 돈의 용처를 꼬치꼬치 보고하는 게 자존심이 상해 자기 돈 들여서 뛰거나 아예 손을 놓아버렸다. 그러니 선거가 될 리가 있나”라고 귀띔했다.

같은 패턴이다. 우선은 믿을 수 있는 측근(최태민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경우가 묘할 정도로 많았다)을 중심으로 일종의 ‘비선 라인’을 공고하게 구축한다. 비선 라인은 보조 역할이 아니라 공적 라인조차 잡아먹을 만큼 강력해졌다는 불만이 나온다. 박근혜 후보는 “오해다. 사실이 아니다” 또는 “내 측근이 아니다”라고 대응한다. 어느 쪽이 맞는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공적 라인과 비선 라인 간의 갈등은 늘 극한까지 갔으며, 박 후보는 대체로 이 양 축의 갈등을 관리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1979년 청와대, 1988년 영남대 재단, 1990년 육영재단은 모두 갈등 관리 실패가 파국으로 이어졌다. 2007년 대선 캠프는 내부적으로 불만이 팽배한 상태에서 폭발 전에 경선 패배로 소멸했다.

2012년 대선 캠프는 갈등 관리에 실패하며 당 최고위원 격인 전 비대위원단이 실무진에 불과한 보좌관 4인방을 공개 저격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졌다. 김계원·김재규·박승규 대 박근혜·최태민이 충돌했던 1979년 청와대의 갈등이, 33년이 지나 배역만 바뀌어 좀 더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재연된 꼴이다. 정수장학회가 논란의 핵으로 떠오른 10월13일, 장학회 이창원 사무처장은 정호성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4인방이 한창 구설에 올랐던 때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는 라인’이 어디인지를 암시하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박근혜의 사람 쓰는 법은 왜 위태로울까

“박근혜표 조직은 권한이 있는 사람과 책임을 지는 사람이 다르다.” ‘탈박’으로 분류되는 새누리당의 한 참모는 박 후보의 용인술을 이렇게 정리했다. 책임 있는 자리의 사람이 정작 권한은 측근에게 밀려버리니, 일을 결정하는 사람과 뒷감당을 하는 사람이 달라지게 된다.
 


이런 조직은 큰 문제가 생긴다. 첫째, ‘권한 있는 사람’과 ‘책임 있는 사람’ 간 갈등이 격해진다. 박 후보가 40년 동안 겪은 일이다. 둘째, 투명한 공적 책임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상호 감시 기능이 약해져서 ‘무임승차’의 유혹이 높다. 비리 가능성이 커지기 쉽다.

박 후보가 아무리 ‘깨끗한 선거’를 외치든 상관없이 새누리당은 크고 작은 비리 의혹에 시달렸고, 급기야 선대본부장이었던 홍사덕 전 의원까지 금품수수를 시인했다. 리더의 ‘선의’만으로는 가장 가까이 있는 좌장마저 제어하지 못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어떤 천부적인 리더라 해도 ‘바닥부터의 성장 과정’을 거친다. 박 후보는 아주 독특한 예외다. 20대 때부터 리더로 출발한 박 후보가 처음 본 통치의 모습은, 엉뚱하게도 경호실장 차지철이 최대 실권을 행사하는 ‘왕조 리더십’의 전형이었다. 반면 비서실장 이하 공적 라인은 하나같이 최태민 건으로 자신을 ‘모함’했다. 이후의 궤적을 보면, 이때 박 후보에게 각인된 용인술이 사실상 별 변화 없이 반복된 셈이다.

10월18일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은 “박근혜는 하늘이 준비시킨 후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이 노골적인 왕조 감수성은 박 후보 특유의 용인술과도 묘하게 잘 어울린다. 우연일까. 김 본부장은 친박에서 쫓겨나 있던 2010년 박 후보를 두고 “다 좋은데 결정적으로 민주주의 개념이 부족하다”라고 한 적이 있다. ‘하늘이 준비시킨 후보’라서 ‘민주주의 개념이 부족하다’라고 이어붙여 봐도 제법 말이 된다.

취재 도움·전혜원 인턴 기자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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