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3월12일 유럽 의회 의원들이 피랍된 베탕쿠르의 사진을 들고 그녀의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엄마,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너무 힘들다는 걸 알고 있지만, 우리를 위해 조금만 더 견뎌주세요. 엄마와 다른 모든 인질이 구출될 때까지요.”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19세 청년이 나직이 말하고 있다. 그는 절제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지만, 눈가는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지금 저희 엄마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정부와 FARC(콜롬비아 무장 혁명군)가 평화와 인권을 위해 행동할 때입니다.”

이 비디오는 프랑스의 ‘잉그리드 베탕쿠르 지지 위원회’가 파리에서 제작해 3월6일 전세계에 배포한 4분가량의 영상물 〈로렌조 베탕쿠르의 호소 :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의 일부다. 이 청년은 지금 프랑스와 남미4개국에 걸쳐 국제 외교 문제로 떠오르고 있피랍 프랑스인 잉그리드 베탕쿠르(47)의 아들이다.

베탕쿠르 "내겐 죽는 게 더 쉬운 선택"

FARC에 납치된 잉그리드 베탕쿠르는 원래 콜롬비아 사람이지만 프랑스인들은 자국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전 콜롬비아 교육부 장관 가브리엘 베탕쿠르의 딸이다. 프랑스 유학시절 만난 남자과 결혼해 프랑스 국적을 함께 갖게 됐다. 1990년 이혼한 그녀는 혼자 보고타로 돌아가 명문가의 딸답게 정계에 입문했다. 1994년 녹색당을 창당한 그 해 그녀는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선거를 준비하던 2002년 2월23일, 베탕쿠르는 콜롬비아의 남부 도시 플로렌시아에서 FARC에 납치됐다.

FARC는 콜롬비아 최대 무장세력이며 오랜 콜롬비아 내전의 역사와 함께한 시대의 산물이다. 과거 남미 대다수 국가가 그렇듯 콜롬비아에서도 민심의 지지를 등에 업었던 좌파 세력은 농촌 지방에서 힘을 키워 1957년 ‘마르케탈리아 공화국’이란 독립 정부를 만들기에 이른다. 마르케탈리아 공화국은 1964년 콜롬비아 정부군에 의해 토벌되었으나 잔당은 FARC를 조직해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저항하고 있다.

베탕쿠르가 납치된 지 6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그녀가 프랑스와 유럽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베탕쿠르의 편지 등이 공개돼 시민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월28일 스페인 채널 4번 방송은 베탕쿠르의 현 남편인 후안 카를로스 레콩트가 최근에 받은 그녀의 편지를 공개했다. 작성일을 알 수 없는 이 편지에서 베탕쿠르는 “내겐 죽는 게 쉬운 선택 같아 보여요”라고 쓸쓸히 말하고 있다. 그녀는 지금 B형 간염을 앓고 있으나 치료를 받지 못해 그의 아들 말처럼 죽어가고 있다.

ⓒReuters=NewsisFARC

두 번째로 베탕쿠르 문제가 뉴스의 중심이 된 사연은 베네수엘라 대통령 차베스 때문이다. 남미 외교 문제에 안 끼는 곳이 없는 참견꾼 차베스 대통령은 올해 들어 베탕쿠르 석방 협상에 적극 개입해 주목받았다. 차베스 대통령의 등장은 피랍자 가족과 프랑스인들에게 기대감과 희망을 불어넣었다.

콜롬비아, 미국은 차베스 협상안 거부

베네수엘라는 ‘마지막 남은 친미 정권’인 콜롬비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FARC를 원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량을 비롯해 무기와 자금을 공급한다는 주장도 있다. 차베스 대통령의 FARC에 대한 영향력은 상당해 그의 중재로 올해에만 인질 6명이 풀려났다. 특히 지난 1월4일에는 베탕쿠르와 함께 납치되었던 당시 부통령 후보 클라라 로자스가 차베스 대통령의 협상 덕분에 풀려나기도 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콜롬비아 정부군 지배 지역과 FARC 활동 지역 사이에 비무장 중립지대를 만들어 인질 협상을 공식화할 것을 제안했다. 차베스는 “중립지대가 마련되면 제네바 협약에 따라  잉그리드를 포로로 대우해 협상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콜롬비아 정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테러리스트라고 간주해온 FARC를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베네수엘라가 콜롬비아 내정에 개입할 명분을 줄 수도 있다.
차베스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미국도 차베스 중재안에 반대했다. FARC가 판매하는 마약이 대부분 미국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토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Reuters=Newsis지난해 11월20일 FARC와의 협상에 나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사진 가운데)이 베탕쿠르 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FARC는 점점 탈레반과 비슷해져가고 있다. 처음에는 콜롬비아 기득권 세력과 미국·초국적 자본에 맞서 투쟁한다고 나섰지만, 지금 그들은 점점 장사꾼에 가까워져가고 있다. 3월11일자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콜롬비아의 군사전문가 세자르 레스트로포를 인용해 “FARC에게 마약 판매는 자금 마련을 위한 수단이었지만, 지금은 목표가 되고 말았다”라고 비판했다. FARC는 마약 밀매로 한 해 300만 달러(30억원)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의 정글지대에 산재해 있는 FARC의 현재 조직원은 1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마약 밀매와 함께 납치를 통한 몸값 요구도 FARC의 자금 확보방안이다. 1964년부터 현재까지 1600여 명이 FARC에게 납치되었다.

FARC가 탈레반보다 더 불리한 점은 과거와 달리 민심 그들을 떠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월4일에는 콜롬비아 전국에서 200만명이 FARC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분위기를 타고 콜롬비아 정부는 FARC에 대한 적극 공세에 나섰다. 그리고 3월1일에는, 국경 지대에서 암약하던 FARC 반군을 공격해 반군 서열 2위인 라울 레이예스를 사살했다.

이 진압 작전은 콜롬비아 정부군에게는 영광의 승리였지만, 국제 외교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토벌전 와중에 콜롬비아 정부군이 에콰도르 국경을 넘어 진주한 것이다. 마치 최근 터키가 이라크 국경을 넘어 PKK 토벌 전쟁을 벌인 것과 비슷하다. 에콰도르는 이라크처럼 만만히 넘어가지 않았다. 주권에 대한 침략이라고 규정하고 콜롬비아 내 자국 대사관을 폐쇄하고 국경에 군대를 전진 배치했다. FARC를 지원해온 베네수엘라도 콜롬비아 주재 대사관을 폐쇄했다.

프랑스도 내심 콜롬비아 정부군의 강경 진압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사살된 라울 레이예스가 실은 베탕쿠르 석방 협상의 교섭자였기 때문이다. ‘베탕쿠르 지지 위원회’ 대변인 올리비에 루비는 “라울 레이예스가 죽지 않는 것이 유리했다”라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프랑스 정부는 나름대로 베탕쿠르의 석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FARC가 2005년이래 미국과 유럽연합이 테러단체로 규정한 단체인데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3월5일 FARC에 직접 메시지를 전달했다. “세계에 당신들이 인간애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라”라는 그의 호소는 콜롬비아 TV채널 RCN을 통해 방송되었다.

베탕쿠르는 원래 프랑스 사람도 아니었고, 단지 프랑스인과 9년 남짓 결혼 생활을 한 것이 전부다. 아직 콜롬비아 국적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베탕쿠르가 ‘프랑스가 책임져야 할 프랑스인’이라는 생각에 추호도 의심이 없다.

기자명 파리=표광민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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