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Photo아프가니스탄에서 10주간 복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약 영웅이 되었다.

왕자 때문에 흥분한 것은 영국 국민만이 아니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해리 왕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군인이었다. 2월28일 영국 왕위 계승 3순위 왕족이자, 찰스 황태자의 둘째 아들인 해리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돼 10주째 복무 중이라는 사실이 미국·독일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영국 정부는 해리 왕자가 6개월로 예정된 복무 기간을 마칠 때까지 자국 언론에 엠바고(보도 유예)를 요청했었다.

 엠바고가 깨지자 영국 국방부는 왕자의 위치가 노출돼 그와 동료의 신변이 위험해졌다며 해리를 조기 귀국시켰다. 아울러 화보 광고용으로 촬영한 듯한 왕자의 군 복무 사진을 언론에 배포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전세계 미디어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왕자의 생생한 얼굴을 보도했다. 3월1일 귀국한 왕자는 영국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영웅이 되었다.

해리 왕자의 인기는 한국에서도 치솟았다. 때마침 이명박 정부가 새 내각 명단을 발표했는데 남성 장관 14명 중 병역 면제자가 5명이나 됐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영국 지도층과 ‘땅벌리스 돈벌리제’(박근혜 지지 모임 박사모가 풍자한 신조어)를 실천한 우리네 장관들이 비교됐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분쟁 지역 임무에 자원하는 용기는 분명 평가할 만하다. 현지 언론도 런던 나이트클럽에서 흥청대던 해리 왕자가 국민에게 기쁨을 준 것을 칭찬한다. 하지만 영국 지식인은 이번 사건을 차츰 냉정한 시각에서 보기 시작했다. 해리 열풍에 전쟁의 이면이 가려졌다는 것이다.

영국 진보 일간지 가디언은 3월1일 마리나 하이드의 칼럼에서 ‘해리 왕자가 가장 무도회 때 나치 제복을 입어서 물의를 일으킨 것에 비하면 영국군 제복이 더 어울려 보인다.(중략)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은 전쟁터이지 극기훈련장이 아니다’라고 썼다. 또 3월2일 칼럼에서는 ‘왕자 영웅 만들기 바람은 전쟁의 진짜 비용을 감춘다’라고 비판했다.

보수지도 마찬가지다. 더 타임스 칼럼니스트 믹 흄은 3월4일 ‘해리 왕자 : 전쟁의 위선’이라는 글에서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명분은 원래 알카에다 추적이었는데, 지금은 아편 매매를 막는다든지 카르자이 정권을 보호해주는 따위 일로 바뀌었다. 왜 해리 왕자가, 그리고 영국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있어야 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할 때다’라고 썼다. 요즘 영국 신문 기사에는 ‘해리의 탐험’ ‘군대 여행’ 같은 표현이 자주 보인다.
 

ⓒAP Photo해리 왕자(사진 맨 왼쪽)는 찰스 왕세자(사진 맨 오른쪽)와 고 다이애나 왕세자빈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영국 미디어가 석 달 가까이 엠바고를 유지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이 일었다. 이번 엠바고는 영국 언론인협회(Society of Editors)에서 합의한 것이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 유진 로빈슨은 ‘(영국 언론이) 해리 왕자 소식을 감추기로 한 것은 오로지 해리 왕자가 아프가니스탄 복무를 끝까지 마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다. 왜 왕자의 꿈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미디어가 뉴스 편집의 원칙을 포기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썼다. 영국 일부 신문기자도 자국 언론인의 엠바고 합의를 비판한다.

“아프가니스탄은 극기 훈련장이 아니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3월2일자에는 아프가니스탄 참전 용사였던 레오 도체티 씨가 해리 왕자를 향해 쓴 특별 기고가 실렸다. 다소 길지만 기고자의 체험이 담긴 글이라 요약 인용해본다.
‘나는 해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왕실 친위대 장교로 거기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선에 간다는 욕망은 종종 제국주의 시대의 영웅 이야기를 통해 고취된다.

헬만드 가름시르 지역에 주둔한 해리 왕자는 자신이 ‘일상적인’ 영국군의 모습처럼 근무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병영 생활은 진짜 영국군이 직면한 현실과는 동떨어졌다.
2006년 11월 영국군은 헬만드 농촌 지역을 공습한 뒤 점령했다. 이곳 농민은 원래부터 아편 원료인 양귀비를 재배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경제적 대안을 주지 못했다. 농민은 외국군의 점령에 저항해 탈레반 편이 되었다. 처음 영국군의 오폭으로 인해 민간인 농민이 죽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정신적인 면에서 졌다. 전투는 도대체 끝나지 않고 아편 재배는 오히려 더 늘어만 갔다.

  해리 왕자가 조작했던 그 화포를 통해서는 ‘왜 영국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느냐’는 모순을 풀 길이 없다. 우리는 민중으로부터 인심을 잃고 있다. 2007년에 헬만드에서만 6000명이 전투 중 죽었다. 그 중 1400명이 민간인이고 그 중 500명은 나토군의 오폭으로 죽은 것이다. 영국군 사망자는 89명이었다.
 

ⓒReuters=Newsis2005년 가장 무도회에 나치 제복을 입어 물의를 일으켰던 해리 왕자(위)는, 이번 파병 건으로 이미지 반전에 성공했다.

영국 사령관은 우리가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역효과만 냈다. 탈레반은 부활했다. 지난주 미국 국가정보국장 마이크 매코넬은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악화하고 있다면서 국토의 30%는 카르자이 정부가, 10%는 탈레반이, 나머지는 부족 원로가 통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졸렬한 군사 모험극이다. 혹은 오락화한 전쟁이다.

불행히도 많은 젊은이가 영웅주의 신화를 위해 작전을 수행하다 죽는다. 아프간과 영국군 양쪽 모두 의미 없는 싸움에 희생되고 있다.
해리는 열광적인 언론을 등에 업고 영웅으로 돌아왔다. 과거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죽었을 때, 해리는 어머니를 괴롭혔던 언론과 멀리 떨어져 있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해리 왕자의 귀국을 환영한다. 다른 ‘평범한’ 청년들도 해리처럼 어서 집으로 돌아오길 빈다.’

물론 우리네 정치 현실에 비춰보면,  ‘해리 왕자 전쟁 영웅 만들기’ 바람에 대한 영국 정론지의 냉소는 먼나라 이야기다. 우리 국방부는 ‘영웅 만들기’를 할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장관 지명자 14명의 자녀 중 20%는 외국 국적을 가졌다. 정부 고위층 자제가 이라크 자이툰 부대나 유엔평화유지군(PKO)에 자원했다는 뉴스가 나온 적은 한 번도 없다.

기자명 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