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ickr미국 경제가 장기 불황으로 치달으리라는 우려가 경제학자 사이에서 나온다. 경제 위기는 서민에게 큰 고통을 준다. 사진은 미국의 노숙자.
미국 수도 워싱턴 근교에 사는 쌍둥이 엄마 낸시 코라지는 최근 금융 대부회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통지서를 받았다. 집을 담보로 그녀가 빌린 9만5000달러(약 9000만원)에 대한 융자금을 회수하겠다는 것이었다. 회사 측이 내건 이유는 대출 당시의 주택 감정가가 지금은 크게 떨어져 이자와 원금을 회수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라는 것.

코라지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요즘처럼 어려운 때 대출받은 돈으로 애들 유치원도 보내고 살림에도 크게 도움을 받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해 여름부터 나빠지기 시작한 경제가 갈수록 악화하면서 요즘 미국에는 코라지 같은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늘었다. 집 담보융자는 세금 정산시 공제를 해주기 때문에 주택을 소유한 미국인이라면 한번쯤 이용했음직한 절세 상품이다. 그러나 이른바 서브프라임(비우량주택 담보) 사태가 지난해 여름 미국 전역을 덮친 뒤 컨트리와이드 같은 굴지의 융자회사들이 휘청거리면서 피해자들이 줄줄이 생겼다.

ⓒReuters=Newsis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버나드 버냉키 의장(위)은 금리를 연이어 내리고 있다.
경기 침체에 대한 염려를 반영해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도 연초부터 벌써 두 번에 걸쳐 금리를 1.75% 내렸다. 금리가 떨어지면 주택 융자금리나 재융자 금리도 예전 같으면 덩달아 내려갔지만 지금은 오히려 반대로 오르는 양상이다. 경기가 잘나가던 때는 돈을 빌려가라고 아우성이던 금융회사들이 지금은 꿔준 돈을 회수하느라 법석이다. 지난해 10월 이후 미국 집값은 평균 15%나 떨어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국 경기를 떠받쳐온 내수, 그 중에서도 주택 경기는 아예 실종 상태다. 실제로 요지에 대지를 사놓고 주택 건설에 한창이던 건설회사들이 요즘은 건축 계획을 보류해 나대지 상태로 널린 땅이 미국 전역에 즐비하다. 이미 건축이 끝난 신규 주택도 입주자가 거의 없어 해당 건축회사들은 도산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 경제학자들이나 월가의 투자자 일부에서는 미국 경제가 이미 ‘침체’(recession)에 접어들었다고 단언한다. 통상 경기 침체는 6개월 이상 경제가 위축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서브프라임 사태가 미국을 덮친 지난여름을 기준으로 보면 ‘침체’로 봐도 지나친 말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지난 2월26일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경제가 둔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침체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버나드 버냉키 의장 또한 공식으로 ‘침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도 부시처럼 올해 경기가 둔화되기는 하겠지만 침체 국면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측은 올해 미국 경제가 지난해 2.5%보다 떨어진 1.3~2%의 저조한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실업률도 지난해에는 4.9%에 머물렀지만 올해는 예상치를 5.3%로 올려 잡았다.

미국 경제가 침체 국면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이를테면 앞으로 6개월간의 경제 상황을 예측해서 발표하는 권위 있는 민간 경제 예측기관인 콘퍼런스 보드 (Conference Board)가 제시한 경기선행지수가 그렇다. 이 기관이 지난 2월22일 내놓은 발표에 따르면 경기선행지수가 지난 1월 넉 달째 하락세를 보였다. 콘퍼런스 보드의 애타먼 오질디림 연구원은 “현재 미국 경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침체로 빠져들기 직전 상황에 근접했다”라고 진단한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미국 경제의 현재 성장률이 제로, 즉 정체 상태에 있다”라면서 이런 상황이 길어질수록 미국 경제는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Flickr미국의 노숙촌 풍경.
부시 행정부가 최근 단기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납세자에게 개인당 600~1200달러씩, 모두 1520억 달러(약 143조원)를 환급해주겠다고 발표한 것도 현재 미국 경제가 당면한 침체의 위기를 보여준다. 일부에서는 그 정도 돈을 푼다고 해서 경기가 좋아지겠느냐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사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집값은 떨어지고 주식 값도 평균 15%씩 폭락하는 상황에서 미국인들이 환급금을 이런저런 명목으로 지출한다면 일시적이나마 경기를 진작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실제로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졌던 1990년대 중반과 2001년 당시 납세자들에게 환급 조처를 해 경기가 일시적으로 회복세를 보이기도 했다.

경기 침체 오면 실업자 최대 580만명 발생

문제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리를 내리고 부시 행정부가 환급 조처를 취해도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경우 미국 경제는 과거의 혹독한 침체기로 빠져들 것이라는 걱정이 많다. 경제학자들은 특히 침체가 몰아닥치면 가장 먼저 실업자가 양산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장기화하고 소비자 경기가 꽁꽁 얼어붙을 경우 미국 경제는 지난 1980~1982년 경험했던 최악의 침체를 겪을 수도 있다. 실제로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는 당시의 경기 침체가 도래한다면 최저 300만명에서 최고 580만명에 이르는 실업자가 속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워싱턴 소재 경제정책 연구소의 예측이다.

물론 대다수 경제학자는 현재 미국 경기가 당시의 침체 상황을 재연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필요하다면 현재 3%인 금리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릴 태세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다음 달 중순 또다시 금리를 2.25%까지 내릴 것으로 관측된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는 어차피 올해 상반기 경제는 정체를 면치 못하더라도 환급액의 효과가 나타날 하반기에는 경기가 다소 호전될 것으로 기대한다.

문제는 가뜩이나 경기가 좋지 못한데 최저 행진을 거듭 중인 금리 인하의 여파로 인플레가 까지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할 경우 이다. 실제로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한 기름값은 하루가 멀다 하고 뛰고, 여기에 금값은 물론이고 주요 식품 원료인 밀값도 폭등하는 등 농산품 가격도 급등하고 있다. 노동부가 최근 발표한 통계를 보면 소비자 물가지수는 1년 전보다 4.3%나 껑충 뛰어 인플레 조짐이 현실화되었다. 노스이스턴 대학의 배리 블루스턴 교수는 주택경기 침몰과 서브프라임 사태에 따른 신용경색, 여기에 인플레까지 겹칠 경우 미국 경제는 머지않아 단기 치유가 힘든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에 직면할 것이라 경고한다.

기자명 워싱턴=권웅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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