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Photo혼란스러운 이라크 정세를 틈타 석유 자원을 수탈하려는 열강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위는 저항 세력이 수출용 이라크 송유 시설을 공격해 불타는 모습.

지난 2월14일 한국이 이라크 유전 개발권을 땄다는 소식이 발표되자 국민은 들떴다. 한국석유공사·유아이에너지 등이 참여한 ‘한국 컨소시엄’이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와 석유 자원개발에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는 내용이었다. 컨소시엄 측은 각서에 언급된 K5 등 4개 광구의 석유 매장량이 무려 13억~30억 배럴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뉴스 말미에는 꼭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국가경쟁력강화특위 투자유치 TF 관계자의 멘트가 덧붙여졌다. 사실상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작품이라는 설명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첫 자원외교 결실’ 보도에 ‘자원 에너지 외교 기대된다’는 사설까지 나왔다.

하지만 며칠 뒤 이라크 중앙정부는 “한국 기업이 쿠르드 자치정부와 맺은 모든 계약은 무효다”라고 뒤집었다. 나아가 “중앙정부 허락 없이 쿠르드 자치정부와 독자로 계약을 맺는 기업에는 불이익을 주겠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2007년 11월 쿠르드 자치정부와 바이잔 광구 계약을 체결한 SK에너지는 이라크 로부터 원유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외교 문제로 비화하자 한국컨소시엄 측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유전 허가 권한이 명기된 새 석유법이 통과되면 문제가 해결된다. 계약은 유효하다”라고 주장했다. 무스타파 타우픽 주한 이라크 대사도 “석유법이 통과되면 SK에너지 사태 등이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라크 석유법은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능 열쇠처럼 보인다. 하지만 양측이 말하는 ‘해결된다’는 의미는 서로 다르다. 게다가 과연 이라크 석유법이 통과될지도 불투명하다.
 

 

이라크 석유법은 2007년 이래 이라크 정국을 휩쓴 가장 무거운 주제다. 법안 초안이 2007년 2월26일 내각 승인을 받았지만 1년이 넘은 지금까지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새 석유법 내용 중 이라크 국민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석유 산업 전면 개방이다. 이라크는 1972년 이래 석유 산업을 국유화해 국영석유회사(INOC) 외에는 원유를 채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새 석유법은 외국 기업이 유전 개발· 원유 운송·정유·서비스업 등 에너지 사업 전체에 참여가 가능하도록 개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생산물 분배협정(PSA·Production Sharing Agreements)이라고 해서 최장 30여 년간 채굴권을 주고 투자비를 회수할 때까지 이익의 75%를 가져가도록 했다. 이라크 기업을 대리인으로 내세우거나 이라크 인을 고용할 의무도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등 중동 어느 나라에도 이런 석유법은 없다.

이게 끝이 아니다. 새 석유법에는 유전 개발과 관련된 계약의 최종 결정권을 ‘이라크 연방 석유·가스위원회’에서 갖도록 되어 있다. 이 위원회는 중국·러시아 등과 맺었던 과거 계약을 무효화할 수도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는다. 그런데 위원회 위원으로 외국 석유 메이저 회사 관계자가 의결 정족수 제한 없이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이 조항 때문에 이라크 석유위원회가 자칫하면 엑슨모빌·셸 등 서방 메이저 석유 기업의 이사회로 전락할 염려가 제기된다.

영국 시민단체 워온원트와 새 경제재단(NEF)등은 석유법이 통과되면 이라크 유전 64%의 개발권이 외국 기업에 넘어갈 것으로 전망한다.
 

영국의 한 시민단체 회원이 이라크 석유를 수탈하는 메이저 석유 기업을 비판하고 있다.

이 놀라운 석유법안을 만든 배후는 미국이다. 2007년 3월 홍콩 〈아주시보〉는 이 법안 작성에 미국 정부와 메이저 석유 회사가 참여했으며 애초 법안이 아랍어가 아닌 영문으로 먼저 쓰였다고 보도했다. 미국 주간지 〈네이션〉은 2007년 3월19일자 보도에서 새 석유법은미국·영국 정부 사이에 긴밀한 협상을 거쳐 탄생했으며, 미국 정부가 고용한 컨설팅 회사 베어링 포인트의 자문으로 작성되었다고 폭로했다. 또 2006년 미국 에너지 장관 사무엘 보드먼이 몇 개 이라크 석유법 초안을 들고 대기업 석유회사를 찾아가 열람시키며 ‘허락’을 구했다고 보도했다. 이 때까지 정작 이라크 연방 의원들은 법안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이라크 나라법을 외국 정부와 외국 기업이 밀실에서 만든 셈이다.

외국 기업, 최장 30년간 이라크 석유 채굴

미국은 석유법 통과에 몸이 달았다. 2007년 6월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 이라크로 날아가, 존 네그로폰테 전 이라크 대사와 함께 말리키 총리를 방문해 석유법을 통과시키라고 압력을 넣었다. 2007년 7월3일 알 말리키 총리는 이라크 내각이 수정된 석유법을 만장일치로 승인해 의회에 다시 제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법안은 계류 중이다. 2007년 12월20일 부시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이라크 석유법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런 석유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애초 전쟁 목적을 무색하게 만드는 자기 모순을 보여준다. 부시 대통령은 2003년 이라크 전쟁을 벌일 때 석유 이권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2003년 영국의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도 의회 연설에서 “우리가 이라크 석유를 원한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석유 개발 수익금은 유엔의 신탁기금에 기탁해 이라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현재 이라크 석유 개발 신청서를 제출한 기업 중 낙찰이 유력한 회사는 셸·BP와 같은 영국 석유회사다.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 역시 2003년 “단 한 방울의 이라크 석유도 미국을 위해 쓰지 않겠다. 이라크 석유는 이라크 국민의 재산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지난해 발간된 자서전에서 이라크 전쟁은 석유 때문에 일어났다고 고백한 바 있다.

석유법의 독소 조항이 이라크 국민에게 알려지면서 반대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이라크 석유노조(IFOU)는 지난해 6월 석유법 통과를 막기 위해 부분 파업을 하기도 했다. 석유법은 저항 세력에게 송유관 등을 공격할 빌미를 제공했다.

석유법 통과와 상관없이 이미 이라크 석유는 외부에 유출되었다. 미국 회계감사원(GAO)은 “이라크 석유 가운데 하루 10만에서 30만 배럴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2007년 5월 뉴욕 타임스는 이라크 전쟁 이후 4년간 행방을 알 수 없이 사라진 이라크 석유 양은 70억∼220억 달러어치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이라크 석유법 초안, 영문으로 먼저 작성

이라크 석유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는 까닭은 이런 ‘국부 유출’ 논란뿐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지방 정치조직 사이에 반발이 크다.  석유법 부속서에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권한이 명기되어 있는데, 협상 권한은 지방이, 승인은 중앙 정부가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쿠르드 자치정부(KRG)의 불만을 샀다. 애초 초안에는 지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조항이 있었는데, 나중에 중앙정부 권한을 대폭 늘렸다며 반발했다.
이라크 중앙 정부로서는 쿠르드 자치정부에 석유 이권까지 넘기면 사실상 쿠르드 지역은 독립국가나 마찬가지이므로 경계할 수밖에 없다. 새 석유법에는, 석유 개발로 얻는 이익을 각 자치정부 인구 비율에 따라 배당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정세가 복잡한데도 한국은 그동안 오판을 거듭했다. 지난해 4월 산업자원부는 이라크 석유법이 5월에 통과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6월 국방부는 자이툰 부대의 주둔 필요성을 밝히며 “이라크 석유법이 7월 중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발표했다. 모두 틀렸다.

석유법 협상이 지지부진해지자 2007년 8월7일 쿠르드 의회는 독자적인 쿠르드 석유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서 쿠르드 정부는 지역 내 유전 개발 수입의 약 17%를 가져간다.  현재 쿠르드 자치정부와 자원 개발 계약을 맺은 석유회사와 컨소시엄은 2008년 2월 초 현재 20곳에 이른다. 이중 15곳은 지난해 8월 ‘쿠르드 석유법’ 탄생 이후 계약했다. 여기에 한국석유컨소시엄과 맺은 계약도 포함된다. 쿠르드 자치정부는 이들 계약이 유효하다며 중앙정부에 맞서고 있다. 자치정부는 이라크 헌법재판소에 재소하려고 한다.

쿠르드 지방정부와 이라크 중앙정부의 대립은 한국 석유업계로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한국군 파병 지역인 아르빌은 쿠르드 자치정부의 중심지로 중앙정부의 이해와 무관한 곳이다. 합법 투자를 하려면 석유법이 빨리 통과되어야 하지만, 중앙정부의 권한이 강해진 채로 법이 정해지면, 그동안 쿠르드 자치정부에 쏟아온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새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도덕보다 실용을 강조한다. 전쟁으로 국권이 흔들리는 나라에 가서 자원을 빼앗아온다는 비난정도는 중요한 고려 사항이 아닐 듯하다. 도덕적이지 않으면 유능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자칫하면 인수위가 주도해 맺은 계약이 모두 휴짓조각이 될지도 모를 판이다.

기자명 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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