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정대세 선수(앞)는 ‘북한의 루니’로 불릴 만하다. 골 결정력과 체력이 탁월하다.
지난 2월20일 동아시아 축구선수권 대회 한국 대 북한 경기가 끝난 뒤 한국 축구팬의 관심은 자국 대표가 아니라 북한 팀 스트라이커에게 가 있는 듯했다. 군인처럼 짧게 깎은 머리에 눈꼬리가 길게 째진 청년의 이름은 정대세(23·가와사키 프론타레). 사흘 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선취골을 뽑아 이목을 끈 그는 이날도 한국에 1 ― 0으로 뒤지던 후반 27분 동점골을 넣었다. 수비 마크를 받아 넘어지는 와중에도 골키퍼를 넘기는 슛을 성공해 관중의 환호를 불렀다. 이 슛으로 그는 북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권 전체에서 스타가 되었다.

정대세 선수가 뜨면서 그가 한국 국적의 재일 동포 3세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왜 한국인이 북한 대표팀에서 뛰느냐는 의문이 든다.   답은 그의 성장 과정에 있다. 한국 언론에 따르면 정대세 선수 부모의 국적은 모두 한국이다. 하지만 정 선수의 어머니 이정금씨(57)는 필자에게 “내 국적은 조선(북한)이다. 한국 신문기사가 틀렸다”라고 말했다. 이정금씨는 일본 태생 동포 2세로 조총련계 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가 한국 국적인 것은 맞다. 부친 정길부씨(67)는 본적이 경북 의성으로 일본 태생이지만 조총련계 학교는 다니지 않았다. 당시 일본 법률에 자녀는 아버지의 국적을 따르도록 되었기 때문에(지금은 부모 국적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정대세는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한국 국적이 되었다.

정대세가 아버지 국적 한국보다 어머니 국적 조선의 대표팀을 택하게 된 계기는 16년간 다닌 민족학교 영향이 컸다. 재일 동포 대다수가 그러하듯 정 선수는 조총련계 학교를 다녔다. 아이치 현의 아이치 조선제2초급 학교(당시)와 토순 조선초중급학교, 아이치 조선중고급 학교를 거쳐 일본 유일의 조총련계 대학인 조선대학교를 나왔다.

지난해 11월5일 필자는 가나가와 현 가와사키 구단 사무실에서 정대세 선수를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정 선수는 국적 문제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

"마음은 언제나 조선을 향한다"

“우리 학교에 쭉 다니며 자랐기 때문에, 당연히 마음은 조선을 향하고 있다. 마이너리티로 태어나, 일본에서 살아가면서 일본인에게 지지 않기 위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라든지 신념을 우리 학교에서 배웠다. 그게 내 운동의 동기 부여가 된다. 우리 학교에서 ‘재일 조선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자각했다. 이것은 일본인에게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의 고향은 ‘공화국’이며 그 출발점이 16년간 자란 조선학교에 있다. 앞으로도 이 마음은 변함없다.” 

그는 인터뷰 도중 ‘우리 학교’라는 말을 자주 썼다. 학생 시절 경험이 그의 정체성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는 말이다. 자기가 조선학교에 다닌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조선학교 출신을 핸디캡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조선학교에 갔기 때문에 불리한 점이 있을 거라고 말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을 나의 장점으로 바꾸면 된다. J리그에는 기술이 능숙한 선수가 많지만, 마음과 영혼이 가득 찬 선수는 적다.”

정대세 선수는 팬들에게 싸인을 해줄 때 반드시 ‘민족의 혼(民族の魂)’이라는 넉 자를 넣기로 유명하다. “내 활약으로 재일 동포에게 자랑거리를 주고 싶다.” 인터뷰 도중 자주 나온 말이다. 이것은 16년간 민족학교에서 축구를 해온 그의 인생관 자체다. 어머니 이정금씨도 “대세는 동포에게 응원받을 수 있는 선수가 되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대세의 버팀목은 우리 학교다. 그게 대세의 힘이다”라고 말했다.

정대세 선수는 “대학 때부터 조선(북한) 대표가 되려고 했는데 한국 국적자라 안 된다는 답을 들었다. 그 말을 듣자 설령 조선 대표가 되지 못하더라도 한국 국적은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도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지금 조선 대표가 되었기 때문에 다 괜찮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재일 동포의 특수한 역사적 위치를 고려해 정 선수의 북한 대표 출전을 인정해줬다.

대학에서는 '부끄러운 무리'와 시합

정 선수는 선수 생활 중 제일 괴로웠던 때가 대학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정대세가 진학한 조선대학교 축구부는 도쿄도 3부 리그에 속해 있었다. 프로 구단 스카우터가 경기를 구경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하위 리그였다. ‘이런 조건에서 과연 프로가 될 수 있을까…’ 불안과 싸우는 날이 계속되었다.

ⓒ뉴시스지난 2월20일 한국전에서 동점골을 넣은 정대세 선수(오른쪽 두 번째)가 환호하고 있다.
정 선수는 “도쿄도 3부 리그의 일본 대학 선수들은 경기에 지고도 실실 웃거나 담배를 피우곤 했다. 축구선수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나 자신은 프로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부끄러운 무리와 시합을 해온 것이다. 어떻게 하든 우리 팀의 레벨을 올려 프로에서 주목할 수 있는 시합에서 뛰자고 결심했다.” 마침내 조선대학교 축구부는 정대세의 활약으로 2005년 도쿄도 1부 리그에 승격된다(2007년에는 더 상위 리그인 간토 대학리그 2부로 승격했다).

행운은 우연히 찾아왔다. 2005년 제35회 일·북 친선 축구대회에서 조선대학교는 JFL(실업 리그)의 사가와큐빙 도쿄 SC와 경기를 했고 정 선수는 헤드트릭을 기록했다. 마침 그 광경을 일본 축구계에서 유명한 에이전트인 다나베 노부아키 씨가 관전했다. 그는 정대세 선수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스카우트한다. 이후 요코하마 마리노스, 주빌로 이와타, 벨마레 히라쓰카, 가와사키 프론타레 등에서 훈련에 동참하고 홍백전 연습 경기에 참가했다.

여러 구단에서 입단 제의를 받은 정대세는 처음 J리그(J1)로 바로 갈지, 아니면 프로 2부 리그인 J2 리그로 갈지를 고민했다. J2로 가면 선발 출장이 유리하다. J1은 레벨이 높지만 벤치만 지킬지도 모른다. 그때 정대세의 아이치 조선 중고급학교 축구부 감독인 리태용 감독(38)이 조언을 했다. “한다면 톱으로 도전해라.” 정 선수는 스승의 말을 받아들여 J1 리그의 가와사키 프론타레행을 결정한다.

프로 생활 1년차 때는 출장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2년째 중반부터 정규 포지션을 획득해 리그전에서 12득점, 챔피언스 리그와 컵 대회까지 치면 17골을 넣는 대활약을 펼쳤다.

DJ 보는 게 취미인 '분위기 메이커'

정 선수는 “J리그 1년차 때 경기에 많이 나가지 못해 분했다. 또래 선수들이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솔직히 부러웠다. 나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주목받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웃음).  1년차 때 시합에 못 나가 저축해둔 에너지를 지금 쏟아내는 느낌이다. 기회를 준 감독과 팀에 감사한다.”

J리그에서의 활약상은 북한축구협회에도 알려졌다. 그의 경기 비디오를 본 북한축구협회 관계자가 곧바로 대표 발탁을 결정했다고 알려진다. 2007년 6월 북한 대표로 첫 출전해 동아시아 선수권 예선 대회에서 8골을 넣어 대회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리고 올해 2월 동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깜짝 스타가 되었다.

그는 요즘 재일 동포뿐만 아니라 일본인 팬으로부터도 매우 인기가 높다. 쾌활한 성격 덕분이다. 축구 이외에도 디스크자키(DJ)를 보는 게 취미인데, 지난해 말에는 지역 라디오 방송 〈FM 가와사키 라디오〉에 출연해, 2시간 동안 DJ를 맡은 적도 있다. 북한 대표팀 안에서도 ‘분위기 메이커’로 사랑받는다고 한다.

정대세 선수의 향후 목표는 J리그 2008년 시즌 득점 양산과 2010년 월드컵 출장이다. 한국 축구 팬들은 3월26일 평양에서 열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3차 예선에서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듯하다. 한국 국민으로서는 그가 북한 대표로 뛰는 것이 아쉽겠지만, 국적을 떠나 그의 활약은 교포 사회에 자랑이다. 그의 바람이 이뤄진 것이다.

기자명 도쿄=김명욱 (스포츠 라이터)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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