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보수 세력들은 그리스가 ‘복지 때문에 망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진보 측은 그리스의 복지 지출이 유럽 최하위 수준이라고 강조한다. ‘복지망국론’은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현대사를 살펴보면, 한국의 진보·보수 양측은 반은 옳고 나머지 반은 그르다. 1970년대 말까지 그리스를 통치한 군부·우파 정부의 핵심 지지층은 관광·선박·금융 자본과 대도시의 소자영업자들. 이처럼 제조업 부문의 대규모 산업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 수입(법인세·소득세)도 적었다. 더욱이 군부·우파 정부는 강압 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지층을 ‘낮은 세율’로 매수했다.

이랬던 그리스가 유럽에서 최하위 수준이나마 복지국가의 틀을 갖추게 된 것은 1981년 사회민주당 집권 이후다. 사민당은 국민건강보험을 만들고 연금을 올렸으며 교육 시스템을 정비했다. 그러나 세금제도는 그대로 놔두었다. 세입은 그대로인데 복지 지출은 커졌으니 돈이 어디서 나오나? 특히 유럽연합(EU) 창설 이후에는 다른 회원국들로부터 돈을 빌려 조달해야 했다. 그리스가 재정위기와 외채위기를 함께 당한 이유다.


ⓒ뉴시스1월12일 서울YMCA 시민중계실 회원들이 어린이집만 대상으로 하는 영유아 무상보육 지원 정책을 바꾸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을 중심으로 복지 공약이 쏟아지고 있다. 대다수 시민은 이를 반긴다. 그러나 복지 공약을 수행할 증세 방안을 공공연하게 내놓는 정당은 없다. 증세로는 선거에 이길 수 없다는 정치적 난관 때문이다. 정당들과 일부 지식인들은 심지어 현재의 정부 지출을 약간 조정하거나 부자들의 세금을 올리는 것만으로 복지 재원을 충분히 조성할 수 있다는 환상까지 조장한다. 이에 따라 시민들은 복지 확대를 환영하면서 세금 인상은 꺼리는 마술적 사고에 빠져들고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우려를 뒷받침해줄 만한 실증적 연구 결과가 최근 나왔다. 최흥석 교수(고려대·행정학)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국민 시각에서의 국정 재설계〉가 바로 그것이다.

최흥석 교수 연구팀은 전국의 10~50대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6개 공공 서비스 부문(교육·보건의료·치안·아동복지·노인복지·고용지원)의 13개 항목에 대한 온라인 설문을 실시했다. 질문은, ‘정부가 복지 서비스를 확대할 때 어느 정도까지 세금을 더 낼 수 있느냐’는 것. 그런데 응답자들의 40% 정도가 대부분의 항목에서 세금 인상 자체를 반대했다. 나머지 60%는 ‘더 내겠다’고 했으나 그 폭은 결코 크지 않았다.

응답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더 내겠다’고 밝힌 영역은 ‘보건의료’ 부문이다. 여기서도 암 등 ‘중증질환 진단 및 치료’ 항목에는 67.9%가 증세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더 내겠다는 세금은 연간 2만1700원에 불과하다. 이외에 응답자들이 강하게 지지한 항목은 역시 보건의료 부문의 ‘응급의료체계 강화’(63.7%, 1만9400원), 아동복지 부문의 ‘공공보육시설 확충’(64.3%, 1만9000원), 노인복지 부문의 ‘기초노령연금 증액’(61.4%, 1만8700원) 등이었다. 이에 반해 교육 부문은 증세 반대가 거센 편이었다. ‘대학생 장학금 확대’는 응답자 중 46.2%가, ‘중·고등학교 정상화’ 역시 45.9%만이 세금 인상을 지지했다.


시민의 40%가 복지 확대를 위한 세금 인상에 반대하고 ‘기꺼이 더 내겠다’는 세금 규모 역시 ‘연간’ 1만원대에 그쳤다. 증세론자들 처지에서 보면 참담한 결과다. 그러나 조사 방법에 따른 한계가 있긴 하다. 이 조사는 시민들이 ‘더 내겠다’는 세금 규모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내겠다’는 돈의 규모를 통해 시민들이 우선적으로 선호하는 복지 서비스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예컨대 ‘더 내겠다’는 돈의 규모가, ‘중증질환 진단 및 치료’에서는 2만1700원인데 ‘대학생 장학금 확대’엔 1만8100원에 불과했다면, 정부 재정을 ‘중증질환’ 쪽에 먼저 투입할 필요가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정치권 공약으로 보면 대선 이후 당장 복지국가가 건설될 것처럼 보이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설문결과가 나온 것은 그리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최흥석 교수는 “의외로 시민들이 증세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서 놀랐다. 정치권이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시민 입장에서 정책 우선순위를 파악해가며 행정을 펼쳐야 한다”라고 말했다.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증세 분야 엇갈려

단, 연구팀은 시민들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밀접한 복지제도에는 적극적 반응을 보인다는 점도 발견했다. 최흥석 교수팀의 한승주 연구교수는 “응답자들이 ‘나에게 필요한 것에는 더 내겠다’고 하는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응답자 답변에서 ‘세금인상 반대율’이 두 번째로 높은 ‘대학생 장학금 확대’가 좋은 사례다. 일단 ‘더 내겠다’고 한 응답자들은 3만9100원까지 증세할 수 있다고 답변했는데, 이는 전체 항목을 통틀어 가장 높은 액수다. 대학생 자녀를 둔 40~50대 장년층에서 특히 지지율이 높았다. 사적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연령별로 봐도 이런 경향이 뚜렷하다. 20~ 30대 청년층은 ‘공공보육시설 확충’ ‘보육비 지원’을 선호했다. 이는 출산을 앞두거나 양육 중이라는 20~30대의 경제적 사정 때문일 것이다. 이에 비해 40~50대 장년층은 ‘기초노령연금 증액’ ‘응급의료체계 강화’에 더 많은 세금을 내겠다고 했다.

소득 수준으로 보면, 월소득 500만원 이상 집단이 주로 보건의료와 노인복지 부문에서 저소득층 및 중산층보다 ‘더 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는 부자 증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월소득 200만원 미만인 저소득층의 경우, 실업급여 확대와 보육 지원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정치 성향별로는, 의외로 진보·보수 간에 ‘더 내겠다’는 돈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진보 성향 응답자들이 보수에 비해 더 높은 증세 의향을 보이긴 했으나, 그 차이는 “통계적으로 무의미한 정도”라고 연구팀은 밝혔다. 보수 성향 응답자의 경우, ‘중증질환’ ‘노인건강검진’ ‘민생치안 강화’ 등에 더 많은 세금을 내겠다고 답변했는데, 이는 ‘보수’에 고연령층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중도 성향 응답자들은 진보·보수에 비해 ‘더 내겠다’는 돈의 규모가 크게 낮았다. ‘중증질환 진단 및 치료’의 경우, 보수는 2만3400원, 진보는 2만2500원을 더 내겠다고 한 반면 중도는 1만7000원에 그쳤다. 한승주 연구교수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큰 차이가 없어서 이채로웠다. 자신을 진보나 보수로 규정할 정도로 사회정치적 관심이 큰 응답자들은 대체로 ‘더 내겠다’ 성향이 높은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복지를 주장하는 정당이라면 재정 마련 방안은 물론 정부 지출을 시민생활 개선으로 확실히 연결시킬 수 있는 경로, 이를 단행할 수 있는 정치력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 한국 정치권의 증세 없는 복지 공약들은 그리스로 가는 포퓰리즘 급행열차에 불과하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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