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신구 국문 협정본의 번역 불일치가 2600건에 달한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법적 의미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어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주요한 번역 오류도 지난 6월 정부가 발표한 296건보다 훨씬 많은 500여 개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번역 오류를 수정했다는 2011년 국문본에서도 새로운 번역 오류가 발견되었다. 이는 정부가 제출한 새 번역본을 두고도 오역 논란이 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시사IN〉과 민주당 박주선 의원이 공동 기획한 ‘한·미 FTA 번역 오류 시민검증 프로젝트’의 검증 결과다. 오역 논란이 다시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올해 초 FTA 오역 논란이 불거진 이후, 외교통상부는 지난 6월 새로 번역한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정정이 필요한 오류 296개’와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전달하려는 문구 개선 상당 부분’을 수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외통부는 어느 대목을 어떻게 수정했는지 밝히는 정오표를 제출하라는 야당의 요구를 계속 거부했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9월 국회에 출석해 야당의 정오표 제출 요구에 “수정안을 공개한 지 석 달이 넘었으면 관심이 있는 분들은 볼 만큼 다 보셨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시사IN 윤무영

 


이에 〈시사IN〉과 박주선 의원실은 10월18~30일 시민 85명이 참여하는 시민검증단을 꾸려 직접 정오표를 만들었다(〈시사IN〉 제215호 참조). 〈시사IN〉 홈페이지와 트위터를 통해 자원한 시민검증단은 1300쪽에 달하는 2008년 FTA 국문본과 2011년 국문본을 나누어 맡아, 정부가 어떤 대목에서 번역을 수정했는지 일일이 대조했다. 시민검증단이 초벌로 확인한 내용을 박주선 의원실과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국제금융통상위원회가 최종 검증했다.

그 결과, 띄어쓰기나 이탤릭체 변경 등 내용에 영향을 주지 않는 단순 교정을 제외하고도, 모두 2600건에 달하는 번역 수정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됐다. 이 중 법률적 의미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는 주요 오류만 해도 500여 개나 된다고 박주선 의원실은 밝혔다. 정부가 발표한 296개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조합이 ‘협회’로, 신탁회사가 ‘신탁’으로

박 의원은 또 오류를 수정했다는 2011년 수정본에서도 새로운 번역 오류가 발견된 만큼 전면 재검증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 예로 부속서 Ⅱ 미국의 유보 목록 중 부록 Ⅱ-가 ‘시장접근개선사항’에서 도로화물운송~화물운송대리 서비스 분야를 보면, 수정 과정에서 오히려 오역이 심해졌다. 즉, 해당 항목의 오역(공급형태 1~4에 모두 해당하는 표현을 공급형태 4로만 제한하는 오역)은 놓아둔 채, ‘국내 운송에 관한’이라는 제대로 된 번역만 삭제하는 엉터리 수정 작업을 한 것이다. 이 표현은 다음 항인 화물처리 서비스 분야에 엉뚱하게 삽입됐다. 박주선 의원은 “시민검증 프로젝트를 통해 2011년 국문본에서도 여전히 번역 오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라고 말했다.

오류를 수정했다는 2011년 국문본의 표현 중 몇몇은 법적으로 적절한지 의문이어서 정부의 설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부는 협정문에서 기업의 한 유형으로 제시된 파트너십(partnership)을 2008년 국문본에서는 ‘합명회사’로 번역했다가 2011년 국문본에서는 ‘파트너십’으로 수정했다. 하지만 합명회사는 상법 178조 이하에서 규정하는 법적 개념인 반면 파트너십은 법적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용어이므로, 법률 용어를 대체한 이유를 정부가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고 박주선 의원실은 지적했다. ‘조합’이 ‘협회’로, ‘신탁회사’가 ‘신탁’으로 바뀐 것 역시 마찬가지다.

기초적인 용어조차 잘못된 번역도 있었다. 제3.2조, 제6.1조 외 다수의 조항에서 ‘또는’을 ‘및’으로 변경했다. ‘또는’이라는 표현이 양자 중 어느 한 요건이 충족되면 법적 효력이 생기는 ‘합집합’인 반면, ‘및’으로 변경되면 두 조건 중 ‘교집합’만이 충족 요건이 된다. 이 밖에도 ‘초과’를 ‘이상’으로(부속서 4-가 다수), ‘이하’를 ‘미만’으로(부속서 4-가 다수), ‘군복무자’를 ‘병역의무자’로(부속서Ⅱ 대한민국 유보목록 커뮤니케이션 서비스) 번역하기도 했다.

 

 

 

 

 

 

ⓒ뉴시스10월20일 국회에서 열린 한·미 FTA 토론회에서 반대 측 진술인들이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아예 관련성이 없는 엉뚱한 단어로 번역한 경우도 있었다. ‘유자격자 명부’를 ‘다용도 명부’로, ‘세금’을 ‘이윤’으로, ‘옮겨서’를 ‘제거하고’로 번역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영문본의 주요 부분을 아예 번역하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 ‘분상의 밀크 또는 크림’을 ‘분유’로만 번역한다거나, ‘냉장 및 냉동’을 ‘냉동’으로 번역해놓은 것이 그런 예이다. ‘거래’를 ‘무역’으로, ‘가격’을 ‘가치’로 번역한 것처럼 번역 오류로 법적 효력이 달라지는  대목도 있었다.


시민 85명 참여해 이뤄낸 성과

이 같은 ‘정오표’를 얻기까지 시민검증단의 도움이 컸다. 이들을 움직인 가장 큰 동력은 ‘정부와 여당에 대한 불신과 답답함’이었다. 황영수씨는 해외 출장 일정을 이틀이나 미루면서 작업에 참여했다. 해외에서도 참여가 줄을 이었다. 미국에 거주 중인 한 주부는 아이들에게 밥 해줄 시간을 줄이기 위해 라면을 먹여가며 대조 작업에 매진했다고 밝혔다. 캐나다의 한 유학생도 공부 시간을 쪼개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생각보다 많이 나오는’ 번역 오류에 놀라고, ‘단순히 오류라고 보기 힘든 번역’에 또 한번 놀랐다. 직장인 이은성씨는 작업을 하는 동안 협정문을 들여다보며 여러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비교하는 작업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내가 한국인이고 적힌 글씨가 한글인데도 조항을 명확히 이해하기가 참 힘들었다. 이처럼 중요한 사안일수록 우리 같은 일반인이 읽고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작업을 총괄한 민변 정석윤 변호사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정부 통상정책의 문제점을 밝혀낸 획기적 사례다. 500건이 넘는 오류가 확인됐고 2011년 번역본에서도 새 오류가 발견된 만큼, 정부가 오역 수정 작업을 제대로 했는지 의문이다. 정오표를 공개하고 제대로 된 검증을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박주선 의원 역시 “국회가 내용을 제대로 검토할 수 있도록 FTA 강행 처리 방침을 철회하고 즉시 정오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번역오류 전문이 궁금한 분은 아래를 클릭할 것.
  http://www.parkjoosun.pe.kr/bbs/board.php?bo_table=lib&wr_id=24

 

 

기자명 천관율·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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