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모르면 사람들한테 물어봐야 할 것 아니냐고!”

20헤알(약 1만3000원)짜리 나이트클럽 입장권을 두 장이나 덜컥 사놓고,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입장을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난 애꿎은 조연출 녀석에게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댔다(그러고 보면 요새 유행하는 ‘유체이탈 화법’의 선구자는 필자인 셈이다). 

2008년 5월, 브라질의 관광도시 포스두이구아수(Foz do Iguau)의 하루는 길기만 했다. 전날 브라질 쪽 전망대를 촬영한 것을 시작으로, 아침 일찍부터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어 ‘악마의 목구멍(Garganta del diablo)’으로 향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에 넋을 놓을 틈도 없이, 지상 최대의 폭포가 연출하는 장관을 정신없이 카메라에 담다가 오후에는 폭포에 근접할 수 있는 소형 보트에 올라 떨어지는 물줄기를 직접 몸으로 맞아가며 촬영을 하고 돌아온 참이다.  

 

ⓒ탁재형 제공이구아수 폭포 앞에 선 탁재형 PD.

 


가슴을 짓누르던 커다란 중압감이 사라지자, 스스로에게 작은 포상을 해주고 싶어졌다. 밤공기가 후끈한 포스두이구아수에서도 가장 뜨겁다고 소문난 곳, 삼바 리듬과 아름다운 브라질 아가씨의 육감적인 몸짓이 교차하는, 아니 할 것으로 예상되는 나이트클럽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저녁 8시에 표를 살 때는 아무 말 없다가 문 안쪽으로 들어가려니 무섭게 생긴 흑인 아저씨가 저지한다. 두 시간은 더 있어야 영업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저씨의 인상을 보아하니 환불해달라고 했다간 나의 육신을 환불해야 하는 사태가 일어날 듯싶고, 그렇다고 입장권을 포기하자니 나의 ‘쪼잔함’이 용납하지 않는다(뭐 그렇다고 브라질 아가씨의 춤 실력을 보고 싶은 욕망이 아예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어흠!). 

나이트클럽의 위치가 시내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 주변은 황량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데, 두 시간을 버틸 장소를 찾다보니 맞은편에 포장마차처럼 생긴 간이주점이 눈에 들어온다. 길지 않은 음료 목록에서 가장 윗줄에 쓰인 것을 주문하자, 인상 좋게 생긴 흑인 청년의 손이 바빠진다. 익숙한 솜씨로 라임을 썰어 셰이커에 넣고, 설탕을 넉넉히 뿌린 다음 작은 절굿공이 같은 것으로 찧기까지, 손놀림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보니 같은 동작을 하루에 수백 번씩 반복해서 얻어진 장인의 풍모가 엿보인다. 라임과 설탕이 사각사각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한 몸이 되자 잔 얼음을 넣고, 마지막으로 선반에서 투명한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셰이커에 붓는 것으로 준비는 끝인 모양이다.  


서인도제도에선 럼, 브라질에선 카샤사

 

 

 

 

브라질 칵테일 카이피리냐는 카샤사와 라임을 섞어 만든다.

 

발사 준비를 마친 우주선처럼 입구가 봉해진 후, 공중으로 치솟아 리드미컬하게 뒤섞여 우리 앞에 착륙한 음료의 이름은 카이피리냐(Caipirinha). 페루의 피스코 사워, 쿠바의 쿠바 리브레와 함께 남미를 대표하는 칵테일 중 하나다. 심플 이즈 더 베스트(Simple is the best). 카이피리냐의 맛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특별히 숨어 있는 뒷맛을 분석해보려 시도할 필요도 없이, 신선한 라임을 충분히 넣은 성실함이 맛에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는 단순함. 열대의 칵테일이 대부분 그러하듯, 카이피리냐 역시 열기에 지친 심신과 미각을 단숨에 균형 상태로 되돌리는 힘을 가졌다. 

설탕과 라임이라는, 너무나 친숙한 재료들에 더해져 카이피리냐의 독특함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브라질의 대표적인 증류주 카샤사(Cachaa)다. 사탕수수로 만드는 이 술은 럼(Rum)과 형제지간이지만, 럼은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정제하고 남은 당밀 시럽을 주원료로 하고 카샤사는 발효된 사탕수수 즙 자체로 만든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증류 후 나무통 숙성 과정의 여부에 따라 화이트(증류하자마자 바로 병에 넣은 것)와 골드(나무통에서 3년간 숙성시킨 것)로 나뉘는데, 카이피리냐에는 향이 더 단순한 화이트 카샤사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분(糖分)이 있는 곳에서 알코올 발효가 일어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면, 설탕의 원료가 될 만큼 당분이 풍부한 사탕수수는 대단히 매력적인 술의 원료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인은 16세기에 남미를 식민지화한 이후 포도를 가지고 술을 만드는 데에만 골몰했기 때문에, 사탕수수로도 멋진 술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설탕 공장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노예들이었다. 설탕을 만들기 위해 짜낸 사탕수수 즙(또는 당밀)을 방치해두면 발효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서인도제도에선 럼이, 브라질에선 카샤사가 태어났다. 탄생 초기, 노예나 먹는 싸구려 술로 매도당했던 것에 비하면 카샤사의 위상은 놀라울 만큼 달라졌다. 브라질에서만 4000가지가 넘는 카샤사가 생산되는데, 2007년 한 해에만 15억ℓ가 소비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상당량은 카이피리냐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으리라.  


“야 이 자식아! 너까지 자버리면 어떻게 해!”

 

 

 

 

브라질에서만 4000가지가 넘는 카샤사가 생산된다.

 

둘 다 그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카이피리냐의 상큼한 맛에 반해 그 안에 40도가 넘는 카샤사가 듬뿍 들어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연거푸 세 잔이나 마셔댄 탓이다. 아침부터 강행군이었던 일정상 무리도 아니다. 침을 닦으며 고개를 드는 조연출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나서 시계를 들여다보니, 이런, 두 시간이나 지나 있다. 

나이트클럽 앞에는 200m는 족히 될 만한 긴 줄이 늘어선 지 오래다. 은행을 가도, 공항을 가도 일단 줄이 한 번 서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브라질 상황을 감안할 때, 새벽 두 시 이전에 저 나이트클럽에 들어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맞다. 망할 놈의 카이피리냐! 

“세 벤데, 잉그레소스! 뜨레인따 헤아이스!” (표 있습니다! 30헤알이에요!)

암표 장수 한 명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세…벤데…잉그레…소스….”

한국에서 온 ‘초보 암표상’ 한 명이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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