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http://wikileaks.org)에 공개된 미국 외교문서는 모두 25만1287건. 이 가운데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작성된 것이 1980건이다. 그렇다면 이를 제외한 24만9307건은 모두 ‘딴 나라 이야기’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한국을 제외한 각국 미국 대사관에서 작성한 문건 가운데에서도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자주 엿볼 수 있다.

각국에 주재한 미국 대사관 관리들은 북한 정세나 남북 관계의 변화에 관해 정보를 모을 때마다 본국에 보고했다. 한국 외교 관리들이 외국에서 벌이는 행태를 기록한 문서도 여럿 등장한다. 위키리크스에서 공개된 문서를 통해, ‘미국 대사관이 본 세계 속의 한국’을 오롯이 확인할 수 있다.


■주중 북한 영사
“핵 프로그램은 자기 방어용일 뿐”

미국 외교문서에서 대한민국을 뜻하는 코드는 ‘ROK’ 혹은 ‘KS’. 이 코드가 포함된 문서를 가장 많이 생산한 미국 대사관은 중국에 주재한 베이징 대사관과 선양·상하이 영사관이다. 주로 북한과 관련된 내용이 많은데, 북한 외교관과 만나 나눈 이야기나 중국 관리·학자들이 내다보는 북한 정세, 남북·북미·북중 관계를 정리해 본국에 보고하는 형태이다.


ⓒXinhua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2009년 9월4일 작성된 주 선양(瀋陽) 미국 영사관 문서에는 한 무역 행사에서 만난 북한 외교관과의 대화 내용이 담겨 있다. 장경일이라는 북한 영사는 미국 대사에게 60년 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 대해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북한은 미국 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절대 선제적으로 핵무기를 쓰지 않을 것이며 우리 핵 프로그램은 순수한 자기 방어용일 뿐이다” “2000년에는 북·미 관계가 좋았지만 부시 대통령 취임 후에 모든 기대가 뒤집혔다”라는 말도 했다. 장 영사는 급작스러운 미국 정치환경 변화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미국의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들기도 했다고, 미국 대사는 문서에서 전했다.

평양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는 중국 관리와의 면담 내용을 전하는 2009년 9월30일자 선양 영사관 문건도 흥미롭다. 이 만남에서 중국 관리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에 제안한 ‘그랜드 바겐’과 관련해 “북한은 더 이상 남한 정부 ‘꼭두각시’(puppet)가 하는 말과 행동에 관심이 없다”라는 북한 측 의중을 미국 대사에게 전했다.

한반도 통일 뒤 중·미 관계에 관한 중국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언급도 미국 대사관 문서에 등장한다. 2009년 2월3일자 문서에 따르면 한 중국 국제관계학 교수는 “한반도 통일은 미군과 중국 국경 간의 완충지대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미리 중·미 간 군사 교류를 시작하면 향후 미군에 대한 중국인의 우려를 완화시키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도 높일 수 있을 것이다”라며 미국에 군사 협력을 제안했다.


■주러시아 한국 외교관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 관계 불편”

ⓒXinhua북한과 러시아 철도 기술자가 철로를 교체하고 있다.
북한과 가까운 또 다른 이웃 나라인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도 한반도에 관한 문건이 많이 생산됐다. 2008년 10월31일자 모스크바 미국 대사관 문서에 기록된 한국 외교관의 발언에 따르면, 공식적으로는 남북 간 긴장이 존재해도 제3국에 파견된 남북 외교관들은 사적으로 화기애애한 관계를 유지한다. 특히 한인 3만5000명이 거주하는 러시아 극동 지역에선 두 나라 외교관들이 같은 행사 자리에 초대돼 자주 만나면서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선 더 이상 예전처럼 관계가 편안하지 않다”라고 문서는 전했다.

2009년 10월23일자 블라디보스토크 미국 대사관 문서에는 북·러 국경지역인 러시아 하산(Khasan)에서 본 북한 노동자들 이야기가 담겨 있다. 화·금요일, 일주일에 두 번씩 러시아의 숲, 건설 현장, 생선 가공공장으로 향하는 북한 노동자들이 한 량짜리 열차를 타고 온다는 것이다. 북한 두만강시와 러시아 하산 시를 잇는 열차표 가격은 5달러 아래라고도 전했다. 또 문서는 “하산에는 주점과 사우나가 갖춰진 호텔도 있지만 북한 노동자들은 거기에 묵을 만한 여력이 없다” “러시아 여행자들은 500달러 이하면 북한 해변에서 7일 동안 충분히 묵을 수 있다”라는 하산 현지인의 말도 기록해놓았다.


■주일 미국 대사
 “한국이 미친 짓 할까봐 염려된다”

주일 미국 대사관에서는 한·일 관계의 변화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본국에 자주 보고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한·일 간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독도와 관련된 문서이다. 2006년 4월18일 주일 미국 대사관 문서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은 라종일 주일 한국 대사에게 “한국이 국제수로기구(IHO) 해저지명소위원회(SCUFN)에 동해 해저지명 등재 신청을 포기하면 일본이 독도 주변 수로 측량 계획을 중단하겠다”라는 비밀 제안을 했다. 당시는 독도 주변 해역에서 수로 측량 및 해저지형 조사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일본에 맞서 한국이 국제수로기구 소위원회에 독도 해저에 한국식 지명을 등록하겠다고 발표해 한·일 간 갈등이 불거진 상태였다.

이틀 뒤 작성된 문서에서는 그간 독도 문제에 중립적이었던 미국의 공식 입장과 사뭇 다른 미국 대사의 발언이 발견된다. 2006년 4월20일 야치 쇼타로 외무성 사무차관과 만난 토머스 시퍼 주일 미국 대사는 “일본은 국제법 범위에서 움직이는 데 반해 한국은 비합리적으로(irrationally) 행동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미친 짓을 해(do something crazy) 중대한 문제를 일으킬까봐 염려하고 있다”라고 일본을 편들었다.

■일본 내 한국 전문가
“박근혜가 한·일 관계 개선할 것”

한국 대통령의 성향에 따른 한·일 관계 변화도 미국의 주요 관심거리이다. 2006년 7월27일 주일 미국 대사는 일본 내 한국 전문가인 오코노키 마사오를 만나 한·일 관계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오코노키는 미국 대사에게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반미·반일 민족주의자 조언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향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대선 후보가 선출되면 한·일 관계가 개선될 것이다. 일본인들은 박근혜의 민족주의를 좀 더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일왕 부부를 만났다.

이명박 정권에서 한·일 관계는 다소 달랐다. 2009년 4월13일자 주일 미국 대사관 문서는 “이 대통령은 개인적으론 강력한 한·미·일 안보 협력을 바라지만, 그의 약화된 정치적 입지와 대중의 한·일 군사 협력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그 바람을 드러내기가 어렵다”라는 주일 한국 외교관의 설명을 실었다. 이에 미국 대사는 “3자 간 안보 협력 강화를 위해 한·일 양국 사이에서 미국의 감독과 주도적인 개입이 필요할 것 같다”라고 의견을 덧붙였다.


■브라질 관리
“한국 외교, 무디고 너무 딱딱하다”

외국에서 일어나는 우리나라 외교 행태를 엿볼 수 있는 문서도 눈에 띈다. 대표적인 것이 이명박 대통령이 브라질을 방문한 직후인 2008년 12월4일 브라질리아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작성한 문건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이 대통령과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만난 정상회담 자리에 참석한 한 브라질 관리는 “비즈니스맨 경력 때문인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아주 다르게 이 대통령은 북한 문제, 유엔 개혁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라고 불평했다. 이에 대해 미국 대사는 “그의 이 발언은 브라질 외교관들이 ‘최근 한국 외교는 무디고 너무 딱딱하며(blunt and too rigid),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tends to simplify excessively)’라고 말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라고 문서에서 전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이명박 대통령과 룰라 브라질 대통령.


■김병호 키르기스스탄 대사
“내 활동 목적은 기독교 선교”

한국 외교 대사가 기독교 선교사를 자처한 사실도 드러났다. 관련 문건은 2008년 12월29일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작성한 것으로, 당시 미국 대사가 키르기스스탄에 새로 부임한 김병호 대사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독교 신자인 김 대사는 미국 대사에게 “이곳에서의 가장 큰 활동 목적은 한국인 기독교 선교 활동을 보호·지원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김 대사는 한국 정부 내 기독교의 영향력에 대해 언급하며 “급속히 기독교화돼가는 한국에 대한 불교·유교 신자들의 반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대통령으로부터 (선교) 권한을 부여받았다”라고 말했다고, 미국 대사는 문서에서 전했다.


ⓒ뉴시스김하중 전 통일부 장관.
김 대사는 자신이 추구하는 ‘개종(改宗) 대사(proselytizing Ambassador)’의 롤 모델로 주중 대사를 지낸 당시 김하중 통일부 장관을 꼽았다. 그는 “김 장관이 주중 대사이던 시절 지하 교회에 자주 방문했지만 ‘성령이 그에게 언제 어떤 교회를 방문할지 알려준 덕에(the Holy Spirit Himself told him which churches to visit and when)’ 중국 공안 당국에 발각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또 “김 장관은 손을 들어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이 있다”라며 중국 공산당 주요 간부인 자신의 친구 사례를 들었다. 김 장관이 그의 병을 치유해준 덕에 그 친구가 한국 지하 교회의 존재를 알고도 묵인했다는 것이다. 김 대사는 “(통일부 장관이 된) 김 장관이 이제 ‘신이 주시는 영감(Divine Inspiration)’을 받아 북한에 복음을 전파하고 마침내 통일까지 이루길 기대하고 있다”라고도 말했다.

이런 김 대사의 발언에 대해 타티아나 러 키르기스스탄 주재 미국 대사는 “(그의 강한 선교 의지는) 이곳 관리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라고 논평했다. 또한 “한국은 2008년 상반기 1730만 달러를 투자해 이곳에서 세 번째로 큰 투자국으로 부상했는데, 김 대사는 이런 한국인의 투자 활동마저 종교적인 것으로 그 공을 돌리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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