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잘지냈어요’ 헤어진 지 한 시간이 안 된 승아(가명)가 보낸 문자였다. ‘그럼. 밥은 먹었어?’ ‘나밥먹었어요언니밥먹었어요’ 띄어쓰기는 안 해도 존댓말과 주어는 꼭 붙인다. 첫 만남부터 그랬다. ‘나박승아 나21살’ 수첩에 적어준 자기소개다. ‘언니살고어디있어요’ 대화가 길수록 어순과 맞춤법이 어긋났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언니뮈해요’라는 문자가 세 통 와 있었다. ‘언니보고싶어요’ 승아를 본 첫날이었다.

사람을 잘 따르는 승아는 말하지도 듣지도 못한다. 청각장애와 지적장애를 동시에 갖고 있다. 스물한 살이지만 여섯 살 수준의 지적 능력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각 정신지체장애 1급, 2급이다. 할머니는 섬에 산다. 어려서부터 특수학교에 맡겨졌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인화학교다. 부모가 멀리 살아서 주말에도 기숙사에 머물 때가 많았다. 승아는 이곳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수년간 성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학교의 행정실장·보육교사·시설장 등이었다. 주로 방과 후였다. 그 장면을 친구들이 지켜보기도 했다. 당한 건 승아만이 아니다.

 

ⓒ시사IN 조우혜

 


아이들을 성폭행한 가해자는 교직원이었다. 당시 교장은 설립 이사장 김 아무개씨의 첫째 아들, 행정실장은 둘째 아들이었다. 기숙사 원장과 시설장이 동서지간으로 얽혀 있었다. 가해자 중에는 교회 전도사도 있었다. 당시 사건을 조사한 국가인권위원회는 가해자 6명, 피해 학생을 총 9명으로 파악했다. 당시 꾸려졌던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원회(대책위)는 가해자 10명, 피해자 12명으로 피해 규모를 그보다 넓게 파악했다. 졸업생들도 뒤늦게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있었다. 성폭행 장면을 목격한 학생들도 간접 피해자다. 이들 대다수는 다른 도시로 거처를 옮겨 학교를 졸업했고, 지금은 직장 생활을 하거나 결혼을 했다. 2명은 대학에 진학했다.

당시 사건은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의 모티브가 됐다. 최근 개봉한 영화 〈도가니〉는 소설을 각색했다. 특수학교에 새로 부임한 교사가 은폐된 장애 학생들의 성폭행 사건을 고발하고 싸워나가는 내용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각각 3명으로 줄었다. 가해자는 교장·행정실장·특수교사. 피해자는 중복장애를 겪는 유리, 사실을 밖에 알리는 계기가 된 청각장애인 연두, 남동생과 함께 성추행을 당하는 남학생 민수다. 그중 유리 역이 승아와 많이 닮았다. 마침 승아를 포함해 소희(가명), 병준(가명) 등 사건 당사자 세 명은 광주의 지역아동센터 ‘홀더’에서 지내고 있었다.

9월20일, 홀더 공부방을 찾았을 때 승아는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홀더는 ‘홀로 삶을 세우며 더불어 살아가자’라는 뜻이다. 사건이 학부모와 내부 교사에 의해 알려질 당시부터 아이들을 지켜봐온 김용목 목사를 비롯한 대책위 사람들이 청각장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공부방이다. 보금자리인 그룹홈도 세 군데 있다. 김 목사는 “영화 때문에 관심을 가지는 건 반갑지만 극중 등장인물을 실제 아이들과 동일시하는 건 곤란하다. 낙인효과가 생길까 우려스럽다”라며 조심스러워했다.


“영화 속 폭행 강도는 실제의 3분의 1”

6년 전 실화가 소설과 영화로 이어지면서 실제와 픽션이 혼동돼 전해지기도 했다. 영화 속 주인공인 교사 강인호는 허구의 인물이다. 김 목사는 “허구면서도 허구가 아니다. 당시 대책위 관계자들의 캐릭터를 다 섞어놓은 인물이다”라고 말했다. 실체적 진실에는 근접하지만 폭행의 강도는 실제 사건의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한다.

승아는 〈도가니〉 예고편만 보고도 눈물을 흘렸다. 등장하는 아이가 자신과 닮아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2시간 상영시간은 견딜 자신이 없다. 6년 전 일이지만 끔찍했던 기억은 남았다. 사건 직후 승아는 충주로 학교를 옮겼다. 졸업 후 광주로 돌아와 홀더에서 지낸다. 취직을 한 적도 있지만 중복장애라 일이 쉽지 않았다.

승아가 사는 그룹홈은 공부방 인근 빌라다. 청각장애인 다섯 명이 사는 이곳을 ‘여홀더’라고 부른다. 방문한 날, 교복 차림의 중3 막내가 외출을 앞두고 주머니에서 도끼빗을 꺼내 앞머리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귀걸이 한쪽도 꺼냈다. 진짜 은인지 아닌지 한참 토론이 이어졌다. 여자 셋이 수다를 떠는데 집 안은 고요했다. 대신 손짓이 바쁘게 오갔다. 승아는 이곳과 공부방을 오가며 하루를 보낸다.

부엌 탁자 맞은편, 홀더의 남자 간사가 수화로 말을 건넸다. 승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람을 잘 따르지만 성인 남성은 예외다. 김유술 여홀더 교사를 향한 손짓이 다급해졌다. 어색하고 싫다는 수화였다. 간사가 자리를 비우니 표정이 밝아졌다. 승아는 서른 살이 되어도, 마흔 살이 되어도 남자친구는 싫다고 했다.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도 없다.

승아와 함께 그룹홈에 사는 소희는 영화 속 연두를 떠올리게 한다. 소희에게는 청각장애만 있다. 2005년에도 인화학교에서 승아와 기숙사 방을 같이 썼다. 소희도 당시 성폭행을 당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피했다. 중1이던 그때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디선가 넘어져 무릎을 절뚝거리며 기숙사로 올라가는데 행정실장이 다가왔다. 도와주겠다며 소희를 업었다. 향한 곳은 기숙사가 아니라 화장실이었다. 놀라서 발버둥쳤지만 방과 후라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강하게 저항하며 절뚝거리는 다리로 도망을 쳤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행정실장이 컴퓨터로 야한 동영상을 보며 자위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폭행은 방과 후,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 집중됐다. 부모가 없거나 통학할 형편이 안 되는 아이가 대부분이다. 청각장애만 아니라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에게 더 가혹했다. 콜라 한 잔, 사탕으로 유인했다. 소희는 행정실장이 승아를 성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가지 못하게 막은 적도 있다. 이런 소희의 경험은 영화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영화에서는 교사가 아이 얼굴을 세탁기에 넣는 장면이 나온다. 소희는 실제로 승아가 그런 일을 겪었다고 말한다. 당시 행정실장에게 돈을 받고 원조교제를 하던 선배들이 승아에게 성폭행 사실을 외부로 이야기했다며 보복성 폭행을 감행한 것이다. 방과 후 학교는 무법지대였다. ‘광란의 도가니’였다. 수화를 쓸 줄 아는 교사는 거의 없었다. 소희는 “수업 중에 그냥 들어왔다가 나가는 선생님도 있었다. 학교에서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최근에도 시내 식당에서 가해자 교사와 마주쳤다. 움찔했지만 서로 모른 척했다.

2005년 당시 꾸려진 대책위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김용목 목사는 모두 끝난 줄 알지만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영화의 결말처럼, 성폭행 혐의를 받았던 교사 일부가 복직했다. 성폭행 혐의로 형사 고발된 가해자 6명 가운데 4명이 기소됐지만 교장과 교사 1명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2명만 각각 8개월, 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노환으로 이사장이 죽고 교장도 췌장암으로 죽었지만, 친인척과 지인들이 여전히 학교에 있다(“무죄판결 받았다 나는 떳떳하다” 기사 참조).

 

 

 

 

ⓒ뉴시스2007년 7월,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가 국가인권위에 청각장애학생의 교육권 확보를 촉구하고 있다.

 


지난해 아이들끼리 모방 범죄 저질러

대책위는 지난 7년간 진실보다는 권력과 힘이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대책위 박찬동 집행위원장은 “교육청은 자기 소관이 아니라 하고, 경찰도 미온적이었다.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달라지는 게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라고 말했다. 영화 속 인권단체 소속 서유진 역(정유미)의 실제 모델이었던 활동가는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일종의 절망감이 한몫 했으리라는 짐작이다. 박 위원장은 “아직 우리 사회의 수준이 이 정도인가 싶은 좌절감이 들 때가 많다. 화가 날 땐 여건만 되면 나도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라고 말했다. 김혜옥 홀더 원장은 “우리가 그렇게 싸우는 중에도 2010년 아이들끼리 모방 범죄가 있었다. 아이들이 어디서 배웠겠나”라고 말했다.

요즘 홀더 관계자들의 고민이 깊다. 성폭행 피해를 당한 아이들의 유형은 두 가지다. 성을 극도로 꺼리거나, 성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거나. 후자가 오히려 난감하다. 성인이 된 아이들 일부는 독립을 바라지만 교사는 안심할 수 없다. 홀더는 사회적 기업으로 청각장애인들이 운영하는 카페를 준비 중이다. 수화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희의 꿈은 바리스타다. 종일 심심한 승아도 뭔가 일을 하고 싶다.


가해자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순간…

9월20일 저녁, 광주터미널 CGV 영화관에서 〈도가니〉 시사회가 열렸다. 인화학교대책위 관계자 등 280여 명이 함께 영화를 봤다. 성인이 된 사건 당사자들에게도 알렸지만 승아는 거부했고 소희는 일이 생겨 못 왔다. 당시 재학생이던 지영이(가명)는 보러 왔다. 지영이는 미술에 재능이 있어 대학에 진학했지만, 등록금이 없어서 한 학기 만에 휴학했다. 영화가 상영되자,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가해자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법정 장면에선 지영이도 눈물 닦던 휴지를 스크린에 던지고 싶었다. ‘충격’이란 단어의 입모양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자막이 올라가고 영화관에 불이 켜졌다. 안 온 줄 알았던 피해 당사자 병준이가 슬며시 일어섰다. 극중 학대받는 형제의 모티브가 됐다. 다시 홀더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병준이에게 수첩과 펜을 건넸다. 영화를 어떻게 봤냐고 물었다.  “영화를 다 봤는데….” 여기까지 쓴 후 한참을 망설였다. 옆 친구를 쳐다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너무 슬펐어요’라고 문장을 마쳤다. 다음 날 병준이는 긴 문자를 보내왔다. “슬프고 가슴이 답답했다. 잊고 있었던 일을 생각나게 해서 마음이 아프다. 진실이라니 믿겨지지 않고 해결이 빨리 됐으면 좋겠다.” 병준이에게 인화학교 일은 아직 진행형이었다.

대책위 대표,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끔찍”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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