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지난해 5월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
이명박 당선자가 ‘통일부(국정원)와 북한 통일전선부 관계(통·통 체제)’의 문제점을 들어 통일부 폐지 의사를 밝히자 곧바로 반론이 제기됐다. ‘통일부를 폐지할 경우 북한의 대남 창구인 통일전선부는 누가 담당하는가. 북한 정치 실세인 통전부가 반발할 게 뻔한데, 그렇게 되면 남북 관계도 경색 국면에 접어들 것이다’ 따위 논리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는 반대로 북한은 이미 통·통 체제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당 통일전선부와 내각 소속 민경련(민족경제협력연합회)을 중심으로 짜였던 지난 10년의 대남 사업 체계에 대한 개편 작업에 착수한 상태였다. 기자는 지난해 10월부터 약 3개월에 걸쳐 북한 내부의 대남 창구 개편 움직임을 면밀히 취재해왔다.

지난해 11월 초 북한 민경련을 파트너로 대북 사업을 벌여온 남쪽 NGO 단체들은 북한 측으로부터 매우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앞으로는 북한의 접촉 창구를 민경련이 아닌 민화협(민족화해협의회)으로 옮겨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두어 군데 단체만 남고 민경련이 담당해왔던 나머지 아홉 군데 이상은 새롭게 민화협을 사업 파트너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뉴시스지난해 11월14일 남북 총리회담이 열린 워커힐 호텔 로비에서 한덕수 총리(위 왼쪽)와 북한 측 김영일 내각 총리(위 오른쪽)가 손을 잡고 있다.
그런데 당시 이 사안을 둘러싸고 서울의 대북 NGO 단체와 베이징의 대북 전문가들 사이에   시각이 엇갈리는 일이 발생했다. 일단 사태의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엇갈리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민경련이 지난 10년 이상 남북 경협 창구 노릇을 해오는 과정에서 온갖 폐단이 누적돼, 이에 대한 조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민경련 간부의 수뢰 사건에서부터 하물며 원산지 증명 발급을 독점하면서 자행했던 여러 가지 횡포 등이 전부 문제점으로 거론됐다. 실제로 남한 측 NGO에게 민화협을 새 파트너로 삼으라는 통보가 오기 직전인 지난해 10월21~22일 민경련의 정운업 회장은 말할 것 없고 그의 측근 인사였던 민경련 베이징 사무소의 허수림 대표, 옌지(延吉) 사무소의 김용학, 단둥(丹東) 사무소의 오광식 등이 모두 소환되었다.

베이징과 서울의 체감 정도가 결정적으로 달랐던 부분은 바로 조사의 주체가 누구인가, 그리고 지난 10년간 아·태평화위와 더불어 남북 협력의 쌍두 체제를 담당해왔던 민경련이 해체 위기에 직면할 경우 누구로 대체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의외로 당시 국내 NGO 관계자들은 민경련에 대한 조사 주체로 당 통일전선부 산하 아·태평화위원회를 지목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일부에서는 보위부를 지목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아·태평화위가 주도하고 있고, 민경련의 빈자리 역시 아·태평화위, 나아가서는 통전부가 메우게 될 것이라는 추측이 대세였다. 북한 측이 민경련 대신 새로운 파트너로 민화협을 지목했고, 이미 많은 단체가 민화협으로 옮아갔음에도 민화협이 힘을 받을 것이라고 지적한 쪽은 한 군데도 없었다. 민화협의 실무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 따위가 민화협의 위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형성한 것 같았다.

깨져버린 아·태평화위 신화

‘썩어도 준치’라고 역시 아·태평화위의 위상은 대단했다. 이미 김용순·송호경·임동옥 등 쟁쟁했던 왕년의 멤버가 사망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는 DJ-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져온 아·태의 강력한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었다. 더군다나 지난해 노무현 정부에서는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었던 최승철이 통일전선부 부부장 타이틀을 달고 남북 정상회담 등 실무 책임자로 화려하게 떠올랐다. 지난 10년이 아·태평화위와 당 통일전선부의 시대였고 더구나 그 통일전선부가 전면에 나서 10월의 남북 정상회담까지 성사시켰으니, 남쪽 NGO로서 민경련을 대신할 기관은 역시 아·태평화위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들여다본 북한 내부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그 즈음 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10월30일부터 11월3일까지 현대 현정은 회장이 북한을 방문했다. 그 사이에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까지 이뤄졌다. 이를 계기로 현대는 그동안 논란이 거듭되던 개성 관광 사업권을 굳혔고 또한 새롭게 백두산 관광 사업권까지 획득했다. 현대의 북한 측 파트너는 아·태평화위이고, 실제로도 최승철 부위원장이 현 회장을 수행해 백두산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겉으로는 국내 NGO의 관측대로 아·태평화위가 힘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북한 쪽 내부에서는 정반대 얘기가 흘러나왔다. 김정일 위원장이 현정은 회장을 만난 것은, 정주영-정몽헌 회장이 시작한 현대의 10여 년에 걸친 대북 사업을 정리하는 의미가 강했다는 것이다. 개성 관광과 백두산 관광 사업권을 현대에 준 것도 정주영-정몽헌 회장에 대한 인간적 정리로 준 마지막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제 현대의 대북 사업은 금강산-개성-백두산으로 이어지는 관광 사업에 국한할 뿐 더 이상 신규 사업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였다. 이와 함께 아·태평화위 역시 현대의 기존 사업을 관리하는 것만으로 위상이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남쪽 언론에서 부동의 대남 실세라고 치켜세운 최승철 당 통전부 부부장의 위상에 대해서도 베이징의 시각은 서울과 매우 달랐다. 정상회담 이후 그의 지위가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일반적 관측과 달리, 그에 대한 내부의 비판이 점증했다. 더구나 지난해 11월 이후부터는 민경련에서 비롯된 개성 골프장 투자 유치금 횡령 사건의 여파가 그에게까지 미쳐, 당 조직의 감찰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태평화위나 통전부가 민경련 조사를 주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민경련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57쪽 상자 기사 참조).

민경련 감찰은 대남기구 개편 신호탄

민경련에 대한 감찰 결과는 지난 1월 중순에 이미 윤곽이 드러났다. 그 결과 민경련 정운업 회장은 죄질이 나빠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알려졌다. 통일전선부에 대한 감찰 결과는 1월 하순께 나올 것이라 한다. 따라서 최승철 부위원장을 비롯해 통전부 조직의 운명은 그때쯤에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지난 10년간 남북 대화 체제의 북한 쪽 주역인 통일전선부와 아·태평화위, 그리고 민경련 등이 현재 거대한 조직 개편의 회오리에 휩싸여 있다는 점이다. ‘통·통 체제’는 북한 권력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 북한은 이미 새로운 대남 창구를 준비 중이다. 누가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고 있으며, 새로운 창구란 무엇을 말하는가.

ⓒ연합뉴스북한의 실세는 당과 군의 실력자를 뜻한다. 위는 인민군 후방군관학교를 시찰 중인 김정일 국방위원장(가운데).
여기서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북한 내부에서 대남 전문기관과 실세 그룹은 전혀 별개라는 점이다. 간혹 국내 언론은 통일전선부나 최승철을 북한의 실세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잘못되었다. 이들은 실세라기보다는 대남 전문기관으로서 북한 내부 규정에 따라 그동안 대남 관계를 독점해왔을 뿐이다. 북한은 당과 군의 국가이다. 당이 북한 사회주의의 정신 가치를 대변한다면 군은 물리력을 대변한다. 따라서 북한의 실세란 당과 군의 실력자를 뜻한다. 당에서는 당 중앙위가 최고 권력기관이다. 통전부는 그 산하의 실무 부서에 지나지 않는다. 군은 보위사령부를 비롯한 김정일 위원장 직할 조직, 그리고 당·정·군을 통할하는 국방위원회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김정일 위원장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서기실 등 측근 그룹이 있고, 보위부 등 감찰을 담당하는 부서 역시 힘 있는 부서에 해당한다. 적어도 이들이야말로 북한이라는 주식회사의 실질적 대주주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대주주가 그동안 대남 관계는 통일전선부와 민경련 등 전문 부서가 담당한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 때문에 남쪽과 접촉을 하고 싶어도 어려웠다는 점이다. 어렵게 시도를 해도 통전부가 이미 쌓아놓은 국정원 및 통일부와의 관계 때문에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또한 실세 그룹 내부의 분열도 이들이 대남 관계에서 구실을 하기 힘들게 했다.

일본 간사이 대학의 이영화 교수가 지난해 11월호 월간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이들은 1999년 김정일 위원장이 선군 정치를 표방한 이래, 군사경제를 중심으로 한 선군파와 민생을 우선해온 개혁파로 갈려 엎치락뒤치락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한 달 전인 2006년 6월께, 북한 내부 김 위원장 측근 그룹(이영화 교수의 용어로는 ‘개혁파’이나, 북한 내부 용어로는 ‘경제부흥파’) 내에서 주목할 만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즉, ‘지금은 미국과의 정세가 좋지 않지만, 내년(2007년) 4월께면 풀릴 것이다. 그때부터 선군정치를 뒤로 물리고 실리주의에 입각한 경제개발에 전념할 것이다’라는 얘기였다.

ⓒ뉴시스지난해 서울을 방문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이런 얘기가 흘러나온 뒤 한 달 후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했고, 핵실험까지 나아가게 됐다. 그러고 나서 북한 내부에서는 ‘강성대국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며 군사적 강성대국은 이뤘으니 경제적 강성대국의 길만이 남아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영화 교수를 비롯한 몇몇 국내 북한 경제학자도 이같은 일련의 흐름에 대해 군부를 비롯한 선군파와 개혁파(경제부흥파)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서 서로 손을 잡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서로 손을 잡기 시작한 실세 그룹이 외부 협력 대상으로 주목한 게 바로 남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남쪽으로의 창구를 민경련과 당 통일전선부 따위 전문기관이 장악하고 있으며, 이들은 좀처럼 기득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던 중 2006년 10월 이들에게 기회가 왔다. 당시는 김정일 위원장이 핵실험 이후의 경색된 상황을 타개하려고 중국 방문을 시도하다 포기하고 남쪽과의 채널을 모색할 시점이었다. 남쪽과의 당국 간 채널인 당 통일전선부(당시는 아·태평화위)는 2006년 상반기 DJ 방북 무산, 열차 시험운행 불발 사건, 그리고 미사일 발사 직후 열린 장관급 회담 결렬 등으로 기능 부전 상태에 빠졌다.

이런 까닭으로 기존 당국 간 채널 이외의 다른 라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 과정에서 2006년 10월 측근 그룹이 전진 배치돼 남쪽과 대화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또다시 남과 북 전문기관의 연대, 즉 국정원과 통일전선부 채널에 의해 차단되었다.

2007년에 들어서자 실세 그룹은 방향을 바꿨다. 과거와 같은 비선 채널로는 명분을 얻기가 어렵다는 점을 통감한 듯하다. 그리고 당 통일전선부 같은 대남 전문기관을 저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 역시 형성됐다. 이들이 택한 방법은 합법 수단을 동원해 대남 전문기관을 자기 통제 아래 묶어놓고, 자기들의 욕구를 실현해줄 새로운 대남 창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런 움직임이 지난해 3월부터 본격화하고 있었다.

국방위가 당 통일전선부 장악

지난해 초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바로 국방위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우선 3월 중순쯤 국방위원회 참사였던 김양건이 통일전선부 부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대남 전문기관인 통일전선부장으로 발령받자 김용순 이래 무주공산이었던 통전부에 측근 실세 인물이 부임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내막은 이보다 훨씬 복잡했다. 그 뒤에 이루어진 변화와 같이 봐야 한다. 즉, 4월11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1기 5차 회의에서 인민군 총참모장 출신인 김영춘 차수가 연형묵 사망 이후 공석이던 국방위 부위원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전임이 되었고, 5월에는 이명수 전 인민군 작전부장이 다시 국방위원회 전임으로 임명되었다. 과거 국방위원들은 대개 다른 직책과 겸임했기 때문에 상설 권력기관이라고 하기 어려웠으나, 슬그머니 상설화한 것이다. 이때부터 국방위가 당·정·군의 실질적인 최고 의사결정기관으로 주목되기 시작했다.

국방위의 이같은 변신을 염두에 두고, 국방위 참사 출신인 김양건이 통전부장으로 취임했다는 사실을 연결해보면, 그 결론은 명확하다. 바로 국방위가 당 통전부를 장악해버린 것이다. 4월11일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주목할 만한 인물이 또 한 사람 등장한다. 바로 1994년부터 해운부장을 맡아온 김영일이 박봉주 대신 내각총리에 임명된 것이다. 이후 드러난 사실이지만 김영일은 김 위원장의 신임이나 본인의 추진력, 능력 면에서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2004년 기대를 모았으나 군과 통전부의 견제로 별다른 실적을 거두지 못했던 박봉주 총리 대신 다시 한번 내각의 위상 강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2007년 3~4월에 전격 벌어졌던 이같은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남쪽에서는 전혀 인식을 못했다. 그것은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측근 실세 그룹이 매우 조심스럽고 주도 면밀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원래 이들의 계획은 4월부터 전면 조직개편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 9월로 디데이가 미뤄졌다. 그것은 10월의 남북 정상회담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상회담 후속 절차를 그전처럼 통일부(국정원)-통일전선부에 맡기지 않고 곧바로 내각을 총괄하는 총리급 회담으로 하자고 북한이 먼저 제안하고 나선 데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남쪽에서는 북쪽의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했다가 적지 않게 당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점에서 볼 때도 북한 내부적으로는 9월 중에 이미 대남 창구 개편에 대한 ‘액션’이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경련이나, 아·태평화위에 대한 조처, 그리고 김양건이 최승철의 권한을 상당 부분 빼앗은 까닭 등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민경련과 아·태평화위는 지난 10년간의 남북 체제를 대표하는 두 기관으로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지 않다고 본 것이다. 민경련의 경우 수뢰 및 횡령 사건 조사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10년 체제의 주역이 해체되거나 축소된 자리에 새로운 대남 창구가 하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정부 대 정부 채널에서 주목할 것은 지난해 총리회담에서 보았듯이 북한 내각이 새로운 대화 파트너로 등장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미 지난해의 정상 간 합의문에 따라 총리회담의 틀 안에는 경협추위, 국방장관 회담 등이 있고 그 밖에도 다양한 소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부분은 차기 정부가 결정할 일이지만 정부 부처 간 협의 채널이 벌써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 다음, ‘국·통 체제’이다. 남쪽의 통일부가 폐지되면 남쪽 국정원과 북쪽 통전부 채널이 남게 된다. 과거와 같이 모든 것이 이 채널에서 독점으로 논의하는 외줄타기가 아니라, 남북의 상대방 체제에 대한 전문기관으로서 합당한 논의를 이어가는 것은 여러 면에서 필요하다.

세 번째는 북측 실세 그룹이 내심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최정상 간 채널이다. 이 채널은 상설화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나 핵문제나 안보상 긴급사항을 서로 필요할 때 언제든 의사소통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 이명박 당선자는 이미 청와대 직속으로 대북 문제를 담당하는 특임장관을 둘 예정이라고 하는데, 이 특임 장관의 북측 파트너를 어느 쪽에서 맡게 될지가 변수이다. 이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방한이 이뤄지면 그것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내각·민화협·대경추가 대남 창구로 유력

그 다음 민간 채널로 그동안 민경협과 아·태평화위 등이 해왔던 구실은 일단 통일전선부 산하 민화협이 맡게 될 가능성이 높다. 민화협은 앞으로 남한 NGO들의 대북 접촉 창구이자 북한 실세들의 대외 경제 활동 창구로서 기능하게 된다.

지난해 11월 초 여기에 또 하나의 조직이 추가됐다. 1995~1996년 활발하게 움직이다 사라졌던 ‘대경추(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의 부활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김정우를 위원장으로 했던 대경추는 주로 나진·선봉과 북·중 경협을 담당했던 조직이지만 1998~1999년 이후 무역성 산하 기구로 명맥만 유지해왔다.

대경추가 다시 대외경제 창구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바로 실세 그룹 내에서 민화협만으로는 대외 사업을 벌이기에 한계가 따른다는 아우성 때문이라고 한다. 즉, 앞으로 대남이든 대미, 대중, 대일, 대러든 대외 사업을 통해 먹고살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들 실세 그룹의 절박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던 대경추가 다시 간판을 달고 등장할 채비를 하는 것이다.

통·통 체제의 혁파가 남북 관계의 끝은 아니다. 그것은 남북 관계가 지난 10년의 제1기 단계를 마치고 새로운 2기로 접어들기 위한 진통일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좀더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협력관계로의 전환이 모색되어야 한다.

기자명 남문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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