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층은 당구장, 3층은 노래방이다. 이웃 건물도 죄다 모텔 아니면 주점이다. DVD방이나 호프집이 있으면 딱 어울릴 만한 경기 수원시 인계동 영성빌딩 4·5층에, 생뚱맞게 작가의 레지던시(일정한 기간 여러 예술가가 거주하며 창작·교류하는 프로그램) 공간이 들어섰다. 지난 6월18일 개관한 생활문화예술 재생 레지던시 ‘인계시장’이다. 조각가, 플로리스트, 그래피티 아티스트 등 다양한 예술 집단 열 팀이 여기에 둥지를 틀고 작품 창작을 시작했다.

인계시장이 들어선 영성빌딩 4·5층도 본디 안마시술소였다. 혹은 멀티방(노래방 기계, 컴퓨터, 게임기, 소파 등을 방에 갖춘 유흥시설)이었다는 소문도 있다. 인계시장의 디렉터 김월식씨 말마따나 “어쨌건 유흥업소의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이 공간이, 이런 ‘센’ 업종이 부담스러운 새 건물주와 연극을 제작하고 갤러리를 운영하는 후원자와 재밌는 일을 찾아나서는 예술가를 만나 ‘예술 종합선물세트’로 변모했다.

공간의 특수성이 오히려 예술가의 구미를 당겼다. 김씨는 “여기 처음 왔을 때 마치 중앙 홀이 관객석이고 각자 나눠진 방이 무대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방의 문짝을 다 떼면 그 속에 입주한 작가의 작업 현장을 ‘쇼잉’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꼭꼭 닫힌 방문 안에서 혼자만의 작업을 즐기는 예술가 대신,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작가들을 모았다.


ⓒ시사IN 백승기인계시장 작가·스태프들. 왼쪽부터 김나래·임송희·김월식·곽동렬·상게·김동현·손수희·송지은 씨. 가운데 앉은 이는 천원진, 누운 이는 김지수씨이다.


생활문화예술 재생 레지던시라는 명칭에 걸맞게, 인계시장의 공간은 또한 매우 ‘생활적’이고 ‘재생적’인 물품으로 가득 차 있다. 벽 테두리를 장식하다 버려진 금색 몰딩과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많이 쓰이는 파란색 플라스틱 들통과 분홍색 어린이 자전거 한쪽 바퀴가 의자로 탄생하고, 자개장롱 문짝이 탁자가, 맥주 궤짝이 아일랜드 식탁이 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보이는 ‘충무로역 필 나는’ 동굴 장식도, 입구에 걸어둔 소머리 장식도, ‘왜 노동의 가치를 알리는 동상은 없는가’라는 문제의식으로 만들었다는 독서소녀상도 모두 수레째 사들인 신문지·종이상자 같은 폐지로 만들었다.


재료 구하려고 단체로 쓰레기 줍기도

작가의 작업도 공간과 꼭 닮았다. 곽동렬 작가는 쓰다 버린 간판과 유리병, 종이 달걀판을 이용해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조명 기구를 만들고, 임송희 작가는 다 쓴 접착 테이프 대를 알록달록한 팔찌로 변신시키고, 송지은 작가는 버려진 무채색 헌 잠옷을 컬러 무늬로 되살리고, 박영준 작가는 버려진 동양화 표구에 현대 이미지를 스텐실 그래피티로 입히고, 한송이 작가는 시멘트·유리병·고무장갑·소고·배드민턴 채를 화분이나 화분 받침대로 사용하며, 천원진 작가는 폐가구를 숄더백과 악기로 바꾸고, 김도영 작가는 현수막으로 가방·옷·파우치를 만든다. 김월식 디렉터는 “재료를 구하기 위해 종종 작가가 단체로 카트(수레)를 끌고 쓰레기를 주우러 나가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꼭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변모시키고 창작해내는 작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셜 디자인 프로젝트팀 ‘이웃’의 송주희·김지수 씨와 네팔에서 NGO 활동가·트레킹 가이드로 활약하던 상게 셰르파도 인계시장 구성원으로 합류했다. ‘이웃’은 수원 주민이 참여해 스스로 문화·예술 공간과 콘텐츠를 꾸려나가는 ‘놀이 생협’을 기획하고, 상게 씨도 ‘히말라야 전문 트레킹 가이드와 함께 가는 한국 산행’과 다문화 교육 같은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상게 씨는 “이미 하던 NGO 활동을 지속하는 동시에 다양한 예술가의 아트 작업을 곁에서 보고 함께 배울 기회도 생겼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디렉터 김월식씨는 예술 작품뿐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일을 꾸준히 해왔다. 2007년에는 경기도 안양 인덕원역 근처에서 마을 학교를 열어 주민이 만두 가게 사장님께는 만두 빚는 법을, 권투 사범에게 어퍼컷을, 사진관 사진사에게는 영정사진 찍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했다. 지난해에는 안양시 박달동 한 고물상 한쪽에서 폐지 수거 할머니·할아버지의 재능을 지역 주민과 연계해주는 ‘무늬만 커뮤니티’ 프로젝트를 벌이기도 했다.


ⓒ시사IN 백승기인계시장의 작가들은 버려진 물건에 새 의미를 부여한다. 사진은 한송이 작가가 변형한 폐유리병.

쉽지 않았다. 김씨는 “서울 근교 자영업자로 하여금 마을 정주관(定住觀)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데, 권리금을 받고 가게를 넘긴 뒤 서울로 편입하려는 욕망이 워낙에 강했다”라고 말했다. 인덕원 프로젝트는 한 일간지 기사에 ‘실패한 미술 프로젝트’의 한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김씨는 “벽화나 조형물 같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으니 사람들이 ‘대체 어디다 돈을 썼냐’고 묻더라”라고 말했다.


한 달도 안 돼 예술과 지역의 만남 성사

이곳 작가들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예술’과 ‘지역’의 만남이, 문을 연 지 한 달도 안 돼 실제로 성사되는 경사가 났다. 수원시 한 환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던 김동현씨가 재활용 악기 제작을 의뢰하려고 인계시장 문을 두드린 것이다. ‘자원순환 송(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다)’ 같은 재활용 장려 노래를 만들고 부를 줄은 알지만, 멸치 상자 등을 재활용해 악기를 만들면 자꾸 부서지기만 해서 고민이던 김씨는 인계시장의 목재 전문 재활용 작가 천원진씨를 만나 새 악기를 손에 잡게 됐다.

스카이라이프 접시에 고물 기타통을 붙이고 장롱에서 떼어낸 자개로 장식을 하니 재활용 기타가, 폐스피커를 적절히 매만지니 밴드 10cm가 즐겨 쓴다는 아프리카 악기 ‘까혼’이, 쥐색 플라스틱 파이프 조각과 비닐을 조합하니 관악기 ‘카주’가 탄생했다. 김씨는 “이제껏 지역에서 소각장 반대운동, 쓰레기 성상 조사, 일회용품 안 쓰기 운동 따위 환경 캠페인을 늘 심각하게 해왔는데, 그렇게 해서는 관심을 못 끌더라. 이런 재활용 악기로 공연을 하면 관심 갖고 쳐다볼 것 같아 인계시장 작가들과 함께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눈에 보이는 증거를 남겨야 인정받는 미술 프로젝트 시장에서, 인계시장 프로젝트는 이렇게 또 한 번 ‘무형의’ 가치를 꾀하고 나섰다. “여기 이런 게 생겼다는 걸 어떻게 알고는 근처에서 밴드 하는 친구들이 놀러 와서 주말에 같이 공연도 했다. 이런 (유흥업소가 가득 찬) 동네에도 그렇게 노는 사람이 있더라.” 인계시장 디렉터 김월식씨가 자랑하는 프로젝트의 성과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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