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볼로냐 시는 ‘붉은 도시’로 불린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많아서다. 97m에 이르는 아시넬리 탑에 올라서 본 볼로냐 전경은 이 도시가 왜 그런 별명을 얻었는지 알 수 있도록 만든다. 볼로냐를 ‘붉은 도시’라 부르는 또 다른 이유는 좌파가 오랫동안 지방정부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이 도시의 사회주의자들은 무솔리니 파시즘 정부와 맞서 싸웠다. 볼로냐 시청 벽에는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다 숨진 이들의 사진과 이름이 적혀 있다. 1980년에는 우익 ‘백색 테러’로 85명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볼로냐 시민들은 그때 멈춘 볼로냐 중앙역의 시계를 폭탄이 터졌던 그 시각(오전 10시25분) 그대로 놓아두었다. 


빈곤 떨어낸 8000여 협동조합의 힘


ⓒ시사IN 차형석아시넬리 탑에서 내려다본 볼로냐 전경.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많아 ‘붉은 도시’로 불린다.

이런 역사적 전통을 가진 볼로냐는 협동조합이 발달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볼로냐 대학 스테파노 자마니 교수에 따르면, 볼로냐가 주도(州都)인 에밀리아로마냐 주는 1950년대만 해도 가난했다. 인구 430만명인 이 주는 이제 1인당 소득이 4만 유로(약 6100만원)에 이를 정도로 윤택해졌다(51쪽 상자 기사 참조). 그는 “그 중심에 협동조합이 있다”라고 말한다. 8000개에 이르는 협동조합은 에밀리아로마냐에서 생산하는 경제활동의 30%를 차지한다. 볼로냐만 한정할 경우, 협동조합 경제의 비중이 45%까지 올라간다.

20년 가까이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는 교민 김현숙씨에게도 협동조합은 친숙하다. 김씨는 “어디를 가도 협동조합을 접한다. 택시 기사들도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한다. 이곳 사람들은 ‘시장에 간다’는 말 대신 ‘꼽(coop)에 간다’는 말이 입에 붙었다”라고 말했다. ‘꼽’은 협동조합(꼬페라테)을 줄인 이탈리아 말이다.

그녀에 따르면, 소비자 협동조합에 가입할 때 25유로를 낸다. 우리 돈 3만8000원이다. 그러면 25유로 정도 장을 볼 수 있는 쿠폰을 보내준다. 한국에서 소비자 협동조합 매장이라고 하면 비교적 규모가 작고 농산물만 살 수 있는 곳을 연상한다. 하지만 볼로냐는 다르다. 공산품도 취급하고, 규모도 대형 마트급에서부터 작은 가게까지 다양하다. 그녀와 함께 찾은 볼로냐 외곽의 소비자 협동조합 매장은 한국의 ‘이마트’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꼽 콜라, 꼽 세제 등 ‘꼽 마크’가 붙어 있는 제품들도 눈에 띄었다. 협동조합에서 자체 생산한 제품이다. 김현숙씨는 “비조합원도 물건을 살 수 있다. 조합원에게는 마일리지 혜택이 있어 협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건에 대한 신뢰도도 높다”라고 말했다. 소비자 협동조합에서 새마을금고처럼 간단한 예금 수신 업무를 하기도 한다. 그 표현이 재미있다. 예금주라고 표현하지 않고, (소비자 협동조합에) ‘돈을 빌려주는 조합원’이라고 부른다. 이탈리아 일반은행보다 금리가 조금 높다.


볼로냐에서는 농민 협동조합, 소비자 협동조합 등 여러 협동조합 형태를 볼 수 있다. 감자·양파 재배 농민 협동조합 코메타(Co meta)를 찾았다. 코메타는 1968년에 만들어졌다. 감자·양파 농사를 짓는 농민 40명이 출자했다. 클라우디오 브린타졸리 코메타 이사는 “수확할 기간이 되면 가격이 갑자기 하락하거나 일부만 상인이 사가는 일이 많았다. 적절한 가격으로 판매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조합은 출자금을 모으고, 가공 기계 등을 구입했다. 양파 1만5000t, 감자 1만t을 처리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했다. 직접 포장까지 해서 매장에 공급한다. 농민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브린타졸리 이사는 “수입이 거의 두 배 이상 늘었다. 공동으로 저장고를 만들고 장기 보관이 가능해지면서 출하 시기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코메타는 매출액 1100만 유로(약 168억원)를 거두었다. 현재 코메타의 농민 조합원은 82명. 250유로(약 38만원)를 내면 심사를 거쳐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시사IN 차형석감자·양파를 재배하는 농민 협동조합 코메타는 생산에서 납품까지 공동으로 관리한다. 위는 코메타에서 작업하는 협동조합 직원들.

코메타는 조합원 참여를 중요시한다. 3년에 한 번씩 조합원 총회를 열어 7인 관리위원회를 뽑고, 이 중에서 조합 대표를 선출한다. 별도로 3인의 재무위원회를 두고, 7인 관리위원회가 재무위원회를 감독한다. 중요한 투자 사항이 생기면 7인 관리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조합원 총회를 따로 열기도 한다. 매년 이익의 3%를 조합 기금으로 적립하고 재투자에 사용한다.

협동조합은 때로 자회사 기업을 둔다. 그라나롤로(Granarolo)는 한 낙농 협동조합이 세운 낙농 기업이다. 조합원이 1000명에 이르는 낙농 협동조합이 세운 이 기업은 이탈리아에서 우유 시장 점유율 1위, 요구르트 점유율 2위를 기록하고 있다. 협동조합이 세운 이 회사의 주요 기능은 제품 품질을 고르게 유지하고, 출하 가격을 조절하는 일이다. 회사 기술자들이 1년에 두 번 목장을 방문해 품질관리를 한다. 법에서 정한 기준보다 더 엄격하게 품질관리를 한다. 공장에서 원유를 거두어 우유·생크림·치즈 등으로 가공한다(한국에도 이곳에서 생산한 치즈를 수입하는 업체가 있다). 홍보 담당인 클라우디아 실바니 씨는 “좋은 우유를 생산하면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다. 이윤 분배는 1년에 2회 여는 총회에서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실바니 씨는 “협동조합 기업은 일반 기업과 문화가 다르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한 다국적 IT 기업에서 7년가량 일하다 이 회사로 이직했다. “이전 회사에서는 개인 간 경쟁이 무척 심했고, 업무량도 너무 많았다. 이곳은 서로 협력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서로 힘을 합하고 여유로우면서도 일정 정도 품질을 유지하는 것. 그게 큰 장점이다”라고 말했다.

회사 구내식당에는 ‘탄자니아 어린이’ 사진이 붙어 있다. 이 회사가 하는 ‘아프리카 밀크 프로젝트’에 따른 것이다. 2004년부터 10년 계획으로 탄자니아 농민을 교육해 낙농 기술을 전파하고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을 돕고 있다. 이를 통해 탄자니아 사람 2만3000명을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목표라고 한다. 사회에 기여하는 것. 이는 협동조합의 주요 원칙 가운데 하나다.


ⓒ시사IN 차형석급식 협동조합 캄스트에서 운영하는 식당. 캄스트는 식당을 1200여 개 경영한다.

협동조합은 개인이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럿이 힘을 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별 협동조합이 하기 어려운 일은 협동조합끼리 협력해 추진한다. ICA(국제협동조합연맹)도 ‘협동조합 사이의 협동’을 강조한다. 볼로냐의 협동조합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한 ‘카라박’ 프로젝트를 예로 들 수 있다. 노동자 협동조합인 카디아이(CADIAI), 급식 협동조합 캄스트(CAMST), 건축 협동조합 치페아(CIPEA) 등 5개 협동조합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유치원 10개를 지었다. 각 유치원에 카라박1, 카라박2, 이런 식으로 번호를 매겼다. 유치원을 짓는 데 드는 돈을 협동조합이 공동으로 부담하고, 운영비는 지방정부에서 지원받는다.

유치원 설립은 각 협동조합의 특성을 발휘하기 좋은 프로젝트였다. 교육과 의료 지원 서비스를 주로 해온 노동자 협동조합 카디아이에서는 유치원 교사와 직원을 파견하고, 급식은 학교 급식 경험이 많은 급식 협동조합 캄스트가 담당하기에 적합했다. 카디아이의 라라 푸리에리 씨는 “시에서 부지를 제공하고 운영비를 지원하는 대신 20년 후에 유치원 소유권을 시로 이전하기로 했다. 20년 동안 우리는 조합원의 일자리를 얻는다. 카라박 유치원을 계속 짓고 있다. 협동조합이 협동해 얻어낸 성과다”라고 말했다.


‘일과 삶의 균형’ 중시

푸리에리 씨와 ‘카라박6’ 유치원을 방문했다. 유치원 지붕에 태양열 집열판이 보였다. 건축자재도 친환경 재료를 사용했다고 한다. 12~36개월 아이 78명이 다니는 카라박6에는 교사가 15명이다. 유치원 교사인 다니엘라 도미니카 과란토 씨는 카디아이 조합원이다. 출자금으로 1800유로(약 270만원)를 냈다. 더 이상 일을 할 의사가 없으면 출자금을 돌려받는다. 과란토 씨는 출산 때문에 잠시 일을 쉬었다. 카디아이는 임산부 조합원에게 다섯 달 동안 임금의 일부를 지원한다. 임신 기간에는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다. 카디아이가 ‘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전에는 초등학교에서 장애인 아동을 돌보는 일을 했다. 출산 이후 카라박6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일하게 돼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여성 1076명과 남성 170명이 노동자 협동조합 카디아이에서 교육과 의료 서비스와 관련한 일자리를 얻고 있다.

카라박 프로젝트에 참가한 급식 협동조합 캄스트는 직원 7700명을 두고 있다. 직원 가운데 대략 80%가 조합원이다. 이 급식 협동조합은 이탈리아에서 학교 급식 318개교 등 1221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앞서 말한 협동조합 기업 그라나롤로의 구내식당도 그중 하나다.

캄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만들어졌다. 파올로 젠코 캄스트 대표에 따르면, 초창기 캄스트를 만든 조합원들은 반파시즘 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이들은 조합을 만들고 파스타·빵 따위를 볼로냐 기차역에서 팔기 시작했다. 1968년에 기업이 노동자에게 점심을 지원하는 게 의무화되면서 급식 사업을 확장해갔다. 1970년대 말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되었지만, 과일과 고기 등 식자재를 공급하던 협동조합들이 지원에 나서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협동조합의 수도’ 볼로냐

캄스트의 거래 원칙은 단순하면서 까다롭다. 파올로 젠코 대표는 “우리는 노동자들이 안전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라고 말했다. 거래처를 고를 때 각종 인증서를 보유하고 있는지를 따진다고 한다. 안전한 작업장이라는 인증서를 받았는지, 어린아이를 고용한 사업체는 아닌지, 유기농 인증서를 받은 농장인지 등등을 세세하게 따진다.


ⓒ시사IN 차형석낙농 협동조합 기업 그라나롤로(위)는 탄자니아의 낙농 협동조합 설립을 돕는다.

볼로냐는 ‘이탈리아 협동조합의 수도’와도 같다. 농산물 생산에서 유통 그리고 소비자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협동조합의 손길이 닿는다. 변변한 대기업 없이도 유럽에서도 손꼽힐 만큼 윤택한 경제활동을 보이고 있다. 실업률도 3% 안팎에 불과하며, 2008년 경제위기 때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새로운 경제 모델로 볼로냐의 협동조합 경제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볼로냐 대학의 자마니 교수는 “협동조합이 400여 개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협동조합은 경험을 해보면 안다. 라자냐를 한번 먹어봐야 먹게 되는 것처럼. 협동조합을 알게 되면 삶의 질이 좋아진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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