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보 워리어(Rainbow Warrior)호
그린피스의 환경감시선 세 척 중 하나로 전 세계에서 환경감시 활동을 벌여왔다. 현재 2호가 운행 중이다. 1호는 1985년 프랑스 태평양 핵실험을 저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모루로아 섬으로 가던 중 프랑스 정보기관에 의해 폭파됐다. 이 사고로 그린피스의 사진작가가 사망했고 단체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한국에서의 활동을 끝으로 2호는 은퇴하고, 3호가 10월부터 운항될 예정이다. 배 이름은 지구를 치유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이는 ‘무지개 전사’를 예언한 인디언 여인의 전설에서 따왔다.

8인승 고무보트에 올랐다. 출렁이는 파도에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다. 조종석에 앉은 스페인 출신 선원 마이테몬포 씨(44)가 구명조끼 벨트를 끝까지 채우라는 시늉을 했다. 가슴팍 끈을 조이고 경북 울진 죽변항을 떠난 지 5분여, 고만고만한 크기의 고기잡이배 수십 척을 지나자 길이 55m인 선박이 시원스레 눈앞에 펼쳐졌다. 그린피스의 550t급 레인보 워리어(Rainbow Warrior)호였다. ‘무지개 전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몸통은 무지개색이었다. 


ⓒFlickr

삐뚤빼뚤한 글씨로 ‘핵 없는 한국(Nuclear Free Korea)’이라 쓰인 현수막과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문양. 멀리서도 알 수 있는 레인보 워리어호(워리어호)다. 워리어호는 올해 40돌을 맞은 세계적인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의 상징과 같다. 그간 해상에서 석탄 선이나 고래잡이배를 저지하는 활동을 펼쳐왔다. 환경운동연합과 그린피스 활동가 20여 명이 6월13일 인천을 출발해 영광·고리·월성·영덕을 거쳐 6월20일 울진 죽변항에 닿았다. 국내에 가동 중인 21기 원전 대부분을 돌아보는 일정이다.

죽변항은 외부 배의 정박이 불가능한 불개항이다. 할 수 없이 2㎞ 떨어진 곳에 닻을 내려 보트로 사람을 날랐다. 지역 주민 30여 명이 워리어호를 방문했다.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 있는 원전 근처에서 해상 캠페인을 벌이기 위해서다. 울진원전 단지는 워리어호에서 7㎞가량 떨어져 있다. 보트를 타고 내달린 지 15분여. 안개에 가려져 있던 산이 겹겹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수화를 연상케 했다. 


“워리어호가 다시는 오지 않게 되기를…”

그러나 종 모양의 시멘트 원전 6기가 눈을 방해했다. 동승한 한 지역신문 기자는 “한눈에 6개를 보기는 처음이다. 원전 안의 출입은 상당히 까다롭다”라고 말했다. 해상을 선택한 이유도 원전에 접근하기가 육로보다 용이하기 때문이다. 원전 바로 옆, 아파트 단지가 눈에 띄었다. 보트를 탄 사람들은 ‘원전 유치 반대’ 따위 구호를 외쳤다. 배가 움직일 때마다 해경선이 따라붙었다.


ⓒ시사IN 조남진6월20일 울진 죽변항 앞, 지역주민과 환경운동가들이 워리어호에서 내려 보트로 울진의 원전 지역을 돌며 핵 반대 해상 캠페인을 벌였다.

울진 지역의 원전은 6기다. 앞으로도 2기 건설이 확정된 상태이고, 2기는 신규 원전 후보지에 세워질 예정이다. 울진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신규 원전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졌다. 지역 매체인 〈울진신문〉 보도에 따르면 최근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신규 원전 유치 반대가 62.3%였다.

워리어호와 여정을 함께하는 김혜정 환경운동연합 일본원전사고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의 고향도 이곳 울진이다. 어머니와 친척들의 삶의 터전인 곳이다. 고향 앞바다에서 캠페인을 벌이는 김 위원장의 소회가 남달랐다. “앞으로 2기를 더 확정하면 총 10기가 된다. 근남면 살포리에 핵 단지가 들어서는 거다. 후쿠시마 사고로 위험성이 드러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다 잊어버린 것 같다. 사람들은 평생 삶의 터전이던 이곳을 문제가 있어도 떠날 수 없다.”

핀란드 출신 그린피스 핵전문가 해리 라미 씨는 한국 원전을 둘러보며 “크레이지(crazy)”를 연발했다. 원전 바로 옆에 주거지가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핀란드는 1㎞ 반경 안에 아무도 살 수 없도록 법률로 정하고 있다. 5㎞ 내에는 인원수도 제한된다. 그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독일·이탈리아 등에서 원전 포기를 선언하는 마당에 이웃 나라인 한국에서 원전을 늘릴 계획을 가졌다는 것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1%에 머무르는 재생에너지 비율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35쪽 상자 기사 참조). 


ⓒ시사IN 조남진워리어호의 삼척 방문은 1994년에 이어 두 번째다. 6월21일, 원전 유치에 반대하는 삼척 주민들과 그린피스 활동가가 다시 모였다.

캠페인에 참여한 울진 지역 한 초등학교 교사는 “한국수력원자력에서 학교로 사람을 파견해 아이들에게 원전이 안전하다는 교육을 한다. 지역 이권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어서 공식으로 원전의 위험성을 교육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교육 현장의 고충을 호소했다.

워리어호가 동해에 뜨자, 한국해양경찰과 관세청도 분주해졌다. 외국 선박이기 때문에 한국인이 탑승하기 위한 절차가 까다롭다. 관세청에서 승선 허가를 받는 것은 기본이고, 배를 타고 이동하려면 법무부의 동의가 필요하다. 선실에서 먹고 자며 1박2일 선상 생활을 해보려던 기자도 난관에 부딪혔다. 미리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던 일이라 혼란스러워하던 관계자들은 결국 불허 결정을 내렸고, 저녁을 먹은 뒤 기자는 철수해야 했다.

워리어호의 저녁 메뉴는 피자·닭고기·샐러드 등이었다. 16개 국적의 30여 명이 공통으로 즐길 수 있는 ‘인터내셔널’ 요리다. 인도 출신 요리사 윌린드로 이나시오 씨(35)가 분주했다. 네덜란드에서 온 사이먼 요하네스 씨(30)와 프리랜서 사진가 사이먼 림 씨(46)도 식당으로 향했다.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사이먼 씨는 배의 의료 담당이다. 림 씨는 그린피스 활동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장미·해골 문신을 한 2등 항해사 마르티 레노넨 씨(29)는 배의 조정 원리를 친절히 설명했다. 활동가와 자원봉사자, 선원이 뒤섞여 있다. 활동가의 경우 대개 3개월씩 배를 탄다. 선실의 방 13개, 화장실 3개를 나눠 쓴다. 


ⓒ시사IN 조남진6월20일 그린피스·환경운동연합 활동가들이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워리어호의 원전 지역 방문은 처음이 아니다. 1994년 지구의 날을 기념해 환경운동연합과 삼척·울진·부산·목포·영광 등지에서 일주일간 반핵 캠페인을 벌였다. 당시 출발지였던 삼척이 이번에는 종착지였다. 6월21일 오전, 삼척항에서 시민들이 그린피스를 반겼다. ‘삼척핵발전소유치백지화위원회’ 상임대표 박홍표 신부는 “방문을 환영하지만 워리어호가 다시는 오지 않아도 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린피스가 다녀가고 5년 뒤인 1999년 원전 건설이 취소됐던 삼척은 최근 다시 후보지로 선정됐다. 그린피스 동아시아 지부 매니저 라시드 캉 씨는 한국의 원전이 짧은 시간에 늘어난 데 대해 “반대 여론이 활발했을 때 그 동력을 이어나갈 그린피스 한국지부가 있었더라면 그린피스의 특기인 끈질긴 운동을 통해 성과를 냈을 것이다”라며 아쉬워했다. 


8월에 그린피스 한국사무소 설립 계획

그린피스 동아시아 지부는 올 8월, 한국지역 사무소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세계 6위의 원전 국가인 한국에 지부를 두고 반핵 운동에 본격 매진하기 위해서다. 세계에서는 41번째, 동아시아에서는 도쿄·베이징·홍콩·타이베이에 이어  다섯 번째다. 기후변화와 해상오염 문제 등 지역 특성에 맞는 이슈에 집중하기로 했다. 라시드 씨는 “한국은 핵연료를 많이 쓰고 원전을 수출하는 등 기술력이 높다. 대안 에너지를 활용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면 에너지 시장을 선도할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이번 원전 반대 해상 캠페인은 워리어호 2기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1957년에 지어진 증기 어선을 개조해 1989년부터 22년간 썼다. 5년간 워리어호를 운항했던 선장이자 15년 경력의 그린피스 활동가인 마이크 핀캔 씨의 조정실에는 88개국의 국기가 있다. 워리어호 2기가 다녀온 나라 수다.

핀캔 씨는 “한국은 들르는 지역마다 조금씩 서류 절차가 다르고 담당 기관의 요구가 많아서 힘들었다”라고 소회를 전하기도 했다. 선실 한구석, 6.6㎡ 규모의 그린피스 사무실에는 쿠웨이트·터키·알래스카 등 수십 개 지역의 론리플래닛(가이드북) 영문판이 꽂혀 있었다. 22년간 전 세계 환경재해 현장을 누비던 바다 위 무국적 감시단의 마지막 미션이 막 한국에서 끝났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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