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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백혈병’ 산재 판정까지의 대장정

모두의 예상을 깨고 법원이 ‘삼성 백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이번 소송은 원고에게 고난의 행군이었다. 뜻있는 변호사와 노무사, 양심적 증인 등이 있었기에 삼성이라는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다.

고제규 기자 unjusa@sisain.co.kr 2011년 07월 05일 화요일 제1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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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3일 서울행정법원 203호. 서울행정법원 14부 진창수 판사가 주문을 읽어 내려갔다. “원고 황상기(고 황유미씨 부친), 이선원(고 이숙영씨 남편)에 대하여 각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을 취소한다.” 삼성 백혈병을 산재로 인정한다는 판결이었다. 방청석 맨 앞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원고 정애정씨는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을 훔쳤다. 김은경씨가 그런 정씨 손을 부여잡았다. 황상기·송창호 씨는 꼿꼿하게 버티며 판결문 내용을 들었다.

예상을 깨고 삼성 백혈병을 산재로 인정해달라는 청구소송에서 일부 승소 판결이 났다. 함께 소송을 낸 정애정·김은경·송창호 씨는 산재 청구가 기각되었다. 원고 5명 가운데 2명이 산재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림 김성희
판결을 선고한 순간, 정애정씨(맨 오른쪽)는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왼쪽부터 황상기·송창호·김은경·정애정 씨. 삼성 백혈병 관련 작품을 준비 중인 만화가 김성희씨가 법정 풍경을 그렸다.


10여 분에 걸친 판결이 끝나자 원고들은 법정 밖에서 눈물을 훔쳤다. 경기민주노총 법률원 소속 노무사였다가 황상기씨를 만난 이후 삼성 백혈병 문제에만 매달리게 됐다는 이종란 노무사는 울고 또 울었다. 백혈병으로 남편을 잃고 산재 소송을 했지만 인정받지 못한 정애정씨도 “이건 승리다”라며 펑펑 울었다. 딸(한혜경)이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김시녀씨는 이 노무사를 아예 끌어안고 통곡했다. 삼성 쪽을 대리한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눈물의 법정’을 빠져나갔다.

이번 소송은 돌이켜보면 ‘대장정’이나 다름없었다. 황상기씨가 딸의 죽음 원인을 밝혀달라며 2007년 민주노총을 찾아갔고, 이 노무사를 만났다. 2007년 두 사람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반올림)이라는 시민단체까지 만들었다.

황씨는 2007년 6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냈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업보건안전연구원(산보연)에 삼성전자 기흥공장의 역학조사를 의뢰했다. 역학조사 결과 발암물질은 검출되지 않았다. 2007년 12월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상 질병 여부에 대해 평가를 보류했다. 그리고 추가 조사를 결정했다.

이듬해 산보연이 전체 반도체 종사자 22만9683명을 대상으로 역학조사를 벌였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상태 비교집단을 일반 국민으로 삼아, 백혈병 발병이 높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백도명 교수(서울대·보건대학원장) 등 전문가는 일명 ‘건강 노동자 효과’에 따른 왜곡 가능성을 제기했다(30~31쪽 기사 참조). 일반적으로 기업에는 건강한 이들이 입사할 뿐 아니라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이들이 퇴사하면서 건강한 노동자들만 남아 조사 결과가 일반 국민에 비해 건강한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조사에서 여성의 경우 사망 비율이 일반인에 비해 1.48배, 암 발병 비율은 1.31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비호지킨림프종은 일반인에 비해 2.67배, 조립 공정에 있는 생산직 여성은 발병률이 5.16배나 높게 나왔다. 하지만 산보연은 ‘일반 인구 집단에 비해 약간 높았으나 통계적으로 의미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근거로 근로복지공단은 ‘백혈병은 업무와 인과관계가 낮다’며 산재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시사IN 조남진
판결 직후 황상기씨(왼쪽에서 두 번째)는 “삼성은 노동조합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황씨 등은 마지막으로 법원에 소송을 냈다. 2010년 1월 근로복지공단의 불승인 처분을 취소시켜달라며 행정법원 문을 두드렸다. 피고는 근로복지공단이었지만, 피고 보조 참가인으로 삼성전자가 참여했다. 사실상 삼성과 법정 싸움이 시작되었다.

5월23일 행정법원 201호. 황상기씨는 윗옷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유미는 확실한 산재라고 생각한다”라며 최종 변론을 읽었다. 황씨는 “산업보건 전문의 증언 없이 이뤄지는 판결은 부실할 수밖에 없다”라며 재판장 앞에서 쓴소리를 했다. 진창수 부장판사는 “언제 그렇게 발언 준비를 했나”라고 물었다. 황씨는 “억울해서 언젠가는 말할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 메모를 늘 지니고 다녔다”라고 말했다.

이날 원고 변호인단은 재판부에 전문가를 증인으로 부르자고 요청했다. 지난 공판에서 재판부는 원고가 신청한 백도명 교수·김현주 단국대 교수·공유정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에 대한 증인 신청을 기각했다.

변호인단은 결심 공판인 이날 백 교수만이라도 불러서 증언을 들어보자고 다시 요청했다. 재판부는 이들이 낸 의견서나 연구보고서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다.

이번 소송은 과정 자체가 원고 처지에서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피고는 근로복지공단이었지만 실제 상대는 삼성이었다. 삼성은 법무법인 율촌에 소송을 맡겼다. 반면 원고 쪽은 변호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삼성과 맞서 선뜻 소송을 맡겠다는 변호사가 드물었다. 게다가 원고 형편상 무료 변론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반올림은 민주노총 추천을 받아 박영만 변호사와 박상훈 변호사를 접촉했다. 두 변호사 모두 “공익소송 차원에서 맡겠다”라며 승낙했다.

원고 변호인단은 팀플레이를 했다. 의사이기도 한 박영만 변호사는 산재 관련 전문 변호사이다. 그는 2005년 초까지 원진녹색병원에서 산업의학과 전문의로 근무했다. 박 변호사가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쓰는 각종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의학적으로 파고들었다.

법무법인 화우 소속인 박상훈 변호사는 법조계에 널리 알려진 노동법 권위자이다. 법원 내 개혁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지낸 그는 1984년 사법고시 2차에 합격한 뒤 한 달간 오토바이 부품 제조 공장에서 일하며 몸으로 노동 현장을 익히기도 했다. 2008년 ‘불법 파견도 2년 이상이면 직접 고용’이라는 대법원 판례를 이끌어냈다. 박상훈 변호사는 노동법 판례 분석을 맡았다. 이날 박 변호사는 ‘납, 유기용제인 IPA에 노출될 경우에도 백혈병이 발병할 수 있다는 점이 의학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으나 유해한 물질임이 분명해 백혈병 발병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2008년 대법원 판례를 들며 삼성 쪽 변호인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조우혜
황상기씨 등 원고들이 6월23일 판결 전에 삼성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시사IN 조우혜
판결 전 황상기씨는 삼성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삼성 쪽 경비원들이 황씨를 막고 있다.



박영만·박상훈 변호사 뒤에서 이종란·권동희·김민호 노무사 등이 후방 지원을 맡았다. 이들은 증언자를 확보하고 각종 자료를 정리했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와 재해 발생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입증되어야 하는데, 입증 주체는 원고 쪽이다. 박영만 변호사는 “원고 쪽 주장을 입증할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피고인 회사 쪽은 반박할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증인을 세우기도 쉽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4월11일 행정법원 201호. 황상기씨는 재판 시작 전 로비로 향했다. 양복을 입은 이 아무개씨에게 다가갔다. 삼성전자에 다니는 이씨는 이날 회사 쪽 증인으로 법정에 설 예정이었다. 황씨는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갔다. 있는 그대로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이씨는 지난 3월 원고 쪽 증인으로 나섰던 김기영씨 동료다.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 ‘웨거너 육아종’을 앓고 있는 김기영씨도 이날 법정에 나와 있었다.

이씨는 김씨의 진술을 대부분 반박했다. 가스 누출 사고도 없었고, 반도체 공정 중에 냄새가 나는 경우는 유해가스 누출보다 설비 자체의 과열 탓이라고 주장했다. 김기영씨는 그런 이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간혹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기도 했다. 원고 쪽 변호인 신문에서 박상훈 변호사는 “냄새가 설비 탓이라고 했는데 조사를 해보고 하는 얘기인가?”라고 물었다. 이씨는 “조사를 한 건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씨 신문이 끝난 뒤 재판부는 원고 쪽 변호인이 신청한 전문가 증인 세 명을 모두 기각했다. 재판이 끝난 뒤 박상훈 변호사는 “전문가 증인을 재판부가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아쉽다”라고 말했다.

3월14일 행정법원 201호.
이날 공판은 증인 출석 여부부터 관심을 끌었다. 지난해 12월 예정된 원고 쪽 증인 신문이 열리지 못했다. 증인으로 나서겠다던 전직 삼성전자 직원 두 명이 재판 직전 모두 증인 출석을 포기했다. 증인 신문이 열리지 못해 공판은 10분 만에 끝났다(<시사IN> 제173호 참조). 지난해 11월 첫 공판에서는 원고와 피고 변호인단이 프레젠테이션을 했다(<시사IN> 제168호 참조). 증인이 나서지 않아 2차 공판부터 어그러지면서 이종란 노무사 등 지원단에 비상이 걸렸다. 이 노무사는 “되돌아보면 그때가 고비였다. 증인을 세우지도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어렵게 증인으로 나선 김기영씨는 삼성 쪽 변호인단의 반대 신문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현장을 잘 알지 못하는 변호인단은 작업 매뉴얼대로 질문을 했다. 김씨는 “워낙 전문적인데 매뉴얼과 달리 현장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발생한다”라며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다. 삼성 변호인단이 김씨의 증언에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면서 이날 방청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와 재판장이 주의를 주기도 했다. 김씨는 가스 누출 당시 받은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법정에서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공판이 끝난 뒤 황상기씨는 김기영씨에게 “고맙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김씨를 비롯한 보이지 않는 이들의 도움도 이번 공판에서 크게 작용했다. 지난해 박지연씨 죽음을 계기로 삼성 백혈병이 공론화된 뒤 반올림에는 제보가 쏟아졌다. 현재 반올림이 집계한 삼성 백혈병 관련 피해자만 100여 명에 이른다(오른쪽 표 참조). 반올림은 지난 4월7일 한혜경씨 등을 중심으로 2차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6월23일 행정법원 로비. 이종란 노무사는 기자들 앞에 서기를  한사코 꺼려했다. 눈물범벅이 된 그녀는 “도저히 말을 못하겠다”라며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다. 황상기씨에 이어 카메라 앞에 선 이 노무사는 “산재 입증을 노동자에게 맡기는 법은 개정되어야 한다. 병든 노동자의 몸이 바로 증거이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라며 울면서 말했고, 말하면서 또 울었다. 이들이 기자회견을 하는 동안 삼성은 행정법원 판결 참고 자료를 냈다. 1심 판결에 불복해 근로복지공단과 함께 항소할 뜻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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