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풍경이었다. 〈시사IN〉 편집국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칸막이 책상마다 켜켜이 쌓인 서류더미와 데스크톱 컴퓨터,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프린터기, 전화기를 들고 승강이를 벌이는 ‘전투력 실린’ 목소리까지.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의 첫인상이었다.

강언주 간사는 아침부터 수백 장 분량의 문건을 일일이 복사하고 있었다. 며칠 전 국회에 요청해 받은 국회의원들의 정치자금 내역서였다. 다시 돌려줘야 하는 문건이다. “파일 형식으로 주면 편할 텐데….” 강 간사가 볼멘소리를 냈다. 국가기관은 원자료를 그대로 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 2차 가공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실비 명목의 수수료로만 540만원이 붙은 적도 있다. 어려운 살림에 큰 부담이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대표가 소셜 디자이너이라면, 우리는 정보 디자이너다”라는 전진한 사무국장의 설명대로, 전 국장을 비롯한 간사 3명은 국가기관을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거기에서 받은 자료를 가공해 널리 알리는 일을 한다. 일반인들이 정보공개 청구 시스템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도 함께 진행한다. 정보 디자이너라지만 곁에서 관찰한 결과, 이들은 정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에 가까워 보였다. 정부 기관 홈페이지를 수시로 돌아다니며 어떤 정보를 요청할지 아이디어를 얻는다.


ⓒ시사IN 조남진5월17일 서울 이화동 정보공개센터에서 열린 ‘정보공개 청구인의 밤’을 앞두고 단장이 한창이다.

직업 체험을 위한 일일 막내 간사의 자리는 사무실 한구석, 노트북이 펼쳐진 테이블이었다. 하승수 소장과 마주보는 자리다. 하 소장은 2008년 센터가 시작될 때부터 함께했다. 1998년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지 10년 만이었다. 정보공개법의 탄생으로 공공기관이 보유하고 관리하는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되었다. 국민의 알권리와 행정 권력에 대한 감시 기회가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법제화는 아시아 최초였다.

임시 간사의 미션은 센터 블로그(opengirok.or.kr)에 ‘오늘의 정보공개 청구’를 올리는 일이었다. 활동가들의 주된 업무는 정보공개 청구와 청구해서 받은 답변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다. 정진임 간사가 가르쳐준 방법에 따라 비교적 정보공개 내역을 잘 정리해놓았다는 경찰청 홈페이지를 찾았다. 오른쪽 하단 배너 중 ‘국회 자료’가 있었다. 평소에도 자주 들르는 곳이지만, 이런 게 있는 줄은 몰랐다. 국회의원이 경찰청에 요구한 자료 대부분이 공개되어 있었다. 정 간사는 여기서 경찰의 채증 장비 구입 예산을 보고 실제 어떤 기종을 쓰는지 상세 내역을 추가로 요청했다. 


ⓒ시사IN 조남진정보공개센터가 펴낸 〈정보공개는 다.〉 (왼쪽)에는 그간 공개한 정보공개 청구 내역이 담겨 있다.
정보공개 청구 방법은 간단했다. 온라인 정보공개 포털사이트(www.open.go.kr)에 접속해 신청서를 작성하면 된다. 궁금한 내용에 따라 청구 기관을 선택하고, 정보 내용을 간략히 입력한 뒤 우편·이메일 등 수령 방법을 선택한다. 접속에서 작성 완료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공개 여부는 10일 이내 결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질문은 구체적이되 간단하게 올리는 게 요령이다. 가령 ‘2011년 1월1일부터 1월30일까지 비서실장 업무추진비의 구체적인 사용 내역이 담긴 문서와 지출을 증빙하는 영수증과 같은 서류 모두를 사본으로 공개 요망’이라고 요청하는 식이다.

정보공개 청구 노하우를 얻어가는 것. 그것이 이번 체험에서 노린 ‘콩고물’이었다. 그간 취재차 정보 공개를 청구했다 거절당한 경험이 몇 차례 있어서였다. 활동가들은 충고했다. 담당 공무원의 취소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비공개’ 통보를 공식으로 받는 게 낫다고. 자기 부서 관할이 아니더라도 공무원은 청구 내역을 담당 기관으로 넘길 의무가 있다고 한다. 국방부·국정원과 같은 권력 기관은 안보를 이유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활동가들도 애를 먹는다고 한다.

‘오늘의 정보공개 청구’ 내용은 FTA 관련 부처별 연구 용역 목록이었다. 전체 79건, 24억원 규모의 예산이 소요되었는데 연구 내용 공개율이 16%대에 머물렀다. 액셀에 서투른 기자는 원자료를 가지고 끙끙댔다. 비용을 일일이 더해가며 한 시간 만에 내용을 작성했지만, 센터에서도 ‘데스킹(기사 첨삭)’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보 싸울 일 많아 수줍음 타면 일 못해

정보공개 청구는 기본적으로 행정 권력에 대한 감시를 목적으로 하지만 ‘실용’을 위해 이를 활용하는 길도 있다. 내 집 앞 도로에 보도블록 공사가 진행 중일 경우 해당 업무추진비가 얼마인지 알아볼 수 있고, 출산을 앞둔 예비 엄마라면 지역 내 산부인과의 제왕절개 및 자연분만 비율에 대한 정보를 요청해도 된다. 요청 건수에도 제한이 없다.

“왜 작성자 이름이 비어 있죠? 지난 2월부터 계속 그러네요.” 공손하지만 날카로운 음성이 귓가를 스친다. 정진임 간사와 서울시 관계자의 통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최근 서울시가 보내온 답변서마다 담당 공무원이 이름이 공란이었단다. 담당자를 모르면 관련 내용을 다시 묻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활동가들은 공무원들과 입씨름을 벌일 때가 많다. 센터 일을 하는 데 특별한 자격 조건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싸울 일이 많아서 수줍음을 많이 타면 이 일을 하기 곤란하다고 한다.

오후에는 세무사 네 명이 사무실을 찾았다. 며칠 전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받은 가산세 관련 자료를 놓고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자리였다. 가산세 대상이 대기업보다는 영세업자 위주의 ‘때리기’라는 지적이 많았다. 자문단을 꾸려 해당 자료를 어떤 목적으로 활용할지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처럼 받은 자료를 어떻게 활용할지 조언을 구하고 언론 매체와 연결시키는 일 역시 정보 디자이너의 몫이다. 


ⓒ시사IN 조남진정보공개센터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정보공개학교 ‘공터학교’의 졸업식이 5월17일 열렸다. 학생 7명이 졸업했다.

정보공개센터는 ‘귀족 NGO(시민단체)’를 지향한다. ‘뜨거운 가슴’만 강조하지 않는다. 월급은 꼬박꼬박, 근무는 주 5일이다. 운영비의 약 70%는 후원, 나머지는 자체 수익 사업을 통해 꾸려간다. 전진한 국장의 꿈은 ‘알 권리’ 재단을 만드는 일이다. 정보공개 청구 소송비용 등을 후원하는 재단이다. ‘사실의 힘’을 믿고 합법적인 위키리크스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정보공개센터는 언론과도 많이 닮았다.



●이 지면은 세상을 바꾸려는 ‘대안 직업’의 세계를 기자들이 직접 체험하는 난으로, 격주로 연재됩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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