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가 고속도로 위로 설정되었습니다. 목적지를 재설정해주십시오.” 내비게이션의 경고 메시지를 무시했다. 차를 출발시켰다. 목적지는 ‘××IC’. 뻥 뚫린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달렸다. 그만 출구를 지나쳤다. 인접한 IC로 빠져나가 유턴을 했다.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목적지인 ××IC를 찾느라 30분을 헤맸다. ××IC를 빠져나온 뒤 차를 길가에 세웠다. 전화를 했다. 만날 장소를 전달받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먼저 자리를 잡았다. 10분 뒤 두 사람이 나타났다.

어렵사리 만난 ㄱ씨와 ㄴ씨는 ‘삼성맨’이다. 무노조 경영 삼성그룹에 노동조합 깃발을 올리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7월1일 이후로 ‘D데이’를 잡았다. 7월1일부터 사업 또는 사업장 단위 복수 노조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노조 깃발을 올리려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삼성은 ‘페이퍼 노조’를 만들어 설립을 막았다. 복수 노조 금지 조항을 방패로 삼은 것이다. 삼성그룹 계열사로 합병되기 전에 생긴 노조의 경우, 형태는 유지시키지만 활동을 무력화하는 휴면 노조로 만들었다. 


ⓒ시사IN 조남진삼성에서 노조 설립을 추진하는 이들은 백혈병으로 사망한 박지연씨 사건(위) 등이 벌어지면서 여론이 회사 측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본다.

14년 동안 미루던 복수 노조 시행을 앞두고 재계와 노동계에 긴장감이 높아간다. 민주노총·한국노총 등은 7월1일 이후 대형 사업장을 중심으로 조직 확대를 꾀하고 있다. 서울지하철노조를 중심으로 곧 출범하는 이른바 제3 노총도 삼성을 공략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동안 노조 설립의 난공불락이라 여겨지던 삼성과 포스코 등이 노동계로부터 협공을 당하는 분위기이다.

2003년 결정적 국면 있었으나…

무노조 경영의 대표주자 삼성에서 ㄱ씨와 ㄴ씨가 ‘불온한 꿈’을 꾸기 시작한 건 단순했다. 노동자로서 법에 보장된 권리를 누리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회사가 보장한 노사협의회 틀에서 권리를 찾으려고 했다. ㄱ씨는 노사협의회 근로자 위원 후보로 나섰다. 곧장 출마 포기 압력을 받았다. 회사는 경선 출마 자체를 불온시했다. 회사 쪽이 찍어준 사람만이 단독 출마해온 관행을 깼기 때문이다. 당선한 노사협의회 직원 쪽 대표는 직원들을 바라보기보다, 회사만 바라보는 ‘회바라기’ 위원으로 활동했다. 출마의 뜻을 굽히지 않자 그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렇게 3년 전부터 불온한 꿈을 꿔왔다. 처음에는 혼자만 그러한 꿈을 꾸는 줄 알았다. 의외로 같은 꿈을 꾸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서로 알음알음 연결되었다. 이들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실패한 사례부터 학습하기 시작했다.

실제 결정적인 국면이 몇 번 있었다. 2003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삼성에 노조 깃발을 올릴 뻔했다. 당시 삼성분당플라자 직원들이 한국노총과 함께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제출했다. 성남시청이 노조 설립신고서를 반려하자 한국노총 간부들은 이틀간 밤샘 농성 끝에 노조 설립 신고를 마치는 뚝심을 보여줬다. 그러나 삼성분당플라자 직원들이 회사의 설득과 압박으로 신고 이틀 만에 이를 취하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도 2003년 호텔신라 직원들과 서울 중구청에 노조 설립 신고를 했다. 당시 호텔신라 기획팀장은 현 사장인 이부진씨. 등잔 밑에서 대형 화재가 터진 격이어서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이때도 사흘 뒤 노조 설립 취하서를 냈다. 알고 보니 이들이 노조 설립신고서를 제출하기 직전 서울지방노동청에는 또 하나의 노조 설립신고서가 접수되어 있었다. 페이퍼 노조로 노조 설립을 원천 봉쇄한 것이다. 복수 노조 금지 조항 때문에 사실상 노조 설립 자체가 물 건너갔다. 결국 백기를 들었다. 민주노총·한국노총 모두 삼성에 완패했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노동계와 삼성은 물밑에서 탐색전만 주고받았다. 


ⓒ뉴시스서울지하철노동조합은 4월29일 민주노총 탈퇴 건을 놓고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가결이었다.

이 같은 실패 사례부터 꼼꼼히 따져본 ㄱ씨와 ㄴ씨 등은 설립 총회 리허설까지 마쳤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방해에 대비해, 적어도 복수 노조 빗장이 풀리는 7월1일 이후로 D데이를 잡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고충이 적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외부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ㄱ씨 등은 민주노총 등과 연대를 적극 모색했다. 그는 “삼성에서 노조를 만든다고 하니 우리를 이상하게 봤다. 보상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시선이었다”라고 말했다.

“삼성 측 대응도 분주해져”

이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회사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다. 자발적으로 노조를 하겠다고 접근하는 직원까지 생겼다. ㄱ씨는 “뻔하지 않느냐. 염탐을 하겠다는 건데, 우리는 도청·미행이 다 되는 걸로 보고 일을 추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 회사는 노조에 함께하기로 한 이들을 회유해 이탈시키기도 했다.

내부 시선도 차가웠다.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변화도 엿보였다. ㄴ씨는 “예전에는 ‘노조는 무조건 안 돼’라는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누군가 하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이냐가 관건이다”라고 말했다.

회사 밖 분위기도 요즘은 나쁘지만은 않다. ‘삼성 백혈병’이나 삼성전자 탕정사업장에서 자살한 김주현 사건 등이 불거지면서 여론이 회사 쪽에 우호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김주현씨 자살과 관련해 삼성의 초기 대응은 ‘매뉴얼’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근로자에게 공개하도록 되어 있는 취업 규칙마저 대외비라며 공개를 거부했다. 삼성은 자살과 근무 환경은 무관하다고 버텼다. 하지만 유족과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이 계속되자 이례적으로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 명의로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유족과 서면 합의를 했다. 김성환 삼성 일반노조 위원장은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뭔가 할 수도 있겠다는 분위기가 있다”라고 말했다. 

삼성 계열사는 78개, 서류상으로는 7개 회사에 노조가 존재한다. 2003년에 만들어진 신라호텔은 조합원이 2명, 에스원은 2명, 삼성중공업은 38명이다. 사실상 페이퍼 노조이다. 이 외에도 삼성정밀화학 조합원(431명), 삼성생명보험(조합원 4334명), 삼성증권(조합원 50명, 삼성증권통합 조합원은 312명) 등에 노조가 설립되어 있다.

삼성정밀화학은 한국노총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을 상급단체로, 삼성증권과 삼성생명은 민주노총 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을 상급단체로 두고 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삼성생명과 삼성증권은 연맹에 조합비를 내지만 활동은 안 한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대리급까지 조합원 대상이었는데 최근에는 이를 과장급까지 확대해 조합을 더 희석시키고 있다”라고 말했다. 페이퍼는 아니지만 그림자 노조인 셈이다.

노동계가 삼성을 타깃으로 삼으면서 삼성의 대응도 분주해졌다. 지난해 고용노동부 국장급을 영입한 데 이어, 실무자 보강도 꾀하고 있다. 또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무노조 특별 교육’을 그룹 차원에서 실시했다. 삼성 계열사의 한 직원은 “지난해에는 4시간 정도 노조 폐해에 대해 강의를 들었다. 올해는 3월에 한 시간짜리 교육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삼성 계열사 직원은 “현대자동차 사례에서 보듯이 노조가 있으면 파업을 벌이고 노사 분쟁이 회사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지 동영상을 보며 교육받았다”라고 전했다.

삼성그룹은 정신 교육과 함께 노사협의회도 강화하고 있다. 삼성전자 일부 계열사의 노사협의회 대표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었다. 노동조합 대의원에 해당하는 노사협의회 근로자 위원은 직선이었지만, 위원장에 해당하는 노사협의회 대표는 간선제였다. 간선제였던 대표 선출 방식을 직선제로 바꾼 것이다.  


ⓒ뉴시스제121주년 세계 노동절 기념대회 참가자들이 5월1일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삼성그룹 외에도 노동계가 주목하는 또 다른 대형 사업장은 포스코이다. 포스코 역시 대표적인 무노조 사업장이다. 조합원 20명의 페이퍼 노조가 있고, 노경협의회가 활동하고 있다. 2009년 포스코 그룹 계열사인 포스데이타에 노조가 생겨 민주노총에 가입했지만, 곧바로 해산했다. 또 2009년 민주노총 금속노조 지부 형태로 해고자 등 5명 정도가 포스코지회를 설립했다. 지금은 거의 와해되었다.

포스코에 남아 있는, 활동하는 노동조합은 포스코 광양에 있는 사내하청지회뿐이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산하 포스코사내하청지회를 두고도 현재 탈퇴 압박이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조직폭력배까지 동원되었다며 노조가 반발하고 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관계자는 “7월1일 복수 노조 시행을 앞두고 원청(포스코)에 노조가 생기는 싹을 막기 위해 함께 근무하는 사내하청에도 노조 탈퇴 압력이 계속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교섭 창구 단일화 조항이 회사 측 ‘안전판’

현재 포스코 광양제철소 사내하청지회는 덕산·삼화산업·EG테크 분회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5월2일 덕산 소속 이 아무개 부지회장이 조직폭력배 조직원 세 명에게 납치되어 2시간 동안 감금당한 일이 벌어졌다. 노조에 따르면, 조직폭력배들은 “노조를 탈퇴하면 3000만원을 주고, 포스코 쪽 아는 사람과 연결해주겠다”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허형길 덕산 분회장은 “조합 탈퇴 요구가 3~4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이뤄졌는데, 최근 들어 부쩍 무리수를 두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압박이 원청(포스코)과 무관하지 않다고 노조가 의심하는 근거는 매년 7월1일 사내 하청 회사와 포스코가 계약할 때 반영되는 평가관리제도 때문이다. 사내 하청의 목줄을 쥐고 있는 이 심사와 관련해 ‘노사 관계’ 항목 배점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조폭을 동원했다는 노조 측 주장에 대해 사내 하청업체인 덕산 관계자는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다. 원청과 상관없다. 회사가 뭘 알아야 답을 할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노사 관계 심사 항목에 대해서는 “평가 관리제도에 노사 관계 배점이 이뤄지는 것은 맞다. 더 이상은 모른다”라고 얼버무렸다.

복수 노조 허용은 삼성·포스코 등 무노조 기업 처지에서 당혹스럽다. 더 이상 페이퍼 노조 카드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든든한 또 다른 방패도 생겼다. 바로 교섭 창구 단일화 조항이다. 복수 노조가 생기면 노조 자율 결정→과반수 노조→공동 교섭단의 과정을 거쳐 교섭 창구 단일화를 이룰 수 있다. 노조끼리 자율적으로 교섭단을 꾸리지 못하면 과반수 조합원을 둔 노조에게 배타적인 교섭 대표권을 행사하게 한 셈이다. 이렇게 되면 소수 노조가 고사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이상우 미조직비정규사업실장은 “소수자가 삼성이나 포스코 등 미조직 사업장에서 노조를 만들더라도 단체교섭권이나 행동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독소 조항이다. 해고를 각오하지 않는 이상 노조 결성이 쉽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노동계의 염려는 경영계 쪽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 대한상의가 지난 4월 복수 노조 전국 설명회에 참석한 235개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복수 노조 허용 후 새로운 노조가 결성될 것으로 보는 기업은 24.9%에 그쳤다. 75.1%가 현실적으로 신설 노조가 곧바로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삼성그룹에 노조 깃발을 올리려는 ㄱ씨와 ㄴ씨도 소수 노조의 태생적 한계를 알고 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서둘러 자리를 뜨면서 이들은, 노동단체나 시민사회단체에 ‘내비게이션’ 구실을 기대했다. 소수 노조의 한계 때문에 깃발을 들더라도 고립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만큼 길잡이 노릇을 해달라는 것이다. 물론 목적지까지 도착할 차를 직접 운전해야 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ㄱ씨는 “노동 3권은 법에 보장되어 있다. 우리는 법대로 살고 싶다. 법대로 살 수 없는 현실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으냐”라고 말했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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