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도시는 우주처럼 무한 팽창을 거듭하고, 더욱더 ‘특별’히 복잡해지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굳이 서울에 사는 특별함을 찾는다면, 옛 경계에서 발견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서울 성곽 순례길을 걸으며 이 도시의 대견한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성 밖, 즉 사대문 밖에서 사는 백성이다. 조선시대였다면 매일 혜화문(동소문)을 통과해야 했을 서울의 동북쪽에 산다. 여진의 사신들이 반드시 거쳐야만 한양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는 그 문은 더 이상 적도 아군도 구분하지 않고 언덕 위에 고즈넉이 서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그 처지가 사뭇 부럽던 어느 봄날, 나는 생수 한 병 사들고 혜화문으로 올라갔다. 그것이 서울 성곽길의 첫 순례였다.

성곽길에서 발견한 ‘서울의 대견한 얼굴’ 


ⓒ시사IN 백승기서울 성곽길을 걷다보면 우리에게서 멀어져버린 조선이라는 과거가 새롭게 다가온다.

혜화문에서 시작해 와룡공원·숙정문·창의문을 통과하는 북쪽 코스는 낙산과 인왕산을 연결한다. 서울 성곽 순례길에 유용한 안내서를 편찬한 녹색연합 분류에 따르면, 3시간 정도 소요되는(5.5㎞) ‘난이도 상’ 코스다. 그러나 순례는 결코 ‘종주’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한 번은 산책에 나섰다가 성벽 아래 정자에서 사생대회에 참여한 꼬마들의 그림만 한참 훔쳐보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경신중·고등학교의 담벼락에 삐뚜름하게 붙어 있는 ‘학생들 담을 넘어다니지 말 것’ 경고 문구와, 돈가스 집 주차 안내원들의 요란한 호객성 몸짓은 참 오래된 풍경이다.

평범한 서울 시민의 일상은 성북동을 지나면서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경치가 좋아지는 것이야 당연한 일. 숨을 고를 땐 반드시 성벽을 등지고 돌아서야 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그 도시가 600년 이상 나라의 중심이 되어온 서울이다.

정도전의 눈으로 서울을 굽어보니…

조선 태조는 서울 천도를 결정(1394년)하고 정도전에게 도시 설계를 맡기면서 친히 여러 산에 올라가 성을 축조할 곳을 관찰했다고 한다. 어느 위치에 종묘·사직·궁궐·도로·시장을 놓아야 나라가 흥할 것인지, 안전하게 천세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 고심했을 것이다. 왕의 처지가 되어 서울을 바라보면 조선시대 제일의 법궁인 경복궁, 한때 정궁 구실을 했던 별궁 창덕궁,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대학 성균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까지, 어느 것 하나도 위치가 예사롭지 않다. 



순례길은 와룡공원에서 성 밖으로 빠져나가 잠시 호젓한 숲길에 접어들었다 다시 성안으로 되돌아온다. 남산에 비해 숲 가꾸기가 덜된 부분이 많지만, 북악산 소나무의 자태는 왕족의 그것만큼이나 위풍당당하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1·21사태 소나무’보다는 〈1박2일〉 ‘이수근 소나무’로 더 알려진 소나무도 그중 하나다. 삼청동· 북촌한옥마을·인사동 등 걷기 좋은 도심 코스들로 쉽게 연결되기에, 성곽 순례로만 끝내기가 쉽지 않은 곳이 바로 이 코스이기도 하다. 담만 넘지 않는다면 새고 싶은 곳에서 새면 된다.

과거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의 길이는 총 18.6㎞ 정도다. 남산-낙산-백악산(북악산)-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은 4대문과 4소문을 품고 있었다. 서쪽에 있던 돈의문(서대문)과 소의문(서소문), 남소문은 모두 소실되었고, 숭례문(남대문)은 화재로 타버려 복원 중이다. 혜화문도 원래 자리에서 서북쪽으로 30m 정도 옮겨진 것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혜화문이 있던 그 자리를 매일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1100만명 이상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매일 서울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고 있다. 그러니 한 번쯤은 서울의 경계를 따라가보아야 한다.

역사적·정치적 사건을 휘감은 성곽들

우리가 도망치듯 멀어져버린 ‘조선’이라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일어났던 그 모든 드라마틱한 역사적·정치적 사건들의 현장을 보존하고 있는 ‘띠’가 바로 서울 성곽이기 때문이다. 


ⓒ시사IN 백승기복잡한 도시에서 ‘밖’으로 밀려나지 않으려 애쓰지 않는 것이 서울 백성의 산책법이다.

성곽 복원이 꾸준히 이루어져서 이제는 서울의 어느 방면에서든 성곽 순례에 나서기가 쉬워졌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경우 공사 중에 서울 성곽을 포함한 역사 유적들이 발굴되면서 ‘역사문화공원’이라는 테마를 갖게 되었는데, 성곽이 공원 한가운데를 지나간다. 훼손된 구간의 도심 코스를 포함해 순례길은 약 23㎞이다. 1구간 숭례문~장충체육관(6㎞, 4시간), 2구간 장충체육관~혜화문(5.5㎞, 3시간), 3구간 혜화문~와룡공원(5.5㎞, 3시간), 4구간 창의문~숭례문(6㎞, 4시간)으로 나누면 여행이 편하다.

지난 토요일 밤에도 저녁상을 물리고 와룡공원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흐드러진 개나리와 산수유, 벚꽃 사이에서 여름을 노리는 나무들이 부지런히 새잎을 밀어올리고 있었다. 남산타워의 지휘 아래 동대문 패션타운의 빌딩들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이 외롭고 복잡한 도시에서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지 않는 것, 경계에 서더라도 내 지표를 중심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것, 그것이 서울 백성의 산책법이다.



먹을거리

광장시장의 ‘육회 골목’

서울 성곽길 주변의 맛집 추천은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왜? 서울인 데다, 맛집이 널려 있으니까. 그 가운데서도 굳이 고른다면 종로5가와 동대문 경계에 있는 광장시장을 추천하고 싶다. 광장시장은 도심 시장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상거래가 이루어지고, 재래시장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곳이다. 그래서 인정 넘치는 맛집 탐방도 가능하다. ‘아, 아직 서울 도심에 이런 시장이 있었구나!’ 하는 감탄사와 함께.

광장시장에는 몇 가지 명물이 있다. 먼저 ‘마약김밥’이다. 마약처럼 중독된다고 해서 마약김밥인데, 속은 별것 없다. 오징어무침과 함께 먹는 충무김밥 사촌쯤 된다고나 할까. 광장시장은 입맛 돋우는 육회(사진) 집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육회 골목의 ‘자매식당’과 ‘창신육회’ 등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광장시장은 생대구탕과 아바이순대 그리고 다양한 부침개도 유명하다. 이 같은 서민적인 먹을거리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길을 나서면 서울 성곽길이 더욱더 즐거울 것이다.
기자명 천소현 (〈여행신문〉 취재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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