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뉴저지 주에서 뉴어크 다음으로 큰 광역도시인 에디슨 시 시장에 한인이 취임했다. 미국에서 선출직으로는 최초로 한인 시장이 탄생했다며 한국 언론도 떠들썩했다. 당시 서른여섯 살이던 최준희씨(미국 이름:준 최)가 그 주인공이다. 최씨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미국으로 이민 온 한인 1.5세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우주공학을 전공했고, 콜롬비아 대학에서 공공정책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민주당 빌 브래들리 캠프에서 활동하며 정치에 입문했고, 2002~2005년 뉴저지 주 교육국장을 지냈다.

선거에 뛰어들 당시만 해도 최씨는 정치 신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예상을 뒤엎고 12년 동안 에디슨 시장 자리를 독점해온 민주당의 거물 조지 스파도로를 꺾자 파란이 일었다. 처음에 그가 출마했을 때만 해도 일부 백인들은 “아시아계에게 어떻게 광역시를 맡길 수 있겠느냐”라며 인종 폄하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최씨는 이를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선거판에서 이를 인종 차별 이슈로 만들고, 현직 스파도로 시장과 그를 둘러싼 에디슨 시 민주당의 터줏대감들을 인종주의자로 몰아붙인 것이다. 그 결과 전국의 아시아계 인권 활동가들이 에디슨 시 선거판에 몰려들었다. 〈뉴욕 타임스〉 〈유에스에이 투데이〉 같은 유력 일간지도 이를 앞다투어 보도했다. 미디어의 관심이 집중된 틈을 타 최씨는 에디슨 시 집권 세력들의 부패와 무능을 조목조목 따지며 시민들을 선거판으로 끌어냈다. 


ⓒ김동석 제공4월29일 최준희 전 에디슨 시 시장(가운데)이 2012년 연방 하원 선거에서 뉴저지 주 제7 지역구에 출마한다고 선언했다.

최준희씨는 이처럼 당 밖에서 만들어낸 정치 세력을 당내로 끌어들임으로써 시장직을 움켜쥐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는 2008년 오바마의 백악관 입성이 최준희 에디슨 시 시장과 닮은꼴이란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했다. 2009년 1월 변화와 희망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취임한 오바마 대통령은 전국의 시장 70명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는 프로그램의 일곱 번째 초청자 명단에 최준희 시장을 올리기도 했다.

“새 시대에 미국은 새 대통령을 요구한다”라고 강조하면서 1993년 대통령에 취임한 빌 클린턴은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면서도 당의 울타리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어떤 때에는 공화당보다도 더 우파적인 정책을, 어떤 때에는 시민사회 좌파들도 언급하지 못할 정도의 좌파 정책을 취했다. 좌든 우든 국민의 요구에 부합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의 8년 임기 동안 민주당 정통파 사이에는 당의 정체성 논란이 일었다. 2000년 대선전에서 빌 브래들리는 당의 정체성 확립을 부르짖으며 앨 고어를 위협했다. 빌 브래들리를 이어간 것이 2004년 돌풍을 일으킨 하워드 딘이었고, 이 같은 맥락을 이어 마침내 민주당의 정통성을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백악관 입성에 성공한 것이 2008년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최준희씨는 2000년도 20대의 나이에 빌 브래들리 캠프에 뛰어들었다. 그때부터 브래들리는 정치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2005년 시장선거 때에는 브래들리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주기도 했다. 그해 9월, 최준희 지원 유세를 위해 당시 초선이었던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을 에디슨 시에 불러온 사람 또한 브래들리였다. 당시 에디슨 시를 장악한 민주당 세력은 뉴저지 주에서 가장 무능하고 부패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외부 신인이 시장이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야 할 판이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민주당 현직 시장이 예비경선에서 패한 뒤 본선거전에서는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이변이 일어날 정도였을까.

에디슨 시 시장 활동, ‘적’조차 인정

대중적 지지에 힘입어 극적으로 당선된 최준희 시장은 개혁의 칼을 들었다. 만 2년 동안 경찰노조의 협박과 회유에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에는 비대해진 경찰 조직을 절반으로 감축했으며, 자격 없는 공립학교 교사들을 정리해 공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개발 사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부정부패를 척결함으로써 시 예산을 정상화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의 개혁 조처에 맞서 당내 기득권 세력들은 똘똘 뭉쳤다. 2009년 최준희는 재선을 위한 예비선거전에 실패했다. 지역 신문에는 ‘작게 지고 크게 이기는 최준희 시장’이란 기사가 실렸다. 10년 만에 뉴저지 주 지사직을 탈환한 공화당의 크리스 크리스티 주지사는 취임 일성으로 에디슨 시의 개혁이 모델이라고 발언했다. ‘적’조차도 그의 개혁 성과를 인정한 셈이었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처절하게 패한 민주당은 일찌감치 2012년 선거 전략을 짰다. 전국민주당위원회(DNC)는 선거대책위원장에 뉴욕의 유태계 6선 의원인 스티브 이스라엘 의원을 선출하고, 2012년 전략 지역 50곳을 선정했다. 더불어 반드시 하원의원으로 당선시켜야 할 후보 50명을 선정하고, 3월 초순부터 이들을 순서대로 워싱턴으로 불러들여 인터뷰를 진행했다. 최준희 시장은 이 중 첫 번째로 워싱턴에 불려간 4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 자리에서 낸시 펠로시 원내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그에게 뉴저지 주 제7 지역구에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에디슨 시를 포함한 뉴저지 주 제7 지역구는 지난 15년 동안 공화당 표밭이었다가 최근 들어 민주당 성향으로 바뀌고 있는 곳이다. 2008년 대선 당시 이 지역에서는 오바마가 매케인을 이겼다.

한인 커뮤니티, 얼마나 지원하느냐가 관건

지난 4월29일 미국 내 한인 정치 참여 풀뿌리 운동단체인 ‘한인유권자센터’ 창립 15주년 행사의 초청 연사로 참석한 최준희씨는 행사 직전 특별 기자회견을 갖고 2012년 연방하원 선거전에서 뉴저지 주 제7 지역구에 출마할 것을 공식 선언했다. 한인 2세(정확히는 1.5세)의 연방의원 도전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1990년대 캘리포니아 주에서 활동한 김창준 의원은 한인 1세였다. 최씨가 하원 진입에 성공하면 동부 지역에서 아시아계로는 최초로 연방의원이 탄생하게 된다. 한인 인구의 3배에 달하는 중국계에 앞서 한국인이 연방 하원에 먼저 진입하는 셈이다.

서로 후보가 되려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지역에서 중앙당으로부터 먼저 출마 권유를 받았다는 것은 최준희씨 본인의 말마따나 ‘멋진 기회(Wonderful Opportunity)’를 잡은 셈이 된다. 이제부터 관건은 한인 커뮤니티의 모금이다. 2008년 루이지애나에서 베트남계인 조 카오 씨가 공화당 후보로 연방 하원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자 전국의 베트남 출신 이민자들이 호응했다. 그들은 자국계가 연방의원이 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을 펼쳐 5개월 만에 약 200만 달러를 모았다. 이 같은 지원에 힘입어 조 카오는 공화당 후보가 되었고, 11월 선거에서 연방 하원에 당선되었다.

현재 아시아계 연방의원은  상원 2명, 하원 8명이다. 나라별로는 일본계 5명, 중국계 2명 등이다. 이민자에게 연방의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소수계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연방의회에 한 명이 있으면 90점이고, 한 명이 없으면 0점이다’란 말이 있다. 연방의원 한 명을 확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해주는 말이다. 특히나 한국은 분단 국가여서 연방의회에서 다루는 이슈가 상당하다. 우리가 연방의원 도전을 선언한 최준희씨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기자명 김동석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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