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말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을 폭로한 지도 80여 일이 지났다. 석 달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예술·정치·종교계 인사의 추악한 면면이 드러났다. 이제는 대학과 중·고등학교까지 미투 운동이 퍼지고 있다. 지난 2009년 성상납을 강요한 인사들의 명단을 폭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우 고 장자연씨 사건도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었던 수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명을 넘겼다. 최근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장자연 리스트 사건에 대해 검찰에 사전조사를 권고했다. 폭로자의 용기와 더불어 사회적 공감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미투 운동을 통해 체감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가벼운 유머처럼 소비하는 일도 끊이지 않는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미투 운동을 가열차게 해서 좌파가 더 많이 걸렸으면 한다”라고 말해 미투 운동을 진영논리에 이용한다는 빈축을 샀다. 배스킨라빈스는 공식 인스타그램에 게시된 광고 영상에 “너무 많이 흥분” “몹시 위험”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배우 고 조민기씨가 피해 여성에게 보낸 성희롱 메시지를 마케팅 수단으로 썼다는 비판이 일자 부랴부랴 영상을 삭제했다. 음식 배달 애플리케이션 배달의 민족이 개최한 ‘배민신춘문예’도 문제가 되었다. 음식을 소재로 한 짧은 글을 올리는 이 이벤트에 일부 누리꾼이 “제 다리를 보더니 침을 삼키면서…” “미트(Meat) 운동” 같은 글귀를 올린 것이다. 배달의 민족 측이 삭제 방침을 밝히면서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최근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났다. 롯데엔터테인먼트는 공식 인스타그램에 영화 〈레슬러〉 홍보 사진을 올리면서 ‘[단독] 체육관에서_타이트한 의상_입은_A씨_ 유출 사진_모음.zip’이라는 글을 덧붙였다. 미투 운동으로 어느 때보다도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높은 때에 디지털 성범죄를 희화화하는 듯한 문구로 항의를 받았다.
이윤택 사건을 필두로 연이어 성폭력 고발이 터져 나온 공연예술계에서조차 미투 운동은 농담거리가 되었다. 뮤지컬 배우 김태훈씨는 팬과 사진을 찍는 행사에서 어깨에 손을 올리며 “미투 하면 안 된다”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져 출연 중인 작품에서 하차했다. 그는 사과문에서 “용기를 내 미투를 하신 피해자 분들에게 저의 경솔함이 상처가 됐을 거라 생각하니 죄책감에 마음이 무겁다”라고 밝혔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폭로 글을 살펴보면 공통적인 이야기가 있다. 피해를 호소해도 무시당했다, 혹은 그것이 당연히 견뎌야 하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는 한탄이다. 이렇게 그동안 고립되고 흩어졌던 개개인의 목소리를 묶어내기 위해 떠오른 단어가 ‘미투’다. 그런 의미에서 미투는 “나도 당했다”보다는 “나도 고발한다” 혹은 “나도 당신의 아픔에 공감한다”라는 주체적인 선언에 더 가깝기도 하다.
미투 희화화는 2차 가해에 공모하는 일일 수도
그러므로 미투를 농담으로 소비하는 행위는 연대의 무게감을 떨어뜨리고 약자의 언어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2차 가해에 공모하는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악의 없이” “의도치 않게”라는 말도 면죄부가 되지는 못한다. 피해자의 상처에 공감하는 데는 복잡한 지식이나 사고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더구나 일상에서 “내가 이러면 너도 미투 할 거냐?”라는 식의 미투 희화화는 주로 직장 상사·교수·교사·선배와 같은 상급자에 의해 이뤄지는데, 이는 단순한 무지 탓으로만 보기 어렵다. 자신은 절대 피해자가 될 일이 없다는 것, 그리고 듣는 이들이 그 자리에서 불편함을 대놓고 표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발언이다. 약자의 입을 막고 자신의 권력을 재확인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은 그 수단이 농담이냐 성폭력이냐의 차이일 뿐 쌍둥이처럼 닮은 모습이다.
-
당신들의 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당신들의 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장일호 기자
딸을 낳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다. 그날 이후, 밝은 옷과 치마를 즐겨 입던 사람은 사라졌다. 검은색 바지를 유니폼처럼 입었다. 치마가 조금만 짧아도, 옷 색상이 조금만...
-
이윤택이라는 괴물은 어떻게 탄생했나
이윤택이라는 괴물은 어떻게 탄생했나
임지영 기자
서울시 종로구 명륜3가에 위치한 ‘30스튜디오’는 연희단거리패 창단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불이 난 건물을 헐값에 인수한 뒤 2016년 10월27일 문을 열었다...
-
여성의 목소리로 민주주의 새로 쓴다
여성의 목소리로 민주주의 새로 쓴다
장일호 기자
‘숭한 짓’의 정체에 대해 이제는 할머니도 말하기 시작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설 연휴 고향에 다녀온 한 회원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회원의 고향 마을...
-
한국에서 성범죄자가 처벌받지 않는 놀라운 이유
한국에서 성범죄자가 처벌받지 않는 놀라운 이유
이상원 기자
‘유력한’ ‘존경받는’ ‘인기 있는’…. 미투 운동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에게 붙던 수식어다. 그래서 고발 내용만으로도 전율할 만했다. 그들이 저질렀다고 알려진 성폭력은 대중에게...
-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만 줍지 말고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만 줍지 말고
오수경 (자유기고가)
얼마 전 교회 청년들과 내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이 당하는 차별과 혐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한 남자 청년이 불쑥 끼어들었다. “저도 그렇고, 제 ...
-
끝없는 이야기, 끝장내야 할 이야기
끝없는 이야기, 끝장내야 할 이야기
장일호 기자
씻고 침실에 들어와 눕기 전 30분 타이머를 맞춘다. 적어도 하루 30분쯤은 책 읽기에 시간을 쓰고 싶어서 지난해부터 들인 습관이다. 모바일 안에서는 재밌는 일이 초 단위로 벌어지...
-
미투가 페미니즘과 만날 때
미투가 페미니즘과 만날 때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군사주의 문화가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지위에 따른 남성 중심적 위계주의가 강력한 사회규범으로 작동한다. 또한 ‘남성다움’이란 남성의 ‘여성 지배’와 연결되곤 한다. 성폭...
-
일본의 ‘미투’ 망언 풍년이로구나
일본의 ‘미투’ 망언 풍년이로구나
홍상현 (〈게이자이〉 한국 특파원)
미투 열풍이 일본 열도에 번지고 있다. 일본 미투 운동은 한국이나 다른 나라와 같으면서도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피해 여성들이 폭로하며 불붙은 점은 같지만, 문화 예술계 중심으로...
-
미투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어
미투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어
이민경 (작가)
서지현 검사의 ‘미투(Me Too)’로부터는 석 달, 미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_내_성폭력 운동’으로부터는 1년 반 정도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미투 앞에서 크게 둘로...
-
불법 촬영 피해자가 ‘남자’라는 이유로?
불법 촬영 피해자가 ‘남자’라는 이유로?
이은의 (변호사)
‘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 5월16일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최다 추천 청원 제목이다. 5월11일 시작된 청원은 닷새 만에 35만여 명...
-
또 하나의 축구 국가대표팀
또 하나의 축구 국가대표팀
양정민 (자유기고가)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 남자 축구 대표팀은 1승2패로 막을 내렸다. 16강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지난 대회 우승팀인 독일을 잡으며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축구 팬을 자처하...
-
평범한 그는 슈퍼히어로가 되어
평범한 그는 슈퍼히어로가 되어
황도윤 (자유기고가)
영화 〈킥 애스:영웅의 탄생〉이 기존 슈퍼히어로 영화와 다른 점은 주인공이 능력 없는 히어로라는 점이다. 자칭 ‘킥 애스’인 주인공 데이브는 슈퍼맨 같은 초능력도, 아이언맨 같은 ...
-
40˚C 여름에 맞는 여성 인권의 한겨울
40˚C 여름에 맞는 여성 인권의 한겨울
양정민 (자유기고가)
8월14일은 제1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었다.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 최초로 공개 기자회견에서 피해 사실을 밝힌 이날은 그동안 시민단체 차...
-
‘출산 해법’이 아니라 ‘염장지르기’
‘출산 해법’이 아니라 ‘염장지르기’
양정민 (자유기고가)
‘명절증후군’은 몸에만 남는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 사이에서 화젯거리가 떨어지면 으레 나오는 ‘오지랖’은 마음에 생채기를 남긴다. “결혼을 왜 안 하느냐?” “결혼한 ...
-
진지하고 강인한 여성의 얼굴 [취재 뒷담화]
진지하고 강인한 여성의 얼굴 [취재 뒷담화]
고제규 편집국장
당당했으면, 화사했으면, 우아하게 나왔으면…. 2018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서지현 검사 표지 사진 콘셉트를 두고 이정현 미술팀장, 장일호 사회팀장, 윤무영 사진팀장이 회의 또 ...